[Review] 탄생하는 딸, 부활하는 어머니 - 연극 '찰칵'

글 입력 2024.01.05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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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찰칵>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뒤흔들어 놓는 작품이다. 우리는 보통 어머니가 자식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는 자식이 어머니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생각보다 그렇게 괴상한 표현이 아니다. 태내에서 어머니와 자식은 엄격하게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출생을 통해 탯줄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갓난아기 시절 견딜 수 없는 불안과 재앙을 대신 짊어진 존재였으며, 아기에게 공간과 시간, 만족과 절망을 안겨다 주는 마법적인 환경 그 자체였다. 모든 아기는 최초의 어머니-그를 돌봐주었던 최초의 환경-로부터 존재하는 것을 배운다.

 

아기한테 어머니가 그런 존재였다면, 어머니가 없다면 그의 삶이 탄생할 수 없다. 반대로 어머니는 어떨까? 어머니와 아기가 하나의 몸이었다면, 그리고 충분히 아기가 완전히 분리되기 전에 어느 날 사라져버린다면, 그 아기가 그에게 차지하던 만큼 자기 자신을 상실한 기분이 되지 않을까? 아기가 그의 삶에서 장기에, 심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아기를 잃어버린 순간 그의 삶은 살아있는 척을 연기할 뿐이다.

 

아이는 나를 존재하게 해주었던 마법적인 환경을, 어머니는 가장 연약했던 자신의 어떤 부분을 찾기 위해 방황한다. 그런 어머니와 아이가 만난다면, 아이가 그제야 삶을 느낄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그제야 삶을 느낄 것이다. 삶은 탄생 후에야 시작된다. 그러지 않은 삶은, 느낄 수 잊고 살아있는 척 할 뿐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 나에게 연극 <찰칵>의 주제가 그랬다. 탄생하지 못한 아이와 죽어버린 어머니가 만나, 탄생하고 부활하는 이야기.

 

연극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래와 같다. 말심은 어린 나이에 바다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어떤 사람인지 모를 남편과의 관계에서 딸을 임신하게 된다. 말심은 딸을 키워낼 자신이 없어 해외로 입양시킨다. 딸을 입양 보낸 말심은 자기 파괴적 삶을 이어나간다. 몸을 혹사하면서 빨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며, 딸의 탯줄을 보관하며 그리워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마저 가혹하게 부정한다. 드디어 말심의 심장은 심각하게 부어오르고,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말심은 부어오른 자신의 심장에서 딸을 잉태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말심은 배를 통해 딸이 출산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에서는 아직 출산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말심은 심장이 그토록 부풀어있었던 것이라고 상상한다. 자신의 삶을 자조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던 중, 기적적으로 말심은 자신과 딱 맞는 심장을 찾는다. 수술을 받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하던 말심은 어느날 창밖에서 고통스러운지, 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새-딸, 그리고 그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를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음을 깨닫고 수술받기를 결심한다. 회복된 몇 년 후, 봉구의 SNS 게시물을 계기로 말심과 봉구를 만난다.

 

한편, 봉구는 입양을 간 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양부모는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학교에서 그녀는 이질적인 동양인이었고, 집안에서는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없었다.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새로 들어온 남자아이가 양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듯한 눈빛을 받자, 봉구는 충격을 받고 집을 나온다. 그녀는 어머니가 준 고무공을 손에 쥐고 노숙자로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전시회에서 동양인 여성의 슬프고, 기쁜, 호기심이 넘치는 이상한 사진을 본다. 봉구는 그 사진에 매료되어 그곳에 오래오래 머물다가 방랑하는 삶을 '관람객'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고향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후에 이루어지는 봉구와 말 심의 만남이 이 연극의 주요 내용이다. 차례대로 기술했지만, 봉구와 말심이 만난 순간부터 내용이 전개된다. 관객들은 39년 만에 만난 말심과 봉구처럼, 각 인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약간은 호기심과 애정, 원망 어린 관점으로 이 작품의 전개를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말심과 봉구가 그랬던 것처럼, 각 인물의 삶과 이야기를 알게 된다. 연극의 흐름으로도 말심과 봉구가 어머니와 딸이 된 시점에서, 작품에 심어진 수많은 상징과 떡밥들이 해결된다.

 

연극 <찰칵>의 가장 멋진 점은, 관람객들이 몰입할만한 탄탄한 서사적 구조를 기반으로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를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각 소재는 정확히 서사적 연결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석을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입체적이다. 작품에서 사용된 모든 상징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작중 전체 서사에서 독특하게 기능하고 두드러지는 상징만 두 가지로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먼저 두드러지는 것은 손수건에 싸인 탯줄과 고무공이다. 나는 이 상징이 두 사람의 관계라는 작품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뚜렷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각 인물에게 서로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구체화 시키는 입체적인 소재로 해석한다.

 

"떠나보내지 못한 오래된 물건"이라는 속성 아래에, 두 가지 상징은 비슷한 의미가 있다. 전자는 말심이 봉구가 떠난 뒤 유일하게 남아있어 육체고, 후자는 봉구가 어머니로부터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로 39년의 삶에서 서로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두 물체는 비슷한 상징의 의미가 있다.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찰칵'의 순간은 작품을 이끌어가는 카메라뿐만 아니라, 이 두 물체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39년이라는 삶에 있어서 말심과 봉구의 관계는 '찰칵'에 가까운 순간이지만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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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사적 연결성도 탁월하지만, 더욱 탁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성을 걷어내고 각 인물의 이야기 차원에서 보면 또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래된 탯줄은 손수건에 쌓여 말심이 자신의 기침을 가릴 때, 자신이 버린 딸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때 입을 가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기본적으로 탯줄에 쌓인 손수건으로 입을 막는 행위는 말심에게 있어서 자신의 고통(기침)을 가라앉히고 진정시키는 것이다. 딸과의 원초적 연결을 상징하는 탯줄을 통해 숨을 몰아쉬고 진정시키는 말심의 반복된 행동은 그녀의 그리움과 고통을 시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녀 안에 휘몰아치던 죽음의 충동을 구원한 것이 딸과의 만남이라는 마지막 삶의 충동인 것을 고려했을 때, 이 장면은 좀 더 복잡하게 해석할 수 있다.


봉구의 상징은 좀 더 직관적이다. 그녀에게 고무공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물받은 것이다. 좀 더 자유롭게 상상해보자면, 어린 그녀에게 고무공은 큰 상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일 수 있다. 그녀는 고무공을 튕기면서 놀다 방심한 사이에 어머니를 잃어버렸다는 가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 그녀가 이후의 삶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그녀의 기억에서 삶을 만족하고 몰입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따뜻함'에 적응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원초적 상실을 회복하게 한 것은, 늙은 동양인 여성-어머니를 연상시키는-의 사진과의 교류 덕분이었다.

 

작품 내에서 고무공이 활용되는 방식도 흥미롭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고무공은 '진실게임'에서 사용되는 마이크처럼 사용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봉구가 말심으로부터 그 공을 돌려받았다는 데 있다. 말심은 봉구를 잉태하기 전 죽음에 가까운 호수에 몸에 마음을 맡기는 삶을 살아왔다(후술하겠지만, 나는 이 시점까지 그녀의 호수가 죽음의 충동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생명의 잉태는,'호수 괴물의 씨'처럼 그녀의 평화를 방해했고, 말심은 감히 딸에게 공을 주고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로소 딸의 생명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생명력으로 인지한 순간 그녀는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 말심은 고통스럽더라도 공을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봉구가 진실 게임 도중 어머니를 잃은 자신의 삶을 슬프게 이야기하면서 말심이 어렵게 건넨 고무공을 던지고 강렬한 비트에 온몸을 비트는 춤을 추는 장면을 좋아한다. 어느 곳에서도 속하지 못하고 응축시켰던 슬픔과 분노가, 어머니로부터 겨우 돌려받은 고무공으로 인해 터져 나온 것이다. 어머니의 상실로 인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삶의 만족과 생생함, 안도와 기쁨, 그제야 그녀를 출생시켰던 연약한 부모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그 장면의 다이내믹에 녹아들어 있다.

 

두번째로 주목할만한 상징은, '호수'다. '호수'는 작중 전개를 통해 변화하는 말심의 정신세계를 표현한다. 처음에 그녀의 '호수'는 불온한 죽음의 향기가 드리우는 것으로 표현된다. 처음 호수는 들여다보면 나쁜 일이 일어나는 소문이 도는 것으로, 어린 말심은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들여다본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말심은 악에 받쳐 호수로 달려가지만 죽는 대신 그곳을 평화롭게 헤엄치게 된다. 이 시점에서 호수와 바다는 평화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것 같지만,그녀의 전반적인 삶을 고려해볼 때, 여전히 호수의 깊은 부분처럼 불온한 죽음의 충동이 그녀에게 존재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느날 말심은 호수 저너머에서 괴물을 발견하는데, 그 괴물은 호수로 들어와 배 안으로 들어와 그녀를 잉태시킨다. 임산부가 된 말심은 그제야 바다에서 편안하게 헤엄치지 못한다. 그녀의 평화를 방해한 생명의 잉태는 마치 '악마의 씨'처럼 불안하게 다가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말심은 그 안에 들어간 것이 악마가 아니라 새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바다가 하강하고 침잠하는 이미지라면, 하늘을 향해 날개를 움직이는 새는 상승하는 이미지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그녀를 해방하고, 새를 해방한 죄로 자신은 안락한 죽음을 갈망하게 된다.

 

마치 고통스러워하고, 노는 것처럼 보이는 창가 밖의 새를 발견한 순간, 그녀는 그제야 딸의 생명력과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한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연장하고, 그녀는 새로운 신발과 옷을 입고 자신의 딸을 만나러 간다. 햇빛이 돌담을 비추는 가장 아름다운 날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선물해줬던 것과 같이 하얀 운동화를 신고 말이다.

 

말심과 잊고 살아있는 섬이 가라앉은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은 앞서 기술한 잊고 살아있는 격렬한 춤과 함께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말심은 새하얀 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바다를 돌아다닌다. 이 늙고 죽어가는 여자한테서 방출되는 어린아이와 같이 떼 묻지 않은 순수한 기쁨은, 카메라의 하얀 빛 속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아름답다. 봉구도 같은 마음으로 어린아이처럼 웃어대는 자신의 어머니를 찍는다. 이 순간, 그녀의 평생에 존재했던 어두운 충동의 바다는 새로운 생명의 의미가 덧붙여진다.

 

<찰칵>은 대단하다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강렬한 상징과 더할 나위 없이 원초적 목소리를 끌어내는 아름다운 연기. 처음으로 연극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일부만을 가져와 소개했지만, 이 작품에는 보물과 같은 순간들이 숨어있다. 작품의 전개, 드러내고자 하는 복잡한 정서와 이야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의 조합은 이 작품을 연극 이상의, 관람객의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조은아 배우와 이진경 배우는 이전 연극 '육쌍둥이'에서도 놀라운 수준의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번 2인극이라는 집중된 조명 속에서 정말 불어넣는다고 것인가 의심될 정도였다. 이 글을 거의 완성해 가는 지금도 그 배우가 그 배우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이 연극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내가 이 작품의 가치를 미리 듣지 못해 다른 작품을 보지 못하거나 n회차 관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작품의 초반과 종장에 골덴베르크 협주곡의 아리아 부분을 몇 번이나 돌려 들으면서(사실 논리적인 바흐의 건반악기 작품이 왜 이 작품의 주요한 음악으로 깔렸는지 의아했는데, 이 아리아가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주제라는 점을 고려할 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이전 작품인 <슈미>에서도 느낀 강렬한 장면 장면에서 보이는 날카로운 감각과 감수성이 총이 아니라 심장에다 하는 이야기로 표현된다면 이런 작품이 되는구나 싶다. 이런 생명력이 넘치는 작품이 오늘날 한국에 있어서 다행이고, 또 내가 그것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말하지만, 너무 아쉬웠다. 나중에 다시 한번 열리면 또 감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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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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