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극중극을 통해 성이분법적인 규율과 억압 체제 뒤틀기 [공연]

연극 <알앤제이(R&J)> 후기
글 입력 2024.03.13 23:0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34EDB98D-F9F6-4B5D-BD40-355E98BD1729.jpg

 

 

「알앤제이(R&J)」는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가톨릭 학교에 재학 중인 네 명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늦은 밤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금단의 책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펼친다. 학교 규칙을 어긴 채 작품의 낭독극을 이어나가던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금지된 사랑, 억압, 폭력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버린다.


이 작품은 구조 체제 안에서 이전 시대 작가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발견한 내면의 진실된 감정을 받아들이는 청소년들의 이야기이다.


내가 객석으로 입장하자마자 본 것은 바로 무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의자들이다. 「알앤제이(R&J)」에서는 ‘무대석’이라는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무대석은 말그대로 객석이 무대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무대석으로 향하는 통로는 일반 객석 통로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은밀한 느낌을 준다. 나는 무대석으로 향하는 통로를 걸으며 잠깐이나마학생들이 비밀 연극을 올리기 위해 지나왔던 길을 상상해 본다. 내가 예매한 자리는 본무대 기준으로 조금 높은 곳에 위치했기에 무대 전체를 한눈에 담아낼 수 있었다. 특히 무대석은 일반 객석과 마주 볼 수 있게끔 되어 있으며, 무대석과 일반객석은 무대를 감싸는 형태이다. 이러한 객석 구조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잘 맞는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빠져나와 비밀 연극을 진행하고 있지만 어디에서나 그들을 통제하는 규칙과 제재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존 체제의 틀 안에 맞춰지기를 강요당한 이들은 지극히 수동적인 태도를 내비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체재에 순응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은 「알앤제이(R&J)」에서 가톨릭 학교의 학생들로 표현됐다. 「알앤제이(R&J)」에서는 오프닝을 비롯한 극 중간마다 특정한 종소리가 반복하여 등장한다. 학생들은 해당 종소리에 맞춰 발을 구르는데, 이는 정확히 일정한 박자를 유지한다. 체계적이면서도 억압적인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또한 그들을 옥죄는 듯한 사각형 조명은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알앤제이(R&J)」 속 학생들은 저마다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모두 다 같은 학생, 오직 ‘학생’ 뒤에 붙는 숫자만이 나와 타인을 구분짓기 위한 용도로만 쓰일 뿐이다. 그들이 처음 이름이 존재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 바로 당시 금서였던 「로미오와 줄리엣」을 낭독하는 때이다.

 

 

D095B4BB-9537-4F2E-8BE3-7B08ECE04666.jpg

 

 

 

시대의 뒤틀림을 만든다


 

학생1은 질서가 잡혀 있는 세상에 처음으로 균열, 즉 뒤틀림을 유발하는 존재이다. 다른 학생들은 기도를 하고 자신의 죄를 고해하지만, 학생1만이 이 모든 걸 거부한다. 그는 나머지 학생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몰래 빠져나와 사랑을 말하는 내용의 글을 읊는다. 체제의 붕괴는 항상 작은 균열로부터 시작된다.

 

시대의 뒤틀림은 인물뿐만 아니라 한 소품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학생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역할극을 할 때 붉은 천이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붉은 천은 학생들의 잠재된 욕망을 가시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뒤틀림 자체를 나타내는 핵심 오브제이다. 붉은 천은 칼, 독약, 드레스, 침대 등 여러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역할극 속에 침투하는 시대의 폭력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 속 「로미오와 줄리엣」은 균열 그 자체이다. 균열 안에 있는 것은 자유로운 욕망이 대부분이나 종종 현실 세계에서 체화된 폭력이 그들을 찾아오기도 한다.

 

로미오(학생1)와 줄리엣(학생2)이 함께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학생1과 학생2는 진중한 태도로 역할극에 임하지만, 학생3과 학생4는 그런 두 사람에 비해 다소 장난기가 섞인 모습을 보인다. 이때 학생1과 학생2가 서로 입을 맞추려고 하자 학생3, 4는 온몸으로 이를 말린다. 그 과정에서 학생2를 향한 학생3의 폭력이 드러나기도 한다.

 

학생3이 학생2의 머리를 책으로 내리치는 순간, 자신이 폭력을 가담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폭력은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체벌로 경험한 것이다. (실제로 오프닝에서 학생3은 엉덩이에 회초리를 맞는 등의 벌을 받는다) 극중극 세계에 폭력성을 끌고 들어왔다는 것은 이미 체제에 물들어져 버린 학생들이 무의식중에 나온 행위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행위는 지극히 현실 세계와 맞닿아있으면서 「로미오와 줄리엣」 속 억압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 장면 이후 학생3은 충격을 받고 더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충격을 받은 후 극중극 인물에 더 몰입하는 이 지점은 학생3만의 자각을 넘어 작품 전체에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이 장면에서는 전환점을 표현하는 배우의 세심한 연기력이 요구된다.

 

학생3, 4가 역할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구간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줄리엣이 아버지 앞에서 페리스 백작과의 결혼을 거부하는 장면이다. 페리스 백작과 결혼하지 않겠다 말하는 줄리엣의 말을 듣자 아버지는 그녀에게 직간접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이때 폭력을 행사하는 역은 학생3, 4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역할극은 학생들이 억압된 현실을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탈출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극을 진행하는 도중에도 그들은 학교 내에서 체화된 폭력을 작품 속에 끌고 온다.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초반부 역할극과는 달리 폭력은 그들이 인지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급작스레 찾아온다. 학생들이 역할극 속 인물과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경계를 흐릴수록 격해지는 폭력의 수위는 때로는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4D2CB00A-FC52-456D-AD3A-3D45D30FC41E.jpg

 

 

 

성의 이분법적 경계 흐리기


 

학생3, 4가 연기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전형적인 여성상의 모습을 띠고 있다. 사회에서 흔히 여성스러움이라 일컬어지는 동작과 말투를 일부러 과장하여 재현하고 있다. 이는 사회에서 규정지은 여성의 성 역할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줄리엣을 연기하는 학생2는 사회에서 정의내린 여성성을 본인의 줄리엣에 투영하지 않는다. 학생2의 줄리엣은 그저 ‘학생2가 연기하는 줄리엣’으로 남아있다.

 

이 부분은 처음 줄리엣이 무대 위에 등장하는 순간에서 잘 드러난다. 학생3, 4는 「로미오와 줄리엣」 속 인물과 자신을 구분 지은 채 연기하고 있지만 학생2는 본인의 원래 말투를 그대로 역할극 안에 넣었다. 이에 학생3과 4는 적잖이 당황한 듯한 모습을 내비친다. 그저 장난인 줄로만 알았던 이 역할극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정해져 버린 현실 속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도 읽힌다. 극 중 인물들은 현실 세계에 직접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역할극이라는 수단을 통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대항한다. 역할극은 그들이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도구이자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작동한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자.”

 

「로미오와 줄리엣」 속 인물들이 욕망에 도달하고자 하는 여러 과정은 곧 학생들이 외부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진실된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 15페이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남성과 여성, 두 성별의 특성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점이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여자의 몫이다. 순결로써 성적 품위를 지키는 것도, 순종적인 사회 질서를 보존하는 것도 여자다. 대담한 남자라면 신성한 법률과 관습을 무시하고 여자의 순결을 정복할 순 있을지 몰라도 그 영향은 감히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남자라면, 그 남자를 매료하여 세상을 뒤집는 것이 여자의 운명이다.“

 

이는 오프닝에서 학생들이 돌아가며 외치던 책 속 한 구절이다. 고정된 성 역할에 대해 주입식 교육을 받던 학생들, 그들은 책의 페이지를 찢어버리는 행위를 통해 과거 특정 성별에게 강요했던 미덕을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그들은 저 자신을 마주하는 것을 넘어 기존 사회 체제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결말이 났고 날은 밝아온다. 아이들은 밤새 사랑을 나누고 동시에 죽음까지 맞는 경험을 했지만, 어김없이 교복을 차려입는다. 학생1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또다시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학생1도 나머지 학생들과 함께 체제에 순응하려 해 보지만 결국 다시 주저앉고 만다. 어젯밤의 꿈은 쉽사리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끝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꿈처럼 헛된 것이라 절망하지 마.“

 

마지막은 첫 장면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르다. 이 작은 변화는 학생1이 다시 한번 억압의 상징인 교복을 벗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붉은 천은 학생1에 의해 위로 던져지고, 그것은 공중에서 나부낀다. 그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다시금 븕은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그 순간, 나머지 학생들은 학생1을 둘러싼 채 서로를 마주 본다.

 

 

B87AF5D2-F0A4-4213-8EE6-7087E65D6220.jpg

 

 

커튼콜,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손을 흔든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발을 구르고 진동을 느끼며 끊임없이 서로의 위치를 인식한다. 힘차게 발을 구르는 것은 분명 같은 동작이나 그 의미만큼은 분명 이전과 다르다. 억압의 상징물로 사용되었던 이 행위는 마지막 순간에 다다랐을 때 먼 곳에서도 자신이 무대 위에 존재함을 상대방에게 알리는 핵심 장치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발을 구르는 주체는 늘 역할극 속 인물이 아닌, 본인 자신이라는 점이다. 억압과 체제의 행위로써 나타났던 발구름이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그들만의 신호로 바뀌게 된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방금 전 감각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해 여전히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학생들의 성장은 끝을 내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완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의 욕망을 마주한 것처럼, 나 또한 「알앤제이(R&J)」로 인해 그동안 외면해 왔던 '진실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꿈은 성장통을 야기하고 학생들은 그 성장통을 통해 꿈꿀 수 있다. 

 

 

[임유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