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보다 덜 무서운 이야기 -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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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섬뜩하다. 이 명제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참이다. 사람이 사람을 속이거나, 죽이거나, 망가뜨리는 일들의 만연. 우리는 우리를 끔찍하게 만드는 세상의 많은 일을 목격하면서(혹은 저지르면서) 몸서리친다. 이처럼 세상이 섬뜩하므로, 현실의 섬뜩함에서 잠시 눈을 돌리기 위해 우리는 호러라는 장르를 찾곤 한다.
그러므로 호러의 조건은 공포감이다. 호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현재의 두려움보다 더한 공포를 만들어야 성립되는 장르다. 호러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창작물들이 실패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반드시 당신의 오늘보다 무섭거나, 적어도 오늘만큼 두려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호러가 되는 일에 확실히 성공한 소설집 한 권이 있다.
브라이언 에븐슨의 호러 소설집 『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하빌리스, 2024)를 본다.
에븐슨 소설들의 시작은 대체로 모호하다. “그 소녀는 얼굴이 없었다”(9쪽)와 같은 찝찝한 묘사로,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온다는 사실을 깨달”(187쪽)은 당황스러운 상황으로, “사실 탑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탑으로 불렀다”(126쪽)는 공간적 혼란으로 문을 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등장해 음산한 긴장과 혼란을 만들고, 결정적 순간에 정체가 드러나 혼란을 해소해야 하는 것이 호러의 정석적인 문법이라면, 에븐슨은 그 정석적인 법칙의 절반만 따른다. 그의 소설에는 해답이 없다. 섬뜩한 의문으로 시작해서 더 깊은 의문으로 끝을 맺는다.
예컨대 책에 맨 먼저 수록된 짧은 소설 「어디로 봐도」에서 소녀의 정체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단지 꿈에 나타난 소녀가 적의를 드러낸 채 ‘나’를 응시하며 끝날 뿐이다. “어느 쪽이 앞모습인지 구별할 수 없”(9쪽)는―분명 눈의 형상 자체가 보이지 않을― 소녀의 모순적인 응시가 은밀한 공포감을 자아낼 뿐이다. 앞과 뒤조차 구분할 수 없는 인식의 혼란에서 오는 두려움. 이처럼 ‘어디로 봐도’, 혹은 어떻게 봐도 가시지 않는 혼란이 그의 이야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에븐슨이 공포감을 조성하는 다른 방식 하나는 기과함이다. 실제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외형을 가진 채 비상식적인 행동을 일삼는 존재들이 자주 등장한다. 마치 옷매무새를 만지듯 피부 가죽을 당겨 몸에 맞게 걸치는 남자(「새어 나오다」), 형체가 없어 사람의 몸속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조종하는 존재들(「자매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매끄러운 표면만 있는 사람(「빛나는 세계」) 등이 그렇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섬뜩함은 일련 기괴한 외형과 낯선 행동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에븐슨의 작품 속 진정한 공포는 다른 곳에서 분출된다. 이를테면 세계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78쪽) 같은 것.
「세상의 매듭을 풀기 위한 노래」는 자신의 집에서 사라진 어린 딸을 찾는 아버지의 시선이다. “집 안 모든 곳을 뒤졌”(46쪽)으나 아이는 없다. 집 밖으로 나가 아이를 찾아봐도 아이는 끝내 발견되지 않는다. 벽 너머에서 “그의 딸, 다니와 닮은 목소리”(56쪽)가 부르는 노래만이 희미하게 들릴 뿐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그는 마침내 희미한 진실의 단면을 발견한다. “그는 딸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것. 어쩌면 “자신이 딸을 죽였”을 수도 있으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그와 지금의 그가 과연 같은 사람”(63쪽)일 수는 없다는 것. 명확한 인과의 연결도, 참과 거짓의 구분도 없이 갑작스레 드러나는 이러한 진실 앞에서는 누구도, 무엇도, 할 수 없다. 혼란 끝에 덮쳐오는 공포에 숨이 막혀갈 뿐이다.
에븐슨 소설의 끝은 열린 결말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닫힌 결말이다. 인과의 끝을 단단하고 명확하게 매조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성과 논리를 통해 해석의 길을 자유롭게 열 수도 없게 만든다. 사건 이전과 이후의 상상을 제한하는 막연함에서 비롯된 공포다. 어떤 이야기를 만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과를 찾기 시작하며, 결말의 개연성에 안도하려 노력한다. 에븐슨은 그 노력마저 헛되게 만드는 장르가 호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야.”(34쪽)
그의 소설은 그저 삼켜진 자들의 이야기다. 이유를 모르고, 책임도 없으며,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무기력하게 통째로 삼켜지는,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120쪽)으나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들의 이야기. 삼켜졌던 자들끼리의 연대는 언제고 존재할 수 있지만(「탑」),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한 희망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삶과 닮아있어 한층 더 공포스럽다. 더 무서운 삶보다 덜 무서운 이야기를 애써 쓰고 읽으면서 호러는 계속되고, 우리는 “혹시나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어떠한 차이도,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34쪽)도록 삼켜져버린 막연함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차승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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