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How about You (1)

글 입력 2024.02.2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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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카페에서 일한다. 게으른 사장과 무례한 손님들과 함께 하는 매일매일이 그녀는 지겹고 고달프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직업은 택배기사다. 그의 고객들은 불친절하고 왕처럼 대접받기를 원한다. 그는 이런 대우를 받는데 지쳤고, 성질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서 일하는 여자와 택배 트럭을 모는 남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만나게 된다.

 

 

처음 영화를 만들었던 때를 떠올린다.

 

동아리에 들어온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이 동아리의 목적이 술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어날 쯤에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찍어보는 영화였다. 부회장 누나가 톡방에 포스터 한 장을 업로드했다. ‘제4회 경찰인권영화제.’ 이제부터 우리가 준비할 공모전이었다.

 

영화 제작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프리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프로덕션. 프리프로덕션은 쉽게 말해 촬영을 위한 준비 단계다. 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쓴다. 배우 캐스팅, 촬영 스케줄 작성, 로케이션 헌팅, 미술 작업, 콘티 작업 등 영화의 제작을 위한 전반적인 준비가 이때 이뤄진다. 프로덕션은 본격적인 촬영 단계다. 포스트 프로덕션 땐 영상의 편집, 사운드 작업, 색 보정 등 각종 후반 작업이 진행된다. 


복잡한 작업이지만 그 시작은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이번 영화의 초점은 인권이었다. 동아리원들과 회의를 하는 동안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범죄자 인권, 노동자 인권, 외국인 인권, 군대 인권 등등. 그런데 이걸 어떻게 영화로 녹여내지? 선배 몇 명을 제외하면 영화는커녕 UCC 조차 찍어본 적 없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물론 나도 포함이었다). 부족한 자신감만큼이나 입술에는 무게가 더해졌다. 침묵이 길어졌다.


잠시 후 누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주변의 사소한 인권 침해에 대해 다뤄보는 건 어떻겠냐고. 예를 들어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받은 부당한 대우라던가, 교수의 갑질, 똥군기 문제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A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말은 기본이요, 커피 리필을 부탁하는 손님, 아이를 대동한 진상 손님 등등. 누군가는 커뮤니티에서 본 배달직 종사자들의 고충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자 친근한 사연들이 쏟아졌다. 이야기의 틀도 조금씩 잡혀갔다.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 모두의 사소한 인권 침해 이야기.


영화는 팀을 나누어 총 2편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팀에선 같은 과 동기였던 A와 B가 시나리오를 담당하기로 했다. 나는 촬영 감독에 지원했다. 그렇게 첫 번째 회의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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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흘렀다. 학교 수업 때문에 답사 차 군산에 왔을 때였다. 사흘 동안 이어진 일정에 온몸은 습기 먹은 빨랫감마냥 무거웠다. 얼른 기숙사로 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에 빠져 박물관 내부를 하릴없이 돌아다니는데 A와 B가 다가왔다. 우리가 만들 영화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 시나리오 써본 적 있니?”


자리를 옮기자마자 A가 대뜸 물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요점은 이랬다. A와 B는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동아리에서는 초보인 그녀들을 위해 시나리오 쓰는 방법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무지의 벽에 가로막힌 그녀들은 결국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모두가 초보인 동아리 안에서 그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나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습작 소설 몇 편을 써본 적은 있었지만 시나리오는 나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까지 그녀들을 외면하자니 마음이 약해졌다. 무엇보다 우리의 첫 번째 영화가 시작부터 이런 식으로 어그러지는게  싫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A와 B의 부탁을 승낙했다. 그냥 소설 하나를 쓴다고 생각하자. 시나리오를 써본 적은 없지만 읽은 적은 많으니 대충 형식만 흉내 내면 어떻게든 되겠지. 


물론 돌이켜 생각하면 참 무모한 결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에 기숙사로 돌아온 순간부터 나의 후회는 시작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자마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부탁을 덥석 받아들였을까.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되든 안 되든 주말 저녁까지는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부회장 누나에게 보내주어야 했다. 고맙게도 A와 B는 자신들이 정리한 아이디어 파일을 보내주었다. 머리를 찬물에 감으며 나는 그녀들이 써 내려간 문장들을 떠올렸다. 


우리가 그날 나눈 이야기의 핵심은 ‘우리 주변의 사소한 인권침해’에 있었다. 너무나도 사소한 탓에 당해놓고도 금세 잊어버리고 마는, 혹은 저질러놓고도 그것이 인권침해인지도 모르는 자잘한 사연들 말이다. A와 B가 보내준 파일 속에는 다양한 사례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사연들이었다. 학교에서 겪는 사례들도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사소한 인권침해라 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했다. 그 순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런 사소한 인권침해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도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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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내내 직장에서 시달린 여자가 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전철에 올랐는데 다행히 빈자리들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바로 앞에 놓인 빈자리로 다가가는데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옆에는 검은 피부의 외국인 남성이 꾸벅꾸벅 졸며 앉아 있었다. 결국 그녀는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섰다. 


한편 오늘 하루 내내 고깃집에서 불판을 갈던 남자가 있다. 기나긴 영업이 끝나고 드디어 마감이다. 오늘도 만만치 않은 하루였다. 진상 손님에다가, 겨우 5분 앉아 있던 걸 가지고 30분 내내 잔소리하던 사장까지. 분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묶은 쓰레기봉투를 밖에 내놓으려는데 아뿔싸. 또 왔다. 저 할머니. 폐지를 줍는답시고 틈만 나면 가게 앞에 찾아와 내놓은 쓰레기들을 어질러 놓고 사라지는 그 할머니. 그녀를 보자마자 남자의 혈압이 솟구쳤다.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남자는 쓰레기봉투를 내팽개치고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핀잔과 손가락질을 쏟아냈다.


이 사연에서 중요한 건 그들의 인간성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는 데 있지 않다. 순간의 행동에 대해 비판할 순 있겠지만 그들의 본성이 악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 등장하는 사람 좋아 보이던 주인공의 어머니도 주변에 누군가가 없다면 몰래 쓰레기를 버리곤 했다. 인간은 누구나 적당한 크기의 선함과 딱 그만큼의 악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사소한 인권침해는 바로 그 희미한 경계에 놓인 일종의 외줄타기인 셈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희미했던 이야기의 조각이 윤곽을 드러냈다. 우선 두 명의 주인공이 필요했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서로에게 피해를 주고받는 관계에 놓일 것이다. 하지만 그 피해는 너무도 사소한 탓에 쉽게 잊어버리거나, 혹은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대신에 그 피해의 파장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마치 두꺼운 얼음을 도끼로 쪼개는 듯한 충격을 체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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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의 뼈대에 두 명의 인물을 설정했다. 성별은 공평하게 남자와 여자로 각각 두었다. 이제 이들은 사소한 인권침해를 주고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적으로 사소한 인권침해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줄 어떤 아이템이 필요하다. 나는 쓰레기에 관한 사연들을 떠올렸다. 배달을 갔더니 집주인이 가는 길에 버려달라며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봉지를 건넸다는 어느 배달부의 사연과 주문한 커피를 내주었더니 돈은 물론 자신의 쓰레기까지 덤으로 건네는 진상 손님을 상대한 카페 아르바이트생의 사연을 말이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쓰레기가 공통적으로 들어간다. 이들의 사연을 내 이야기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본적인 틀이 잡히자 시놉시스 작업도 속도를 받았다. 2시간쯤 지났을까. 마침내 두 쪽 분량의 시놉시스가 완성되었다. 큰 산을 넘었다. 이제부터는 이것들을 잘 풀어 한 편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야 한다.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우선 뭘 좀 먹을까. 기숙사 1층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콜라가 마시고 싶었다.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다시 작업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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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직업은 택배기사다. 영화의 시작은 여자의 집에 택배를 배달하러 가는 남자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남자는 초인종을 눌러보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여자에게 전화를 걸자 그녀는 현재 집에 없다고 한다. 그녀는 옆집에 택배를 맡겨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옆집 사람은 그래주기를 거부한다. 별수 없이 남자는 여자의 집 근처에 있는 마트에 여자의 택배를 맡겨 놓는다.


한편 카페에서 일하는 여자는 오늘 지각을 했다. 계산대에 벌금을 채워 넣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한편 사장은 오늘 일이 있다며 그녀에게 마감을 맡기고 먼저 들어가 버렸다. 홀로 영업을 마감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찾아온다. 여자는 이미 영업이 끝났다며 돌아가 줄 것을 요청하지만 남자는 막무가내다. 결국 여자는 남자의 주문을 받는다. 그녀에게서 기어코 카라멜마끼야또 한 잔을 쟁취한 남자는 그녀에게 대신 좀 버려달라며 쓰레기가 담긴 쇼핑백을 내민다. 쓰레기라면 진즉 봉투에 담아 밖에 내놓았다. 여자는 이 모든 상황이 황당하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떠나고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그 쓰레기를 자신의 집까지 가지고 온다.


다음 날, 여자는 옆집에 자신의 택배를 찾으러 간다. 하지만 옆집 사람은 그녀의 택배를 맡아두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택배의 위치를 묻는다. 남자는 근처 마트에 맡겨놨으니 찾으러 가면 될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자 여자는 자신에게 한 마디도 없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도 되는 거냐며 다시 배달해 줄 것을 요구한다. 남자는 황당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결국 마트에서 도로 택배를 찾아와 그녀에게 배달한다. 한편 그녀는 남자에게 어제 자신이 받았던 쇼핑백을 건네며 가는 길에 버려달라고 말한다. 그 순간 화면이 천천히 어두워지며 엔딩. 떠오르는 타이틀, How about you.

 

지난한 작업이 끝났다. 바깥은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는 저장을 누르고 파일을 닫았다. 단순한 습작이 아닌, 진짜 나의 첫 번째 작품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마음을 담아, 나는 부회장 누나에게 완성된 각본을 보냈다.

 


...2편에서 계속.

 

 

[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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