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염소를 모는 여자 [도서]

글 입력 2024.02.29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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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의 「염소를 모는 여자」는 “나, 윤미소.”를 시작으로 “한때” 바랐던 것들을 나열한다. ‘나’를 시작부터 내세우면서 미소는 자신이 한때 바라던 것들을 상상하며 이어지는 서술은 ‘정연’의 말을 빌리자면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미소의 “한때”는 “남편의 꿈”을 말하면서 끝나버린다.

 

“아무것도 진지하게 할 수가 없어서” 새벽까지 비디오를 보는 남편을 “우리”라고 말하는 미소에게서 부부의 신뢰는 보이지 않는다. 남편과 함께인 미소에게 ‘진실’과 ‘꿈’은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박쥐우산을 든 청년을 보며 꿈이란 우산 아래 “작은 숲의 다른 이름”이 아닐지 생각한다.

 

성장소설이 집을 나가면서 시작한다면, 「염소를 모는 여자」는 미소가 마침내 집을 나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윤미소는 “심란한 생”에 자기 이름이 “우화적”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우화적인” 일이 일어난다. 염소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미소는 석 달 전부터 염소 남자에게 온 제안을 거절했지만, 번호를 바꾸지는 않았고 정연과 대화하면서 “염소를 맡기고 싶어 한 것은 그 남자가 아니라 염소 자신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를 만들어 내서라도 염소와 만나게 된 미소는 염소가 “아름답고 위엄 있어 보였다.”고 생각한다. 악마와 비슷한 이미지가 아닌, “새어머니의 영혼”이자 “아내 영혼의 성소”가 된 염소를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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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염소 남자가 미소를 찾아오지 않으면서 염소의 악취는 점점 집안까지 퍼져간다. 결국 염소 노린내와 쉰 오줌 냄새”가 “온 집안에 쏘는 듯” 나버리고 남편과 서로 염증이 나 있다고 느끼는 와중에 염소는 “맹렬하게” 울었다. 마치 미소의 감정을 대신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염소의 악취가 미소에게도 나는 만큼 미소와 염소는 닮아간다. 미소에게 염소는 “내 몸속에 묻혀 있던” 하나의 얼굴이다.

 

 

“조용한 한낮의 아파트에서, 칸칸이 벽만 나누어진 닭장 같은 다른 집들을 바라보면, 그 어떤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돼. 칸칸이 한 명씩 성숙한 여자들이 들어 있고, 남자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밤에 남자가 들어오면 섹스에 응해주고, 남자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고…… 그리고 하나씩 둘씩 아이를 낳고 남자는 처자식 때문에 죽지도 못해하면서 툴툴거리고, 그 닭장 안에서 멀쩡한 여자 하나가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오 년씩 십 년씩 매달리고…… 그리고 어느 날 새벽에 깨어나 보면 발이 뻣뻣하게 굳어 영영 걸어 나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야.”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직접 이름이 나오는 인물은 미소의 대학 친구들(문주, 재경, 미화, 현수)과 미소의 딸(영재)이다. 미소와 딸, 그리고 미소와 같은 처지인 여성들에게 작가는 명확히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미소의 남편은 “남편”으로, 염소를 잠시 맡아달라고 전화하는 남자는 그저 “염소 남자”이다. 자기만의 ‘숲’을 지닌 남자는 “박쥐우산을 든 청년”일 뿐이다.

 

정연의 말처럼 기혼 여성은 “닭장 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남편, 아이, 그리고 “남자의 집”까지 신경 쓰면서 어느덧 미소의 ‘나’는 사라지고 ‘영재 엄마’만 남는다. 미소는 자신의 본질에 입을 맞춘 청년을 통해 “나 자신까지도 남편과 공모해 나를 방치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소는 염소를 돌보면서 계속 ‘집 밖’으로 나간다. 박쥐우산을 든 청년이 “염소는 숲을 가고 싶어 해요.”라고 말한 것도 마치 미소가 ‘숲’으로 가야 한다고 읽히고, 마침내 미소는 염소를 몰고 “이미 오래전에 훼손된 집”을 나온다. 미소와 염소는 집을 나간 뒤 어떻게 되었는가 보다는 현수의 삶을 “벼랑 끝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도 추락의 경지”라고 말했던 미소가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게 된 미소의 변화가 눈에 띈다.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두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훌쩍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뛰어내려 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심연 속에 현실보다, 현실의 현실보다도 더 강한 구름의 다리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숲을 향해 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구름의 다리……"

 


“물론 나도, 한때는 좀 더 찬란한 무엇이 되어 시간보다도 더 빨리 가리라, 꿈꾼 적도 있었다. 날개라도 돋친 것처럼 훨훨 나는 자유로운 존재. 그러나 불운이 겹치고 겹치면 좌절도 깊은 잠처럼 깊어진다. 비행기를 꿈꾸던 깃털은 오래 쓴 빗자루처럼 망가지고 우리의 눈빛도 낡은 오버의 단추처럼 손상된다.”

 

 

소설 초반부터 “꿈”은 “날개”나 “훨훨 나는” 표현으로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게 한다. 미소는 “심연 속에 현실”이나 “현실의 현실”보다도 그 이상의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는 ‘장자’가 두 번 언급된다. 꿈을 다루기 때문일까.

 

그는 “사물은 무궁무진하고 시간은 영원하며 운명은 끝과 시작이 없이 순환된다.”는 문장과 함께 ‘장자’를 언급하면서도 “본질”에 대해서는 인물의 대화를 통해 비튼다. 염소 남자의 말을 빌리자면 “시간은 무한하나, 진정한 시간은 모래 더미 속의 이빨처럼” 찾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염소 남자는 미소가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며 박쥐우산을 든 남자 역시 자기만의 공간인 “숲”을 늘 들고 다닌다. 앰뷸런스에 강제로 들어간 청년이 남긴 우산을 들고 염소를 모는 미소는 “숲으로 난 길”을 걷는다. 이 ‘꿈’ 같은 이야기는 비유와 함께 어우러져 더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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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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