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노예가 아닌 역사의 창조자

음악극 <백인당 태영> 리뷰글
글 입력 2024.02.1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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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노예가 아닌 역사의 창조자”


성수역에서 내려 음식점들이 즐비한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하얀 외벽의 건물이 눈에 띈다. ‘과연 이런 곳에 극장이 있을까’ 생각을 할 만한 장소에 굳건히 자리 잡은 우란2경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낡은 운동화는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극장이 있는 2층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내 키의 두 배 조금 넘는 높이의 유리 통창이 있다. 공연 시작 30분 전, 그곳에서는 붉은 노을이 빌딩 사이로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우란문화재단은 왜 그들의 목소리에 집중했는가. 우란문화재단의 목소리 프로젝트 작품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란문화재단이 ‘목소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왜 이런 좋은 취지의 프로젝트를 이제서야 알게 됐는지 극을 다 보고 나서 후회했다. 이미 지나간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엄청난 세심함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은 듣지 못한 소리이며, 어떤 이에겐 지금을 살아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란2경이 태영 변호사의 목소리를, 그것도 몇몇 이들에게는 가장 시대에 뒤떨어지는 예술 매체라 일컬어지는 무대예술로 올리게 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고 공연을 보고 난 후에는 그 믿음이 더 확실해졌다. 


보이지 않는 수천 개의 선을 끊어내는 일.

 

처음에 태영을 가로막기 위해 그어진 선은 공연 막바지가 되어서야 그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약선으로 변한다. 그는 과거 자신이 이불을 자르기 위해 사용하던 가위로 그 수천 개의 선들을 하나씩 잘라낸다. 이처럼 자칫하면 무심코 스쳐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오브제들은 훗날 태영에게 용기를 주는 조력물로 변모한다. 어쩌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흘려보내 버린, 그러나 역사 속에 꼭 존재해야만 했던 모든 것들을 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을 잘라내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되고 고단한 과정의 연속이다. 태영의 등 뒤로 이어진 선들은 지금까지 그녀가 넘어온 세상의 불평등, 지난날 여성으로서 견뎌온 엉겁의 시간과도 같다. 흰 천은 무대를 몇 번이고 가로지른다. 선의 속성. 길게 뻗은, 그만큼 곧은 마음과 굳은 의지를 지닌 태영의 내면과도 닮아 있는 것이다.


무대 벽면 혹은 오브제에 흰 글씨를 새겨 넣는다. ‘서술자 외 목소리’는 세월의 흐름을 무대 곳곳에 단단히 새긴다. 극을 관람할 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극이 다 끝나고 나니 무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태영의 목소리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태영 변호사의 일대기를 그대로 따라가는 극 전개는 다소 평면적인 서사 흐름이라 볼 수 있으나, ‘이태영’이라는 인물을 보여주기에는 적합하다. 극 중 배우들이 관객에게 ‘이전에 이태영 변호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장면이 존재한다. 그만큼 이태영 변호사가 이룬 업적에 비해 그녀를 알고 있는 현대인들이 적다는 점에서 서사 플롯에 변화를 주기보다 찬찬히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진부하나 안정적인 선택을 납득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극 중간마다 배우들은 제4의 벽을 깨고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심지어 관객에게 목이 아프지 않냐며 어깨 스트레칭도 유도한다!)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꾸준히 해오던 태영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지난 시간을 반추하기 위해서, 호주제가 얼마나 불평등한 법안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등등 그들은 극을 설명해주는 제3자와 극 중 인물을 자유자제로 넘나들며 관객들과 마주한다. 자꾸만 극 안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신으로서 관객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 배우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극의 흐름이 다소 끊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위험 또한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각진 프로시니엄 아치 형태의 프레임을 뚫고 자신들을 지켜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는 행위는 이 작품 안에서 유의미하다. 이전 목소리 프로젝트의 극에서도 이런 형식의 연출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백인당 태영>에서는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태영이 여러 곧은 직선을 잘라내 왔던 것처럼, 비로소 그를 억압하고 가뒀던 각진 사각형을 벗어나는 행위이다.


‘태영 외 목소리’

‘서술자 외 목소리’

‘태영’과 ‘서술자’라는,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을 제외하고 ‘목소리’라는 역까지 부여해 준 것. 섬세한 배려가 돋보이는 구조이다. 


공연은 순간의 예술이기에 흘러가는 그대로 남겨두는 것도 그 자체로 의미가 부여된다. 그러나 훗날 어떤 이가 이태영 변호사와 <백인당 태영>을 물으면 이에 대해 설명해줄 기록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누군가는 후대에도 남을 기록을 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백인당 태영>이 막을 내린 지 몇 개월이 흘렀음에도 이 글을 기고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란문화재단의 ‘목소리 프로젝트’가 기록의 아름다움을 가장 본인들만의 방식으로 잘 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 공연을 기록하고 있다.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극이 끝난 후, 퇴장하면서 무대 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무대 한쪽 벽면에는 ’전통의 노예가 아닌, 역사의 창조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연장을 빠져나가며 이 문장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 이 문장이 기둥 역할을 해줄 것만 같았다. 가끔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내가 이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임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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