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다이어리 입주민을 맞이하는 자세

글 입력 2024.02.0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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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사소한 일정은 제때 챙기고 싶어.”

 

작년 말, 룸메이트 언니와 함께한 연말 결산에서 고민하다 꺼낸 말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모 과목 중간고사 시험 당일날에 처음으로 시험 전 범위를 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기말고사와 팀 프로젝트가 있어 아주 망하지는 않았지만, 중간고사만 생각하면 아찔하다. 마감일만 기억하는 이상한 기억력. 아무래도 내게 ‘중요함’의 기준은 ‘시급한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많이 쓰고 싶은’ 일이었던 것 같다.

 

2023-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학적과에서 학사경고가 예상되니 학점 관리에 신경쓰라는 문자를 받았다. 중간고사 성적 평점 평균이 2.0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인 Q는 나더러 “너는 천생 작가다. 소재를 이렇게 만들어서 온다”고 말했는데, 이 글에 쓰일 줄은 나도 몰랐다. 부모님은 그냥 건강하게만 지내라고 하셨고, 이 온기 가득한 걱정 덕분에 인생에 다시 없을 학사경고를 넉넉하게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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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월 5일에 다이어리를 하나 샀다. 항상 디지털 캘린더를 썼지만, 저번 학기는 같은 날에 여러 일정이 겹치는 날이 많았다. 일정 여러 개가 캘린더 한 칸에 쌓이면, 맨 아래 일정은 자꾸 까먹게 되어 곤란한 상황이 종종 생겼기에 아날로그 다이어리가 필요했다. 사실 그날은 조용한 카페에서 밀크티를 홀짝거리며 책을 읽다가 서울시향 신년음악회를 보러 갈 예정이었지만, 다이어리 생각이 난 김에 다이어리를 사기로 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문구류에 통달한 지인 Q에게 연락을 넣었다. 어떤 다이어리를 사면 좋냐고. Q는 로이텀과 미도리 다이어리 중 하나를 고르라고 권했다. 생각해 보니 내게 커다란 네모나 두꺼운 벽돌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일정과 한 주간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의 키워드만 적을 수 있으면 충분했다. 학사경고 문자만 받지 않으면 돼. 아니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서 아주 약간의 효율성을 일상에 추가했으면 좋겠어. 변명을 해보자면, 원래 이렇게 덜렁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철두철미하게 삶을 꾸리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흐물거리는 사람이 됐다. 모든 일에 힘을 줄 필요는 없지만 중요한 일을 놓아버리면 안 되지. 이 사람아.

 

미도리, 단출하고 담백한 나무들. 미도리 다이어리가 왜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 더 단단한 커버를 가진 로이텀 다이어리를 택했다. 종이 커버는 쉽게 찢길 것 같아서였다. 내 물건이 상하는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다이어리 커버를 씌우면 될 일이지만,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을 부리고 싶단 말이지. 공연을 보러 가기 직전의 들뜬 마음보다도 더 침착하고 차분한 블루, 한 손에 들어오는 작고 견고한 파란 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확실히 로이텀 사의 작은 노트는 내 간결한 목적과 잘 들어맞았다. 단단한 커버 아래서 취급 주의 마음과 일정은 오래도록 상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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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해가 한 달이 겨우 지났다. 1월부터 나름대로 재미난 일들을 적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졸업 요건, 수강 신청, 인터뷰 일정, 마감일 같은 중요한 요건과 곧 있을 Zmi의 내한 공연, 그리고 이미 지난 기숙사 퇴사일과 류이치 사카모토를 담은 영화까지. 오래도록 못 본 친구들 여럿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사실 제일 중요한 사항은 따로 있지만 굳이 말하지 않기로 한다. 가끔은 말하지 않아야 괜찮은 일도 있기 마련이라, 신비스러운 사람인 척하기로 했다. 1월의 사소한 일상 이야기까지 다 적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거다.

 

맞다. 항상 바쁘지는 않으니 일정 없는 빈칸에 붙일 마스킹테이프 다섯 개도 들였다. 왼쪽은 일주일의 흐름을, 오른쪽은 남기고 싶은 생각을 짧게 적을 수 있어 많은 짐을 들여오지는 못해도 화지 위에 인쇄된 그림에 즐거워할 수 있으니 나름대로 괜찮은 소비다. 한 톤 밝아지는 옷차림과 나른한 잠, 화창한 날의 프릴 레이스와 비둘기가 평화롭다. 그러니 파란색 다이어리와 꼭 어울리는 서늘하고, 온순한 색감의 마스킹 테이프들을 다음 계절에도 다시금 꺼내 쓰면 참 좋겠다.

  

일정을 간략히 쓰려고 샀던 다이어리는 어느새 일상의 사소한 기록과 아기자기한 마스킹테이프로 복작거리고 있었다. 이번 1년은 성격도, 취향도 다른 입주민의 일상을 담은 힐링 드라마가 될지, 아니면 막장 드라마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신선한 전개를 보여주는 드라마 한 편을 바란다. 곧 입춘(立春)이니 봄마다 듣는 곡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마치겠다. 숀 마틴(Shaun Martin)의 “Yellow Jacket”인데, 때아닌 오렌지나무가 생각나 종종 듣곤 한다. 이제 각자의 싱그러운 생명들의 계절을 맞이하러 가보자.

 

 

[이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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