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컴퓨터 너머의 세상을 그리다 - 미구엘 슈발리에, 디지털 뷰티 시즌2

디지털 예술이 과연 몰입을 가져올 수 있는가
글 입력 2023.08.2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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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8월 중순, 오랜만에 전시장을 향해 발길을 내딛었다. 티켓 발권을 한 후 입구 벽면에 기재된 몇 가지 주의사항을 꼼꼼히 확인해달라는 스텝 분의 안내, 그 중에서도 전시장이 어두우니 유의하여 이동해달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어두우면 얼마나 어둡길래 그러나 하고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바깥 과는 완전히 차단된 듯한 온통 시꺼먼 디지털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이정도의 어둠 속에서 진행되는 전시도 처음이거니와 눈 앞에 일렁이는 광선들이 굉장히 낯설다. 항시 외부의 소음에서 차단되어 작품에 몰입하길 원하던 나로서는 노이즈캔슬링 이어폰과 전시장의 분위기에 맞는 플레이리스트는 필수품이었으나, 아무리 재생목록에 넣어둔 플레이리스트를 뒤져보아도 마땅한 것이 없다. 결국 포기하고 이어폰을 집어넣는 순간, 작품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공간을 매우고 있는 클로드 미켈리의 사운드를 만나볼 수 있다.


 

 

디지털 세상을 가시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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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해주는 작품은 <그물망 복합체>다. 제목에 걸맞게 다채로운 색체를 띠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물망은 컴퓨터 네트워킹 구조를 연상시킨다. 이제는 오래전이 되어버린 중고등학교 정보 시간 교과서에서 2D로나 보았던 네트워크 망은 3D 실체를 가지고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문득 사진을 찍으러 핸드폰을 꺼냈다가 이 핸드폰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정보 교환이 네트워크 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을지 생각해본다. 우리는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쉽게 인식 가능한 디스플레이에만 익숙해져 있지만 전자기기 저 너머 네트워크 세상에서는 <그물망 복합체>속 광선들의 움직임처럼 수많은 디지털 정보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고, 그의 작품을 통해 잠시나마 그들의 가시화된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광경은 관객이 작품 앞에서 움직이는 순간 일어난다. 그동안 작품 앞에 목석처럼 서서 감상하기 바빴던 나로서는 이 비밀을 알아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감상을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그에 동하듯 빠르게 흩어지는 내 주위의 광선들, 그리고 뒤늦게 캡션의 글귀를 확인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이 작품의 묘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작품 앞에서 최대한 뛰어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아챘다.


광선들은 스스로도 어떠한 일정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규칙적인 흐름에 단 하나의 변수가 되는 것이 바로 관람객이었다. 관람객은 작품 안에 직접 뛰어 들어 독자적인 흐름을 만들 수 있고, 혹은 그 흐름을 방해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나의 움직임에 따라 흩어지고 모이고 일렁이는 광선들의 형상을 눈으로 쫓다 보면 관람객은 어느새 작품에 녹아 들어 상호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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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망 복합체>를 뒤로 하고 다음 공간으로 넘어가면 로봇이 네온 펠트 펜을 사용하여 그린 일련의 드로잉을 만나볼 수 있다. 앞서 보았던 작품이 끊임 없이 움직이며 무한한 네트워크 세상을 보여주었다면, 이 드로잉들은 네트워크망들의 움직임을 일시정지하여 팔레트에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다. 제각각 규칙을 가지고 이리저리 뻗은 선들의 정제된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로봇의 작품임에도 일종의 미학을 느껴볼 수 있다.


 


디지털로 시작해 디지털로 완성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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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엘 슈발리에의 작품들이 유독 독특한 데에는 그가 디지털 예술의 선구자로서 오로지 컴퓨터에 집중한 작품활동을 펼쳐왔다는 지점에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특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인간만의 창작 활동이라 여겨왔던 예술작품 제작을 다섯 개의 팔을 가진 드로잉 로봇이 해내는 모습을 보면 온전히 디지털로 시작해 디지털로 마무리되는 예술이 가능한 세상이 도래했음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 드로잉 로봇이 단순히 고정적으로 입력된 데이터 값에 의해 움직이는 한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재조합되는 데이터 뱅크에서 최적의 구성을 뽑아내 무한한 변형이 가능한 작품을 창조한다. 벽면에 걸린 드로잉 로봇의 작품만 봐도 이 예술가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체감할 수 있다. 다양한 색체와 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언뜻 비슷해 보이면서도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해당 작품 <스트레인지 어트랙터>가 존재하는 전시장에서는 해당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로봇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는데, 이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 또한 하나의 관전 포인트이자 미학적 요소로 작용한다. 마치 안무를 보는 것처럼, 각을 맞춰 움직이고 원을 그리는가 하면 멈춰 섰다가 군무를 선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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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층에서 이어지는 또 다른 전시 공간에서 로봇이 인물을 드로잉을 통해 초상화를 제작하는 <휴먼 스터디>를 만나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로봇 예술의 정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만의 예술이라 여겼던 미술 창작의 영역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로봇이라니, 이 얼마나 생경한 광경이란 말인가.


오래된 학교 책걸상에 설치된 로봇팔은 연필을 잡고 정말 예술가가 된 듯 몰입하여 모델을 그려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델이 되는 인간은 부동 자세로 로봇이 내는 즉흥적인 사운드 트랙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는 역할을 하게 된다. 수동적인 역할의 인간, 그를 모델 삼아 로봇이 그려낸 독창적이면서도 심오한 의미가 담긴 듯한 추상적인 드로잉들을 살펴보다 보면 이질감이 들 수도, 경외심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수직 공간을 활용한 흥미로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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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 인상 깊었던 지점 중 한 가지는 전시 공간을 독창적으로 활용하여 전시의 특성을 잘 살렸다는 점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두 점 있는데, 첫번째는 전시의 초입에 위치한 <라이좀>이다. 이 작품은 천장에 매달려 지하 1층까지 펼쳐지는 조각 설치작품인데, 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지층에서는 일부만 보이지만 전시 구성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서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광선을 품은 강철 막대들은 각기 미로처럼 얽히고 섥혀 그물망을 만들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그물망 네트워크> 작품 속 네트워크 구조와 닮아 있다. 미디어 아트로의 구현 뿐 아니라 전시장 공간 내 네트워크 망을 직접 설치 하면서 미구엘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무한대로 확장하는 디지털 세상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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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좀>이 보이지 않는 지하까지 내려오면, 그곳에는 지하에 뿌리를 두고 설치되어 지층까지 뻗은 <매직 카페트>작품이 있다. 이는 빛으로 이루어진 대형 카페트로 바닥과 벽면에 투사되어 있는데, 끊임 없이 변화하는 기하학적인 패턴과 다채로운 색감의 디지털 모티브를 품고 있다. 미구엘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또한 관람객의 이동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진실로 마법의 카페트가 아닐 수 없다. 카페트에 발을 들이면, 나의 움직임에 따라 바닥의 타일이 벌어지는 듯한 착시가 일어나기도 하며, 벽면의 기하학 패턴들은 네트워크 오류에서 볼 법한 픽셀의 불균형을 구현한다. 매직 카페트를 통해 관람객은 이번 전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디지털 예술만이 가능한 몰입’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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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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