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집의 피부를 뜯어낼 수 있다면: 전시 '란사로테' [미술/전시]

리만머핀 서울 하이디 부허 개인전 《란사로테》 관람 후기
글 입력 2023.08.0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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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한다. 그날 있었던 일과 느꼈던 감정을 글로 써 내려가거나 결정적인 한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그리는가 하면, 주물로 주형의 형상을 그대로 복제할 수도 있다.

 

스위스 작가 하이디 부허는 독특한 기록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건축 구조물과 그 구조물이 형성한 공간을 기록하기 위해 라텍스를 이용한 ‘스키닝(skinning)’ 작업을 고안해냈다.

 

7월 6일부터 8월 19일까지 리만머핀 서울에서 진행되는 하이디 부허 개인전 《란사로테》는 부허의 스키닝 작업을 선보인다.

 

전시명 “란사로테”는 그가 생애 마지막 10년(1983-1993)을 보낸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작은 섬이며 전시는 이곳에서 제작된 후기 작업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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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닝 작업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주물을 뜰 구조면에 거즈 천을 덮고 액체형의 라텍스를 바른다. 라텍스를 건조한 뒤 응고된 라텍스를 구조물에서 뜯어낸다. 이를 통해 구조물을 본뜬 작업물을 얻게 된다.

 

‘스키닝’이라는 명칭과 그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작업 과정은 어떤 생물의 피부를 벗겨내는 것과 같으며, 결과물 역시 피부나 가죽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여기서 건축물, 혹은 공간에 대한 작가의 흥미로운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부허는 건축의 물리적인 결합과 인체의 유기적 구성에 대한 비교를 탐구해왔다. 둘의 추상적인 관계는 그의 작업의 결과물인 건조된 라텍스 조각으로서 현현한다.

   

이는 집이나 구조물을 기록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리는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려 대상의 순간을 포착하고 종이와 같은 매체 위에 고정해 놓음으로써 과거의 장면을 그대로 유지한다.

 

하지만 부허의 작업은 생물의 피부와 같은 물질을 생산해내며, 건축물의 표면에 생명을 부여한다. 피부가 점차 노화하듯, 라텍스도 암갈색으로 색이 변화하며 점차 굳어지고 늘어진다. 피부가 연약한 내부 장기를 보호하는 방어막이라면 라텍스로 뜯어낸 ‘집의 피부(Hauträume)’는 그곳에 거주하는 우리를 보호하는 울타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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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Puerta beige grande(큰 베이지색 문)〉, 1987

(우) 〈Puerta marron verde(녹갈색 문)〉, 1986

 

 

우리의 피부와 집의 피부는 물리적인 유사성에 국한하지 않는다. 우리의 피부에 드러나는 흉터, 주름, 굳은살이 삶과 역사가 축적된 것임을 알려주듯이, 라텍스 조각 역시 건축물이 쌓아온 역사를 보여준다.

 

개인 혹은 한 가정이 영위하는 공간으로서 집은 그들의 작은 역사와 문화가 녹아든 장소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건축물의 표면에 기록이 남는다.

 

부허에게 있어 란사로테의 집 ‘팔라시오 이코(Palacio Ico)’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자 여생을 살아가는 거주처였다. 그가 생활하며 느낀 일상 속 시시콜콜한 감정부터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의 순간까지 집은 함께 했고 기억한다.

 

그리고 이러한 집의 기억을 긴 동면에서 깨워주듯이 스키닝 작업을 통해 피부라는 매개로 구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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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erta marron verde(녹갈색 문)〉의 일부

 

 

이러한 점에서 부허의 작업은 회화나 사진 같은 어떤 기록보다 지표성이 강한 듯 하다.

 

<무제(팔라시오 이코의 문)>(1986)에서 보이는 녹청색의 반점들은 녹슨 잔해와 페인트가 라텍스에 달라붙어 남아있는 것으로 실제 문과 부허의 작품의 인접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집의 피부라는 점에서 물리적으로나, 의미적으로나 실제 집을 떼어내 전시 공간에 배치한 셈이다.

 

위와 같은 특성으로 인해 부허의 스키닝 작업을 마주하면 모호한 느낌이 든다. 문이라는 비생물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도, 그 표면에서 마치 생물의 피부와 유사한 감각이 다가온다. 조금은 섬뜩하면서 따뜻하고 낯설면서 육체적인 그의 작업은 공간에 대한 기록으로서 새로운 방향성은 제시한다.

 

 

참고자료: 리만머핀, 《란사로테》 보도자료

 

 
 
[정충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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