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그 안팎의 세계 -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글 입력 2023.07.2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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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23 베르나르다알바_현판.jpg

 

 

결핍 혹은 금지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갈망의 대상이 달라진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해 온 사회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누가 무엇을 억압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그것의 반작용처럼 무언가를 원하고 꿈꿨다. 그런데 만약 혹자가 속한 곳 안팎의 모든 세계가 그를 억압하려 든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꿈꿔야 할까. 어쩌면 억압의 정도에 따라 ‘갈망할 수 있는’ 자유의 종류조차 다르게 정해지는 게 아닐까? 감히 갈망할 수 있는 영역 자체가 지나치게 좁은 것이다. 올해 삼연을 맞아 국립정동극장에서 새로이 막을 올린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바로 그 점에 천착하게 해주었다.

 

 

2018년 국내 초연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20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시인 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1930년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남편을 잃고 가장이 된 베르나르다 알바와 그의 다섯 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극도로 절제된 삶을 강요하는 여성 가장 베르나르다 알바와 그의 딸들이 가지는 욕망을 열정의 플라멩코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극은 배우들이 한번에 무대로 나와 일렬로 놓인 의자 중 자기 것에 앉아, 그 앞에 놓인 자기 몫의 구두를 신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물들의 이름과 관계를 설명하는 강렬한 프롤로그는 플라멩코 춤과 함께한다. 베르나르다 알바와 그녀의 다섯 딸들, 그녀의 노모,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남편 이야기가 소개된다. 

 

집안에서 유일한 남성이었던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가 죽은 후, 치매에 걸린 노모 마리아 호세파와 다섯 딸, 하녀장 폰시아, 그리고 두 하녀를 포함한 베르나르다 알바 가(家)의 식솔은 모두 여성이다. 집안의 재산과 통솔권을 거머쥐게 된 베르나르다는 곧바로 딸들에게 전통에 따라 안토니오의 8년상을 그대로 치를 것임을 선포한다. 딸들에게 집의 대문은 물론이고 모든 창문에 창살을 친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너희들이 할 일이라곤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며 혼숫감에 수를 놓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삼년상도 길다고 생각했는데 이 지구상에 8년상을 치루던 곳도 있었다니.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귀를 의심했다. 그뿐이 아니다. 악기 연주가 아니라 배우들이 구두 신은 발을 굴리는 소리, 정박과 엇박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손뼉 치는 소리, 손으로 가슴 치는 소리 등으로 현장에서 공연 음향을 만들어낸 점이 독특했다. 눈에 익지 않은 플라멩코의 춤사위, 그리고 배우들이 뮤지컬 넘버를 부를 때 들어가는 낯선 스페인식 추임새까지. 시대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먼 배경을 다룬 뮤지컬이라 그런지 낯선 면이 많았다.

 

 

2023 베르나르다 알바 보도용 (1).jpg

 

 

그럼에도 이 극에 곧 몰입할 수 있었던 까닭은 폭압적인 가부장제의 역사가 거의 모든 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진행되는 안토니오의 장례식 장면 외에 다른 장면은 모두 베르나르다의 집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관객들은 베르나르다 알바와 폰시아의 대화, 그리고 자매들의 대화와 화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통해 베르나르다의 집 안팎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상을 알 수 있다. 마을 남자들이 한 여자의 남편을 묶어두고 그녀를 집단 성폭행했다는 이야기에 베르나르다와 폰시아가 보이는 반응은 피해자가 된 여자에 대한 비웃음이다. 약자를 향한 범죄에 분노하기보다 손쉽게 약자를 탓하고 비웃는 것. 낯선 배경의 이야기지만, 근본적으로는 낯설지 않다.

 

베르나르다와 폰시아가 자신들은 그런 일을 절대 당할 리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베르나르다는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가 자신과 첫 번째 남편 사이의 딸 앙구스티아스는 물론 집안 하녀에게도 ‘손을 댄’ 것을 알고 있으나 함구한다. 조금 놀라운 점은 베르나르다가 친딸 앙구스티아스는 몰라도 굳이 그 하녀를 내쫓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녀들을 관리하는 폰시아는 안토니오에게 피해 입은 하녀가 안토니오의 죽음을 두고 그놈은 저주 받은 것이고 잘 죽은 것이라 얘기할 때 그녀에게 꾸지람은커녕 눈치도 주지 않는다. 자신과 가까운 관계의 여자들에게도, 심지어 거주하고 일하는 집 내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베르나르다와 폰시아는 익히 잘 알고 있다. 단지 없는 일인 척 행동할 뿐. 

 

권력 없는 자가 권력을 가진 쪽과 같은 편에 서서 같은 욕을 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강자의 이득 위주로 설계되고 행해진 교육과 규범이 깔려 있다. 자신은 그 사회의 지배층에 속하지 않아도 강자 위주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이런 권력 관계를 알고, 같은 비난과 멸시를 택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강자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후자는 의도적인 굴종의 전시인 셈이다. 무엇이 되든 씁쓸해지기는 마찬가지다.


베르나르다는 딸들에게 혼자 있을 때 울고, 우는 모습을 남편에게 들키지 말라고 경고한다. 베르나르다에게는 약자가 갖고 있거나 갖게 될 수 있는 피해자성이 공동체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실컷 물어뜯어도 아무 탈 없는 대상으로 ‘전락’ ‘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베르나르다의 공포는 거기에 있다. 

 

베르나르다가 혼자 몸을 씻을 때 깔리는 넘버에는 ‘올리브 따다 일을 당’한 무어인 소녀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몸을 씻은 후 겉옷을 갑옷처럼 엄숙하게 입으며 베르나르다가 직접 부르는 노래에는 ‘여자의 숙명’이 언급된다. 까딱하면 부정함의 화신으로 낙인 찍히고 신체적으로도, 추상적으로도 공동체에서 지워지는 여성들의 비명. 자기 지척에서 만큼은 그 비명 들릴 일이 없기를 원하는 베르나르다는 가장의 권력을 갖게 된 후 과연 어떤 행보를 보였는가. 

 

그녀의 대사 중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발정이 난 숫말이 마굿간 벽을 사정없이 걷어차 굉음이 나자 하는 말이다. 이러다 집 다 무너지겠어! 숫말은 밖에 풀어두고 암말은 매어두랬잖아! 

 

그녀의 방식은 집안 여자들에게 군림하는 가장이 되는 것. 자신이 가부장제의 가장 그 자체가 되는 것. 베르나르다의 집안은 그녀의 소관이어도, 그 ‘안’은 여전히 안달루시아의 마을이라는 사회, 그러니까 커다란 ‘바깥’ 속에 있으므로. 바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이유로는, 그녀도 다른 방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 있다. 딸들이 자유로운 새들처럼 바깥 세상에 나간다면 돌을 던져 맞혀서라도 다시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올 것이라는 베르나르다. 그녀는 폭풍전야 같은 무거운 공기의 침묵 속에서 그것을 자신이 일궈낸 고요한 평화라며 자부하고 안도한다.

 

 

"난 이 평화와 고요를 즐기고 싶어. 오늘도 무사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내 보호 안에서만 모두가 편하게 숨 쉴 수 있지."

 

 

하지만 실상은 '모두 편하게 숨' 쉬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조그만 틈으로도 제방은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틈의 시작은 굳게 잠긴 문이 아니라 딸들의 방에 난 작은 창이었다. 창을 통해 젊고 잘생긴 남자, 뻬뻬 로마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붕괴의 징후는 마우리띠오가 장녀 앙구스티아스의 방에서 뻬뻬의 사진을 훔친 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뻬뻬는 나이 많은 앙구스티아스에게 구혼한 마을 청년이다. 동생이 언니의 약혼자 사진을 훔친 사건을 두고 베르나르다는 마우리띠오의 변명대로 그저 장난이라고 일축한다. 뿐만 아니라 베르나르다는 언니의 약혼자와 정분이 나는 중인 막내딸 아델라, 그리고 자기 약혼자의 마음이 다른 데에 가 있음을 직감하며 불안해하는 앙구스티아스 모두 모른 척한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에서 뻬뻬의 존재는 어떻게 보면 도구적이다. 뻬뻬는 자매들의 갈망을 표면화하는 일종의 촉매제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이지적이지만 사실은 기약 없는 결혼이나 어머니에 대한 순종 모두에 체념한 막달레나, 자신의 상황에 큰 불만을 느끼지 않는 순하디 순한 아멜리아를 제외한 세 자매들은 모두 뻬뻬의 존재에 반응한다. 

 

결혼하기도 전에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뻬뻬는 앙구스티아스에게는 반쯤 썩은 동앗줄이지만 그마저도 없어서 못 놓는 동앗줄이다. 유산을 많이 물려 받은 언니에게 구혼하는 동시에 가장 어리고 예쁜 막내 동생을 유혹하는 뻬뻬는 아델라에게도 결코 좋은 연인감은 아니다. 아무리 옛날에 사랑과 결혼을 따로 놓았다고 해도 경제적 필요와 정염을 한 집안에서 다 해결하려는 그는 얼마나 후안무치한가. 그러나 가장 어리고 적극적인 아델라, 자신은 언니와 다르게 살 거라고 생각하는 저항적인 아델라는 뻬뻬를 사랑하며 그와의 미래를 꿈꾼다.  

 

외모 때문에 남자들에게 멸시 받는 마우리띠오는 남자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하지만, 이성에게 사랑 받고 싶은 마음까지는 죽이지 못한다. 마을로 일하러 온 남자들을 창밖으로 훔쳐보다 춤과 노래가 이어지는 장면에서, 마우리띠오는 짧지만 격정적인 플라멩코 독무를 선보인다. 남자에 대한 관심을 부정하던 마우리띠오가 자기 안의 성애적인 열정을 보고 마는 순간이었다. 

 

앙구스티아스에게 뻬뻬는 자신을 억압하는 어머니로부터 드디어 도피할 수 있는 결혼에의 창구이고, 자기 안의 욕망을 본 마우리띠오라는 여성에게 뻬뻬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남성성 그 자체이다. 결혼 상대 정하기는 오로지 부모의 권리였던 시대에, 자기가 사랑할 상대를 택해 애정을 키운 아델라에게 뻬뻬는 자기 삶의 자유를 더욱 더 갈구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2023 베르나르다 알바 보도용 (4).jpg

 

 

자매들의 감정과 욕망이 수면 아래 불안하게 꿈틀대는 가운데, 또 한 번 집 밖의, 마을의 소식이 한 여자의 비명으로 들려온다. 미혼으로 아기를 낳고 그 아기를 죽인 여자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 아비를 찾아내 같이 단죄할 생각은 없고 여자만 끌어내 짐승처럼 두들겨 팬다. 그때 나오는 넘버의 가사가 너무 섬뜩했다. ‘얼굴까지 불태워’ 그 죄를 없애라는 가사. 그건 결국 마을 사람들의 대사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그녀가 저지른 영아살해의 죄는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 겠지만 얼굴까지 불태우고 싶어하는 폭력이라니. 이렇게까지 한 존재를 증오할 수가 있을까 싶어 다시 한 번 섬뜩하고 무서웠다. 굳게 잠긴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대문 밖에 펼쳐지는 세계란 이런 것이다. 부정함이 드러나거나 보호막 약한 여자들에게 갖은 폭력과 증오가 난무하던 시절.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들던 아델라는 그 소식을 듣고 극심한 두려움에 몸서리치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날 밤 아델라는 몰래 집 밖으로 나가 뻬뻬와 관계를 가진다. 분명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인데, 아델라가 이때 부르는 넘버의 가사는 만족스럽고 달콤하기보다는 불안함이 두드러지는 것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녀가 가장 원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당연히 사랑도 할 수 있는 자유였을까? 

 

집으로 돌아온 아델라는 평소 질투에 사로잡혀 자신을 감시하던 마우리띠오에게 들키고 만다. 마우리띠오는 소리를 지른다. 엄마! 삽시간에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깨어 아델라의 ‘부정’을 목격한다. 자신을 때리려는 엄마의 손을 막은 아델라가 소리친다. 당신 뜻대로 살지 않을 거야!

 

베르나르다가 총을 들고 아직 집 근처에 있다는 뻬뻬를 찾아나선다. 총 소리가 나고, 비틀대며 돌아온 마우리띠오가 말한다. 뻬뻬가 죽었다고. 돌아와 부정하지 않는 베르나르다를 보며 아델라는 말이 되지 못하는 절규를 내뱉는다. 남편감을 잃었다는 생각에 앙구스티아스는 실의에 빠지고, 다른 자매들도 차마 처절하게 절규하는 아델라의 곁에 다가가지 못한다. 통제 하의 고요를 바라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안에서’ 벌써 두 번 그 침묵이 깨진 셈이다. 

 

사실은, 놀랍게도 뻬뻬는 죽지 않았다. 총알은 빗나갔고, 뻬뻬는 도망갔다. 애초에 생존을 중시하는 베르나르다가 집안 좋은 마을 청년을 살해할 생각이 정말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알려졌으나 이번에는 아델라가 보이지 않는다. 자기 방으로 갔지, 라는 할머니 마리아 호세파의 말에 집안 여자 모두가 직감 같은 불안에 휩싸여 아델라의 방문을 두들긴다. 아델라, 아델라, 아델라! 

 

규범에 맞게 ‘올바르고 현숙하게’ 사는 여자들은 자기 본래의 이름을 잃어가고 그것이 미덕이었던 과거의 사회. 그 사회 안에 있으며 바깥의 힘의 논리를 그대로 들여온 한 여자 가장의 집. 그 안에서 모두가 아델라의 이름을 급박하게 외친다. 

 

문이 열리고 일순 정적이 흐른다. 무대 위에서 계속 대문이었던 문이 아델라의 방문이 되고, 여자들이 몸을 돌린다. 방 안을 보기 위해서다. 모두가 몸을 돌리면, 허공에는 아델라 몫의 의자가 쿵, 하고 떨어져 허공에 매달린 채 멈춘다. 절망한 아델라의 위치에 대신 걸린 그녀의 의자. 집안은 곧 자매들의 비명으로 가득찬다.

 

다른 자매들보다 늦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앙구스티아스의 입을 틀어막는 손은 다름 아닌 베르나르다의 손이다. 이 비명은 집 밖으로, 마을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유를 원했던 막내딸 아델라는 처녀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다는 슬픔과 충격에 잠시 흔들렸던 목소리를 다시금 흔들림 없는 권위적인 가장의 목소리로 꾸며내며 다음과 같이 읊는다. 아델라를 침대에 뉘이고 처녀처럼 꾸며라. 그 애는 침대에서 죽었다. 처녀로 죽은 내 딸. 마지막 넘버를 끝으로 조명이 꺼졌고,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도 끝이 났다. 

 

 

2023 베르나르다 알바 보도용 (3).jpg

 

 

극이 끝나고 나서 한 편의 공포영화를 본듯 목 뒤가 서늘했다. 사실 공포가 맞다. 이미 극중에서 시대가 바뀌었다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극중의 시대가, 자매들 세대가 살아가는 시대가 베르나르다 알바나 폰시아의 세대, 마리아 호세파의 시대보다는 나아졌다는 뜻이다. 그러니 무섭지 않은가. 세상의 반이 저 삶을 더 나은 삶이라 여기며 살아갔다는 함의가, 갈망할 수 있는 자유의 종류와 영역 자체가 너무나 작았던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사실이. 

 

오싹하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객석에서 나와 포토존을 보니 무대 위에 있던 것과 같은 빈 의자가 놓여 있었다. 공연을 보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무서워서 앉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앉는 순간 의자가 의미하는 자리에 속박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베르나르다 알바 포토존 크기조정.jpg

 

 

돌아가는 길에는 남은 자매들의 앞날에 대해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아에 대해 고민할 여력도 없는 상황 아래서, 자매들의 갈망은 결혼, 남성, 자유로운 사랑에의 갈망으로 나타났다. 앙구스티아스의 혼담은 깨질 수도, 계속 유효할 수도 있다. 뻬뻬와 혼인한다면, 혹은 하지 않는다면 앙구스티아스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마우리띠오는 죽은 아델라를 보며 그래도 잠시라도 뻬뻬를 가졌으니 행복할 거라 말하기도 한다. 그 열등감과 결국은 찾아 올 죄책감은 앞으로 그녀의 삶에 어떻게 작용할까? 

 

수많은 의문들이 여러 가능성을 점치게 하며 지나가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가부장제의 권위로 무장한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무너질 것이다. 극중에서 마굿간에 매어두었던 암말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폰시아의 대사가 보여주듯이. 베르나르다 알바가 한사코 매어두려고 했던 딸들을 암시하던 그 암말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쩌면 자매 중의 일부는 베르나르다의 억압을 이어갈 수도 있고, 미친 후에야 행복을 노래하는 마리아 호세파처럼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아델라의 짧은 삶을 목격하고도 자유를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집 안의 속박을 벗어나 맞이할 집밖의 세상은 어떠한가. 그곳은 툭하면 그녀들을 낙인 찍고 위협을 가하기 일쑤인 곳이다. 안으로는 숨 막히는 억압이, 밖으로는 더욱 날것의, 다수가 가할 수 있는 폭력이.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자기 몫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이들의 갈망, 그리고 그들의 생은 어디로 향할까. 1930년대 초, 스페인 남부 지방, 안달루시아의 한 마을. 그리고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시작부터 제한되고 박탈당한 삶들이 두렵고 서럽다.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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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이재혁
    •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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