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창과 발화 사이에 존재하는 여성의 언어 -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공연]

글 입력 2023.07.2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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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다 알바〉는 스페인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이다. 1930년대 초를 배경으로,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가 죽고 가장이 된 베르나르다 알바와 다섯 딸들이 8년 상을 치르며 억압되는 동안 벌어지는 파국의 일을 다룬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삼연을 올린다’라는 문장이 갖는 함의



2018년 초연 당시, 티켓 오픈 2분 만에 전석 매진이라는 신화를 기록한 여성극 〈베르나르다 알바〉는 2019년 제3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소극장 뮤지컬상·여우주연상·여자신인상·음악상 총 4관왕을 차지했다. 정영주 배우는 〈베르나르다 알바〉로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뮤지컬 〈레드북〉과 함께 최다 수상작으로 뽑혔다. 당시 남성 위주 극이 대부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관객들이 여성들에 대한 극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돼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매진 신화에도 재연을 위하여 〈베르나르다 알바〉를 제작할 제작사를 찾는 일은 난관이었다. 그래서 베르나르다 알바 역을 맡아 연기한 정영주 배우가 제작자로 나섰다. 

 

“여배우 10명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여배우 10명이 나오는 공연을 올리는 게 어렵죠.”라며 프로듀서 데뷔의 소감을 밝힌 정영주 배우는 극본을 보고 떠오르는 배우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황석정, 김환희, 김국희, 전성민, 정인지, 오소연, 이영미 배우 등 뮤지컬계를 대표하는 초연 캐스팅 라인업을 성공케 했다. 이에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팬데믹 상황인 2021년에 재연을 올렸으나, 그럼에도 전회차 매진 신화는 이어졌고 서울에 이어 부산 공연까지 올릴 수 있었다. 

 

재연에서는 티켓을 매진시킨 초연의 라인업에 더불어 대학로에서 이름을 들으면 모두 알만한 실력 있는 배우들로 꾸려진 더블캐스팅으로 극에 다양성을 더한 것은 물론, 우란2경에서 정동극장으로 무대 공간을 옮겨 초연보다 더 넓은 공간감으로 〈베르나르다 알바〉를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초연의 매진 신화에도 여성극이라는 이유로 제작이 꺼려지던 극을 여성 배우가 직접 제작하여 올려 만들어 여성 관객들에게 화제가 된 진정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의’ 극이다. 신화를 기록하며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니던 이 극이, 기대를 안고 작년부터 기다리며 오디션 공고까지 확인하던 나의 ‘최애’극이 돌아왔다. 2023년, 서울 정동극장이다.


초·재연에 참여한 정영주, 강애심 배우는 같은 역인 베르나르다 알바와 마리아 호세파로, 한지연 배우는 폰시아에서 베르나르다로 역할을 바꾸어 참여하고, 나머지 배역들은 모두 새로운 얼굴로 채웠다. 전 배역 더블캐스팅으로 돌아온 삼연의 〈베르나르다 알바〉는 다양한 연령대의 배우들을 모았으며, 심지어 〈베르나르다 알바〉가 입봉작인 신인 배우들도 있다. 앞으로 〈베르나르다 알바〉가 능력 있는 여성 신인 배우의 등용문으로 남아, 사연, 오연을 걸쳐 10주년을 맞이하기를, 10주년을 맞이하여 초·재연 배우들이 다시 찾아오는 스페셜 캐스팅을 내주기를 그저 기다리고 있다.

 

(재연 때는 초연의 캐스팅 라인업을 보며 놀라고, 삼연 때는 재연의 캐스팅 라인업을 보며 놀라는 것처럼, 사연 때는 삼연의 캐스팅 라인업을 보고 ‘세상에, 저 배우들이 한 극에 섰단 말이야!’라는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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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과 노래, 불협화음과 폴리포니(polyphony)



예로부터 여성 공동체의 기본 언어는 논리적인 문법 체계나 서사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음계 위의 가창이었고, 타악이었으며, 타령이자 노래였다. 억울하게 죽은 혼을 달래기 위하여 무당이 선택하는 언어도 타악과 방울 소리에 맞춰 부르는 노래와 뜀의 무용이며, 함께 빨래터에 모여 힘듦을 나누는 것도 노래이며,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서 여성 집단에서 함께 모여 노역하며 입 밖으로 함께 내뱉는 것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 언어가 되지 못했다. 여성의 언어는 서사가 부재하고 인과관계와 같은 논리구조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와 같은 비명)는 오로지 발화자(가창자)의 의도와 그 선율에서 느끼는 감정뿐이다. 이 비논리적 의도와 선율은 남근로고스주의의 이분법을 들이밀면 언어일 수 없지만, 이 이분법을 부수고 나면, 이들의 노래는 차마 말해지지 못한 이들의 언어가 된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첫 번째 넘버 ‘프롤로그’는 베르나르다 알바와 그의 다섯 딸들, 그의 엄마를 소개한다. 발소리, 박수와 같은 타악으로 시작하여 이들의 몸에서 시작되는 마찰음은 플라멩코의 기본 리듬을 구성한다. 집시 음악과 플라멩코를 녹여 낸 넘버인 프롤로그에서 이들의 노래는 의도적으로 익숙한 음계를 깨고 넘는다. 프롤로그의 첫 번째 가사인 폰시아의 ‘옛날 옛적 스페’부터 시작되는 이 불협화음은 우리가 기대하는 음을 빗나가며 안토니오의 성범죄를 고발하는 가사에 다다라서 앙구스티아스와 어린 하녀의 비명으로 전환된다. 이 비명은 이내 다섯 딸들에게 번지고 이들은 베르나르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18번째 넘버 ‘문을 열어’에서 자매들이 합창하며 부르는 ‘문을 열어’라는 가사는 마지막에 치닫자, 자매들의 발화(이자 가창)는 ‘문을 열-’에서 끝나는 반면, 아델라의 발화(이자 가창)는 ‘문을 열-어’로 완성된다. 그가 홀로 이어 부르는 ‘-어’ 종결 어미는 민속적인 느낌을 주는 굴곡이 큰 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자매들의 뻬뻬를 향한 사랑은 끝이 난 반면, 우리가 기대하는 음계를 모두 배신한 채 스스로 자신의 사랑을 찾아간 아델라의 가창(이자 발화)은 그 후 이어지는 굴곡을 타고, 서사적으로 말해질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선택과 그 선택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열망과 조금의 주체성마저 보인다. 


자매들이 모여 수를 놓으며 시작하는 둘째 막달레나부터 앙구스티아스, 아멜리아, 마르띠리오, 아델라의 솔로 넘버가 짧게 이어진다. 극의 내용과 전혀 다른 이야기, ‘한 청년의 고통’의 이야기를 하는 막달레나, 자신은 행복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앙구스티아스, 부끄러움이 많아 어떤 소문도 없는 스윗한 아멜리아, 남자들이 자신을 혐오하지만 그래도 사랑받고 싶다는 마르띠리오, 그리고 검은 상복이 아닌 초록 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꿈꾸며 언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아델라까지. 각자가 지닌 마음속 깊은 이야기와 욕망은 대사가 아닌 노래가 되며, 이들의 솔로 넘버의 모티브들은 이윽고 뒤엉키고 합쳐진다. 이때 등장한 폴리포니의 마지막 가사는 막달레나의 모티브이다. ‘내 고통은 배고픔이 아냐. 내 고난은 사랑의.. 아픔.’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솔로 넘버를 부르는 이곳에서조차 이들의 발화(가창)는 완벽하지 못하다. 빈칸으로 남겨진 공간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할까. 

 

 

2023 베르나르다 알바 보도용 (1).jpg

 

 

 

억압과 자유, 여성의 억압과 여성의 자유



극 외적의 상황으로도, 극 내부의 이야기로도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를 단지 억압에 저항하여 자유를 찾는 이야기로만 해석하기에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것들이 많다.

 

정영주 배우의 베르나르다가 손바닥의 넓적한 힘으로 수직으로 찍어 눌러 일어설 수 없게 하는 압(壓)이라면 한지연 배우의 베르나르다는 다섯 손가락으로 움직일 수 없게 꽉 쥐어 잡는 악(握)이다. 압력과 악력으로 억압당하는 객체는 암말이자, 여성이다. 수말이자, 남성이 아니다.

 

딸들을 억압하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떠나는 일은 결혼뿐이지만, 결혼은 결국 베르나르다 알바가 아닌 남편의 억압 속으로 들어가는 일 뿐임을 극 안에서는 계속 인물들의 대사로 알려준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2023년의 관객들에게 환호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극이 모든 것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8명의 배우가 ‘창녀’라고 소리친다. 문밖에 여성에게, 그리고 알바는 자기 자신에게도 창녀라며 자신을 혐오한다.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며, 딸은 엄마에게 자신의 몸을 혐오하는 법을 배운다. 대중적인 공간에서 여러 배우의 입을 통해 듣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모든 것이 차단된 공간의 사적인 공간에서 보통 남성의 입으로 발화되어 왔던 ‘창녀’라는 단어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타자화된 채 여성의 입에서 누구보다 크게 등장하는 저 혐오적인 단어는, 여성 스스로를 옥죄게 만드는 밧줄이 되는 동시에 아델라의 목을 옥죄고 동시에 질 낮은 폭력 속에서 흐려진 단어가 가진 혐오의 본질을 그대로 가져온다. ‘창녀’라는 단어 속의 여성혐오를 되살리는 넘버 ‘림브라다의 딸’에서 우리는 그 단어가 원래 지니고 있던 무게를 다시금 되살려 느낀다. 

 

2023년에 여성에게 성적 자율권을 보장하라는 주장의 반박은 맥키넌의 “남성이 우월하다는 조건하에서 ‘동의’라는 개념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 번도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바다출판사(2020), 253쪽, 맥키넌 재인용)는 말로 대체한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안으로도 밖으로도 이 사회에 대한 고발은 계속된다. 문밖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맞으며 끌려가고, 남편을 가둬둔 채 여자를 말에 태워 올리브 숲으로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러한 서사 밖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알바의 집 밖에서도 여전히 이들이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려준다. 억압을 피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듯하지만,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남편을 찾아 결혼하는 일조차 자신의 목줄을 베르나르다에게서 남편에게로 옮겨주는 일일 뿐이다. 


알바의 집에서 탈출을 꿈꾸는 이들도,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도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점은 ‘죽거나, 미치거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우리는 죽거나 미치지 않고 이 안팎의 억압과 폭력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차라리 죽기보다는 미치는 편을 택하겠다. 여신보다 사이보그를 선택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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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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