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허함 속 유지하는 삶 - 벚꽃 동산 [공연]

"나의 벚꽃 동산이여, 안녕!"
글 입력 2023.05.2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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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동산>은 안톤 체호프의 유작이자 마지막 장막극이다. 러시아 혁명 전후로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부유 상인 계급이 성장하는 시대상을 담는다. 러시아 혁명은 권위주의적 위계 구조에 저항하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구분을 없애고자 했고,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국립극단의 <벚꽃 동산>은 이 시대를 배경으로 라네프스카야의 전부였던 ‘벚꽃 동산’의 소유를 둘러싼 갈등을 다룬다. 지주  ‘라네프스카야’는 ‘벚꽃 동산’을 상실하고, 신흥 상인 ‘로파힌’이 이를 획득하면서 계급 간의 권력 교차가 드러난다. 결정적인 순간에서도 안일한 모습을 보이는 귀족 ‘라네프스카야’,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기 위해 벚꽃 동산을 사들이는 농노 출신의 부자 상인 ‘로파힌’, 그리고 이상을 설파하면서 현실에 머물러 있는 지식인 ‘뜨로피모프’의 모습은 어쩐지 무력하고 공허하다.

 

 

 

“나의 벚꽃 동산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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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집을 떠났던 라네프스카야는 벚꽃 동산으로 돌아온다. 돌아올 곳이 벚꽃 동산밖에 없었으나 이제 다시 떠나야만 한다. 그녀의 낭비벽으로 벚꽃 동산은 빚더미가 되었고, 로파힌이 농원을 없애고 여름별장을 만들자는 대안을 제시하지만 라네프스카야가 이를 거절하면서 벚꽃 동산은 경매에 부쳐진다. 그녀는 자신의 젊음을 함께한 벚꽃 동산을 지키고자 하지만 도리가 없다. 그녀의 오빠인 ‘가예프’ 또한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한다.

 

벚꽃 동산은 경매에 넘겨졌다. 로파힌과 가예프가 경매에 참여하러 떠난 동안, 라네프스카야는 악사들을 초청해 무도회를 연다. 곧 저택과 동산을 잃을 사람들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천진하고 평화롭다. 무도회 공간에서 벗어난 라네프스카야는 경매에 참여하러 떠난 오빠를 하염 없이 찾으며 그녀의 불안을 드러낸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뜨로피모프에게 악의 없는 농담을 던진다.

 

벚꽃 동산은 팔렸다. 로파힌에게. 벚꽃 동산 농노의 자식이었던 그가 이제 동산의 주인이 된 것이다. 감정표현이 거의 없던 로파힌이 유일하게 격앙된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벚꽃 동산의 주인들은 벚나무가 베어지는 가운데 벚꽃 동산을 떠난다. 로파힌 또한 사업을 위해 도시로 떠난다. 문을 잠그고 모두 떠났지만, 그들은 하인 피르스를 잊고 그를 남겨둔다.

 

 

 

갈등 없는 상실과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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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가진 것을 빼앗는 행위는 상당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수반한다. 그러나 <벚꽃 동산>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의 감정 기복도 크지 않고,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지도 않는다. 극을 관통하는 갈등인 ‘벚꽃 동산의 상실과 획득’도 평이하게 해소되며, 로파힌이 벚꽃 동산을 소유하면서 ‘권력’을 쥐게 됐으나 이를 휘둘러 라네프스카야네 가족을 자극하는 장면도 없다. 라네프스카야 식구는 새로운 삶을 위해 평화롭게 떠난다. 벚꽃 동산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은 남겨둔 채.

 

라네프스카야의 양딸 ‘바랴’는 로파힌을 짝사랑하고 주변인들 모두 둘이 결혼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로파힌은 청혼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벚꽃 동산을 떠나기 전, 라네프스카야가 로파힌에게 청혼할 기회를 주지만 그는 바랴에게 청혼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랴 또한 무던히 이를 받아들인다.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사랑’의 결과 또한 판판하게 묘사된다.

 

지식인 ‘뜨로피모프’는 라네프스카야의 어린 딸 ‘아냐’와 ‘사랑 이상의 것’을 한다. 그는 농노제도의 비인간적인 행태에 대해 비판을 쏟아낸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상을 지향하는 의지와 행동을 보이지는 않는다. 극에서 그가 계속 대학생이라는 점이 강조되는데, 이 또한 그가 현실에 머무르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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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동산은 사라진다. 그리고 벚꽃 동산의 사람들도 모두 떠났다. 빈 공간에는 공허함만이 남는다. <벚꽃 동산>에서 느껴지던 ‘공허함’은 결말까지 관통한다. 그러나 이 공허함은 다르게 말하면, 중심 갈등 이외의 것들 또한 충분히 유의미하다는 것일 테다. 인물들은 벚꽃 동산의 소유에만 목 메지 않는다. 다소 현실감각이 떨어져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일상의 삶을 영위한다. 춤도 추고, 산책도 하고 가족 간의 애정을 나누면서 삶을 이어간다.

 

큰 갈등과 극적인 순간이 있어도 우리의 삶은 이어진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도 있다. 우리에겐 그런 힘이 있다. 

 

 

사진=국립극단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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