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노니머스 프로젝트: 우리가 멈춰섰던 순간들 [미술/전시]

사진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연결
글 입력 2023.05.27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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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에서 아주 뜻깊은 사진 전시를 보고 왔다.

 

The Anonymous project. 전시의 이름이 이러한 이유는, 전시에 쓰인 모든 사진이 작가 미상이기 때문.


어노니머스 프로젝트는, 영국의 한 사진 덕후가 있었기 때문에 열릴 수 있었다. 1940년대부터 80년대에 많이 쓰인 필름 사진을 좋아한 디렉터 리 슐만은 직접 80만 장의 컬러 필름 슬라이드를 수집하고 다녔다.


주로 미국과 영국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이지만, 정확히 언제,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알 수 있는 정보는 없다. 다만 모든 사진의 큰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애정’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멋들어진 자연 풍경, 쇼킹한 장면을 남긴 사진이 아니라, 엄마, 아빠, 친구, 연인이 촬영해 준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순간의 사진들이기 때문이다.

 

 

 

전시의 첫 번째 테마: A Story Beg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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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시작은 카메라를 들고 누군가를 찍는 사람들의 사진이 채워져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을 사진에 담으려 하는 누군가의 모습. 그들의 옷차림새와 배경을 보며 추측하게 된다.


아, 날이 좋은 봄에 가족 나들이를 나가 기념으로 찍고 있구나.


사랑스러운 자신의 손주를 흐뭇하게 찍고 있는 할아버지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인스타그램의 시대에서는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가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의미를 곱씹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화질이 떨어져 흐릿한 필름 사진이 나의 생각을 또렷하게 만든다. 저 사람이 저 순간, 카메라를 든 이유가 뭔지, 나에게도 딱 저런 순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날 찍어주던 우리 할머니가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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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보다도 작은, 슬라이드 필름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몹시 내밀한 것을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숲속 어딘가에 있는 오두막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에 걸려있을 법한 사진들. 사진의 크기는 조그매서 사람들의 눈코입이 뭉개져 있음에도 왜인지 너무나 애틋하고 소중해 보였다. 국적도, 인종도, 시대도 다른 생판 남의 사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건 아마도 보정 하나 없이, 눈으로 바라본 모습이 그대로 담긴, 솔직한 사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았다. 예쁜 색감과 임팩트 있는 구도, 적절한 크롭으로 다듬어진 완성형 사진은 우리에게 감탄을 자아내지만, 내 기억 저편에 있는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해주진 못한다. 낡고, 초점이 흔들려 있더라도, 날 것 그대로 담겨 있는 작은 사진 속 인물들을 통해 집단적 기억을 되찾는다.

 

 

 

전시의 두 번째 테마: Before the Instagram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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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경제가 가장 풍요로웠던 시절. 중산층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일상을 사진으로 많이 남기기 시작했다. 두 번째 테마에서는 기념일, 휴가, 먹고 마시는 것, 아기의 탄생 등.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남겼을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휴가라고 하면 마음 한편에 떠오르는 바다 여행, 사랑스러웠던 반려동물과의 순간, 잊지 못할 첫 자차 드라이브의 날, 홈파티에서의 즐거운 저녁 시간 등, 우리가 70년대 미국 영화, 드라마에서 익히 본 감성이 물씬 느껴진다. 

 

 

 

전시의 세 번째 테마: The Moments We Paused


 

세 번째 테마에서는 이 전시가 진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단순히 옛 사진을 보며 나의 기억을 떠올려서 좋았다는 것만이, 감상의 전부가 아니었던 이유를.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그리워하거나 향수에 젖은 채 지난날을 되새기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아닙니다. 필름 속에서 빛과 함께 되살아난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소중한 장면들을 마주하면서, 당신과 나의 우주가 시공간을 넘어서서 따뜻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멈춰 서게 한 그 순간들 속에서 말이죠. 오늘 여러분이 촬영 버튼을 눌러 남긴 사진은 무엇을 담고 있나요? 그 기록은 이후에 어떻게 남게 될까요? 시간이 지나면 우리 역시 이름 모를 누군가로 돌아가겠지만, 행복한 기억을 담은 오늘의 기록은 먼 훗날 다른 누군가를 사랑에 빠지게 할지도 모릅니다.] - The Moments We Paused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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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들판에서 뛰어노는 소녀, 서로를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연인,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입이 찢어지라 웃고 있는 여자들.


하나하나의 사진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이는 지금쯤이라면 할머니가 되어있겠다. 그럼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동시간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혼자 생각하다 보면 나는 사진 속 그 아이에게 기묘한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미국 어딘가에 계실 한 할머니의 어린 시절 눈부신 찰나를, 대한민국에 있는 한 직장인인 내가 보고 감동을 한다.’


이건 사진이라는 매체가 연결해 준 재미있고, 따뜻한 효과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시대가 달라도, 사진으로 나는 사진 속 인물들과 연결되었다는 사실. 그렇다면 내가 매 순간 남기는 사진도, 훗날 누군가에게 닿아 연결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그렇게 어노니머스 프로젝트는 총 3개의 테마로 사진이 갖고 있는 힘을 아주 차근히 전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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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진 좀 좋아하고, 많이 찍는다는 자부심이 조금 있었던 사람으로서, 약간의 부끄러움과 울림을 얻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다!”라며 순간을 기억하고자 카메라를 자주 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SNS 업로드를 위한, 자랑하기 좋은 사진에 치중되었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에도 좋듯이, 기왕 남기는 사진, 흐트러짐 없이 예쁜 모습으로 남기는 게 좋은 거지’라는 생각이었지만… 이번 전시를 보고 돌이켜 보니,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는 목적이 흐릿해진 것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예쁘고, 멋지게 나오는지는 사진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음을. 내가 찍고 싶어 하는 대상과,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앵글에서 느껴지는 감정, 다정함이 사진의 힘이라는 것을, 작고 낡은 사진들로 느낄 수 있던 전시, <어노니머스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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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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