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의 몇 평의 삶을 사는가 - 헬프 미 시스터 [도서/문학]

곁에 있지만 투명하게 지워진 사람들
글 입력 2023.05.0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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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달린 견장과 금색 수술이 여숙 씨의 자신감을 한껏 부풀려놓았다. 전함을 이끄는 함장이 된 기분이었다. 여숙 씨는 이런 옷은 평생 입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고, 도대체 자신의 삶은 몇 평이나 되는 걸까 생각했다. 평생 2평짜리 방 한 칸에서 병든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입어야 할 것 같은 옷을 입고, 배워야 할 것 같은 지식을 배우고, 해야 할 것 같은 일을 했다."

 

 

헬프 미 시스터_톱니바퀴.jpg

 

 

배달앱과 쇼핑앱 등 편리한 애플리케이션이 많아졌다. 손가락 놀림 몇 번이면 동네, 전국 각지, 넓게는 세계 각지에서 생산된 것들이 여러 장소를 거쳐 우리에게 온다. 손 흔들어 택시를 잡는 일도, 맛집 앞에 줄을 늘어지게 서는 일도, 무거운 이불을 들고 빨래방을 오가는 일도 줄었다. 이제 우린 앱으로 택시를 호출하고, 줄을 서고, 빨래 수거를 요청한다. 우리는 이 간편한 자동화로 사회와 가까워졌다고 믿는다. 누구와도, 어디와도, 어떤 일로든 쉽게 연결되기 때문에 사회는 나를 위해 알차게 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톱니바퀴는 사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배달앱에는 배달 기사들이 있고, 쇼핑앱에는 택배 배달 기사가 있다. 더 보이지 않는 미세 톱니바퀴들은 플랫폼을 구성하기 위한 요소로 돌아간다. 필요한 데이터에 라벨링을 하고, 자동화를 위해 파편화된 작업을 하는 사람들. 이들은 사회의 가장 작은 톱니바퀴로, 쉴 새 없이 돌아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조각난 노동은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안정적이지 않으며, 보호받지도 못한다.

 

 

헬프 미 시스터_표지(띠지).jpg


 

<헬프 미 시스터>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SNS와 애플리케이션 등의 플랫폼을 매개로 일거리를 찾고 노동을 제공한다. 회사 동료로부터 성추행당한 수경은 퇴사 후 택배 배송일을 한다. 그녀는 가족을 차례로 택배 배송일로 데려가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남편인 우재는 접대가 싫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퇴사한 후 경력이 단절돼 전업투자를 일로 삼고 있고, 여숙 또한 식당 일을 한 후 쉬고 있기 때문이다. 택배 배송을 하며 수경은 택배 배송에서도 정규직과 일용직 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과 자신이 플랫폼 노동자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 또한 빠른 배송은 곧 배송 건수가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촌각에 예민해지는 본인을 발견한다.

 

이야기 속 ‘헬프 미 시스터’는 여성을 위한 심부름 대행 애플리케이션이다. 여성을 위한 생활 밀착 편의형 서비스가 앱을 기반으로 진화하고 있는 현실과 그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여숙과 수경은 이 앱으로 다양한 노동력을 제공한다. 이들은 우스갯소리로 ‘애앱심’이 생기겠다고 말할 정도로, 하루 종일 핸드폰 알림을 켜두고 앱을 들락날락해야 했다. 사실상 0시간 계약이지만 장시간 대기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건별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고정된 일이 없고, 따라서 고정된 급여도 없다.

 

불안정한 일이라면 수당이 높아야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회적이고 전문성이 필요 없다는 이유로 대가도 낮다. 평점이 낮으면 비활성화 처리되기에 평점을 의식하느라 진이 빠지며, 문제가 생겨도 보호받지 못한다. 플랫폼 사업자들은 근로자들의 노동을 플랫폼으로 ‘중계’한 것에 그치기 때문에 산재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결국 플랫폼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리감독받으면서 보호받지는 못한다. ‘사이버 프롤레타리아’가 된다.

 

“10년 뒤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재는 수경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그들은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돼지껍데기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배달 드론이나 무인 배송 트럭이 나오겠지.”

우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드론이나 무인 배송 트럭이 인명 사고를 일으켰다고 가정해봐. 그러면 회사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잖아. 그런데 우리 같은 긱(gig) 노동자를 고용해서 독립 계약자의 지위를 주고 일을 시키면 비용이 훨씬 적게 들어. 우리한테 사고 처리를 다 떠넘기면 되니까.”

 ㅡ

 

그럼에도 여숙과 수경은 노동해서 돈을 벌며 보람을 가진다. 여숙은 나이 때문에 부끄러워 주저했던 앱 사용에 점차 익숙해졌다. 택배 배송 앱을 사용해 바코드를 찍고 택배 배송을 하기 위해 운전도 배웠으며, ‘헬프 미 시스터’ 앱은 능숙하게 사용한다. 결혼식에서 신부의 부모인 척 연기하는 새로운 경험도 한다. 이렇게 그녀는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혔다. "여숙 씨는 이제부턴 저항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들을 뒤로 밀어놓고 달려가려는 시대의 머리채를 확 잡아챌 것이다. 같이가! 하고 외치며."

 

‘같이 가!’ 외치며 노동의 긍지를 가지는 가족의 모습은 희망적이다. 그러나 걱정되는 부분은 이들의 노동이 지극히 ‘현재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일회적인 일거리를 쳐내면서 현재만 사는 사람이 된다. 지금처럼 여러 일거리들을 하면서 살아가면 될 것 같은 자족감이 들며 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일거리는 고정적이지 않고, 그들의 노동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낮아진다. 조금 더 안전한 일이 필요하다. 혹은,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보호망이 필요하다.

 

스스로 일어서는 것.

상처를 지닌 채로 걸어가는 것.

다시 사회에 뛰어들어 생계와 보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수경은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두고 온 커피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더 이상 이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좀 더 안전한 일을 찾아내야 한다고.

 

플랫폼 노동자인 수경을 중심으로, <헬프 미 시스터>는 보라와 은지의 이야기로 여성 문제도 아우른다. 틴챗을 ‘일터’로 여기는 미성년자 은지는 자신의 사진을 팔아 돈을 번다. 그녀와 거래하는 성인 남성들은 은지의 신상을 알아냈고, 그녀는 신상유출에 대한 두려움과 남성혐오증에 시달린다. 저자는 은지를 통해 온라인에서 행해지는 미성년자 성 착취 문제를 다룬다.

 

보라는 수경이 당한 성추행에 분개한다. 수경은 자기 일임에도 지친다는 이유로 분노를 묻어뒀지만 보라는 그렇지 않았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분노했다. 그럼에도 보라는 수경을 위해 투쟁하기로 한다. 두 여성 간의 연대는 ‘헬프 미 시스터’ 외침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보라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뜻밖에도 수경은 고요한 표정이었다.

 

보라는 햇빛 아래 서서 어두운 굴다리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터벅터벅 걷고 있는 수경이 아주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슬그머니 다가가 팔짱을 끼며 웃고 싶었다. 어릴 때처럼.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어리지 않고, 재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수경도 그렇게 생각할까. 쟤, 재수 없다고. 한 번도 돈을 벌어보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저러는 거라고. 아직 어려서, 고작 스물셋이라서 인생을 몰라서 그런 거라고. 보라는 수경이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길 바랐다.

 

이 투쟁은 언니, 너를 위해 하는 거야.

 

수경이 굴다리를 통과해 뒤를 돌아보았다. 햇빛 아래 서서 보라를 바라보는 수경의 얼굴은 무심했다. 이제 보라가 어두운 영역으로 걸음을 내디딜 차례였다.

 

 

<헬프 미 시스터>는 플랫폼 노동부터 여성 문제, 나아가 보라의 성 정체성 문제까지 다양한 문제를 수경네 가족과 주변인들로 풀어낸다. 아우르는 소재는 많지만, 머릿속에 드는 질문은 하나다. ‘이들은 몇 평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이 때문에 앱 사용을 주저하던 여숙, 플랫폼에서 건 별로 처리하는 일만 쳐내는 수경의 모습, 경력이 단절된 후 자신을 집에 가둔 우재의 모습에서 그들 삶의 평수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충분히 삶의 지평을 넓혀나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 있는지, 너무 빠르게 돌아가지는 않는지, 너무 비가시적이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서로의 안전망에 관심을 가지며 문제가 있으면 연대하는 사회에서 개인 삶의 평수는 넓어질 수 있다.

 

당신은 몇 평의 삶을 사는가?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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