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호랑이는 살아있다

단편 영화 <The Haunted>(2017)
글 입력 2023.04.1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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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코리아나 미술관의 기획 전시 ≪호랑이는 살아있다≫전을 관람했다. 전시의 제목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작가의 동명 작품에서 따왔다. 한글 이름을 보고 영어 원제가 ‘Tiger Is Alive’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게 아닌 ‘Tiger Lives’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다.


새천년 맞이 행사를 위해 만들어진 비디오 작품 <호랑이는 살아있다>(2000)는, 북한에서 제작한 호랑이와 사자의 결투 영상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 서구의 사자에게 밀리지 않고 승리하는 호랑이는 우리 민족을 나타낸다. 해당 작품을 모티브로 두고 만들어진 ≪호랑이는 살아있다≫전은 우리 민족이 호랑이에게 가졌던 공포감과 경외감, 그리고 애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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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켄 리우의 단편 소설 <종이 동물원>에서도 호랑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매혼을 한 미국인 아빠와 중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자신의 엄마가 다른 엄마들과는 다르다는 걸 조금씩 깨닫는다. 주인공이 엄마를 홀대하고 그 정체성을 부정할수록, 어린 주인공을 위해 엄마가 만들어주었던 종이 호랑이 ‘라오후’는 생명력을 잃고 평범한 종잇조각이 되어버린다.


동양에서 호랑이는 위협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그러나 서양의 침략에 우리들의 수호신은 서서히, 또는 급격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호랑이에게 쓰는 편지 ≪The Haunted≫(2017)



일주일 전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방문했다. 짧은 기간 머물면서도 미술관을 여럿 다녔다. 그중 영화 미술관에서 또 한 번 호랑이를 만났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근처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페리를 타고 가면 아이 필름뮤지엄(Eye Filmmuseum)이 바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영화 촬영 기계의 발달을 보여주는 상설 전시와, 매번 새롭게 꾸며지는 기획 전시를 함께 볼 수 있다. 내가 방문할 당시에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영화감독 사오닷 이스마일로바 기획전 ≪SAODAT ISMAILOVA 18000 Worlds≫가 전시실을 채웠다. 


짧게는 15분, 길게는 30분 정도 이어지는 단편 영화 일곱 작품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흔히들 생각하는 상업 영화는 아니고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작품들이었다. 시간이 부족해 작품 전부를 관람할 수는 없었지만, 가장 눈길을 끌었던 작품 ≪The Haunted≫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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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도 호랑이는 신성한 존재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지배 이후로 호랑이의 개체수는 빠르게 줄어들어 공식적으로 멸종되었다고 한다. 호랑이의 멸종은 단순히 한 동물의 멸종보다 많은 것을 의미한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품고 있던 전통의 멸종을 예고한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와 지식과 생활, 모든 정체성의 저묾이다. 


영상에서 화자는 호랑이를 ‘you’로 지칭하며 그가 화자와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를 읊는다. ≪The Haunted≫는 호랑이에게 쓰는 편지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평온한 독백이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하얀 깃발



그토록 강한 호랑이인데, 왜 우리의 편에 서서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못했는지 원망의 냄새가 스민 궁금증이 떠오른다. 우리가 무력하게 스러질 때 우리의 수호신은 어디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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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unted≫의 첫 장면은 파란 하늘 아래서 휘날리는 하얀 깃발이다. 재밌는 사실은, 바로 전날 방문한 모코 미술관에서도 백기를 보았다는 것이다.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작품 ≪The Hero≫(2002)에서 아브라모비치는 흰 깃발을 든 채로 말 위에 올라타 있다. 작품 해설을 통해 미술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시한다.

 

 

This might make you wonder if surrendering could also be an act of strength?

항복 또한 힘을 드러내는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해지지 않나요?

 

 

날카로운 이빨을 뽐내거나 발톱을 휘두르지 않고도 승리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평화를 제안하는 것이다. 항복은 약자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묘사될 때가 많지만, 패배 선언이 아니라 폭력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생각한다면 항복이 달리 보인다.


호랑이는 꼬리를 말고 도망치거나 그대로 전멸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에 동참하지 않고 지금 지킬 수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그림자로 남기로 했나 보다.

 

 

 

호랑이는 살아있다, Tiger Lives



≪The Haunted≫의 초반에서 강하고 위엄 있는 존재로 등장한 호랑이는, 후반부에서 박제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이 변모가 두렵고, 또 안타까웠다. 그 강한 호랑이가, 사냥당하고 그저 인간의 놀잇감으로 전락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을 끝까지 보고 생각을 정리한 후에는 곧바로 감상이 바뀌었다. 호랑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전통 의식, 혹은 꿈의 자리를 빌려 호랑이는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는 여전히 우리들의 수호신. 안내자이자 보호자이며 전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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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리우의 단편 <종이 동물원> 속 종이 호랑이 라오후도 보잘것없는 종잇조각이라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엄마의 편지를 읽은 주인공이 다시 종이 동물들을 담아두었던 상자를 열자, 라오후는 금세 깨어나 언제 누워 있었냐는 듯이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개인적인 감상인지는 몰라도, Alive가 형형하고 공격적으로 존재감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면, Lives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백남준 작가가 그 단어를 선택한 게 아닐까. 당장 우리 주변에서는 호랑이를 찾을 수 없지만, 그들은 어디선가 엄연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이곳저곳에 그들의, 우리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간다. 


박제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존경과 기억의 뜻일 테다. 호랑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곁을 지킨다. 종이로, 박제로, 우리의 상상으로. Tiger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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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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