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랑에 또 한 번의 기회를 [영화]

명곡 Under Pressure와 영화 애프터썬(aftersun, 2023)
글 입력 2023.03.2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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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맞지 않아 여러 번 미루었던 영화 [애프터썬]을 드디어 보았다. 큰 줄거리는 찾아보지 않았고, 당연히 해석도 보지 않았다. 그저 [애프터 양]을 재미있게 보았다면 즐거울 것이라는 친구들의 추천을 믿고 영화관으로 발을 옮겼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 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영화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상영관을 나오며 “오…. 그래서 이게 무슨 영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중심 이야기보다는 내 흥미를 끌었던 부가적인 요소에 집중하게 되었다. 아주 반가운 노래가 OST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Under Pressure와 나, 그리고 소피


 

퀸과 데이비드 보위의 합작인 명곡 Under Pressure는 사실 오래전 내 노래방 애창곡이었다. 한창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하고 있었고,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옆 도시에 가서까지 그 영화를 보았을 정도로 퀸을 좋아했다. 그 멋진 영화가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아직도 집에는 퀸의 콘서트 DVD가 있고 가끔 노래방에서 Bohemian Rhapsody를 부르지만, 이제 Under Pressure는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곡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삶의 재미있는 건 난데없이 기억 속에서 살아나는 노래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애프터썬(aftersun, 2023)]을 통해 오래된 추억 언저리에서 숨죽이고 있던 Under Pressure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Under Pressure는 내가 기억하던 어릴 적의 흥겨운 노래가 아니었다. 내가 이 노래의 가사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던 것 같다. 2018년의 나는 아마 이걸 그저 흥겹게만 불렀을 테니까. 상영관을 나서며 다시 찾아본 가사는 생각보다 더 심오하고 괴로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놀랍게도 요즘 내가 느끼는 세상과도 같은 가사들이었다. 아마 이야기 속의 소피도 비슷한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소피 또한 튀르키예 여행을 추억할 때, 아빠의 상태를 깊게 들여다보기보단 오랜만에 아빠와 보냈던 즐거운 휴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피가 아버지의 캠코더 속 ‘아빠’의 모습을 다시 찾은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을 것 같다. 돌아온 튀르키예 여행 속의 기억에서 소피가 느꼈을 충격은 아마 내가 Under Pressure의 가사를 보고 느꼈던 것보다 더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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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채로 재구성된 기억


 

[애프터썬]을 본 며칠 후, 정말 오랜만에 노래방에서 Under Pressure를 불러보았다. 분명 뜻은 다 몰라도 자연스럽게 따라부를 수 있었던 가사들이 뚝뚝 끊겨 나왔다. 지우개로 두세 번 문지른 글자들을 읽는 기분이었다. 머쓱하게 노래방을 나오던 길에 문득, ‘아, 그렇다면 이 영화는 소피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5년밖에 지나지 않은 나도 이렇게나 버벅거리는데 영화가 그렇게나 선명했던 건 분명 소피의 사랑 덕분이다. 11살 무렵의 소피는 아버지의 우울과 위태로움을 명확히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의 생생하고도 어딘가 빛바랜 장면들은 소피가 당시의 기억과 캠코더 속의 영상을 토대로 계속해서 만들고 고쳤을, 수십 번 재구성된 기억이다.

 

캠코더를 계속해서 돌리며 소피는 당시 아버지가 느꼈을 감정을 생각했을 것이다. 본인이 커갈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버지의 감정이 점점 더 깊숙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서서히 숙소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것에서 오는 짜증, 계속해서 불안한 심신과 너무나도 어린 본인의 아이를 보고 느끼는 책임감과 괴로움을, 어른이 된 소피가 천천히 되짚었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캘럼이 느끼는 감정들은 우리가 매일매일 감내하며 살아가는 감정들과 다르지 않다. 멀게만 느껴졌던, 어렸을 적 헤어진 아버지의 얼굴이 점점 친숙하게 느껴질 때 소피의 기분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캠코더를 돌려보던 소피의 얼굴이 유난히 흐릿하게 기억나는 것은 내가 그 표정을 이해할 수 없어서였던 것 같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 부모님을 그렇게 회상하게 될까? 계속해서 그들의 얼굴을 그릴 정도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회상 속에서, 캘럼과 같은 그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랑, 우리 자신


 

탄탄하지 못한 경제 사정과 위태로운 정신을 가지고도 캘럼은 최선을 다해 소피를 챙긴다. 아이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주고, 언제든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음을 말해주고, 명상을 함께한다. 빠짐없이 아이를 캠코더에 담은 캘럼의 모습에서 진한 부성애가 느껴진다. 그러나 캐럼은 떠났다. 왜 사랑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줄 수 없었을까? 사랑마저도 그를 붙잡을 수 없었던 걸까?

    

튀르키예의 바다 위에서 캘럼이 소피에게 해준 말이 마음에 남는다. 아빠는 다 들어줄 수 있으니까, 무엇이든 이야기해도 괜찮아. 소피가 없는 아버지 대신 캠코더를 돌리며 영화 속의 회상을 계속한 건 어쩌면 이 ‘이야기’의 대체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역시 캘럼은 계속해서 소피를 사랑하고 있는 게 맞다. 햇볕이 내리쬐던 튀르키예의 바닷가는 더 이상 둘에게 있을 수 없지만, 아빠의 사랑은 남아서 소피에게 애프터썬처럼, 마치 계속해서 덧바르는 선크림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서야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두 사람의 바다 같은 사랑을 오래도록 생각해야지.

 

 

[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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