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로 향하는 밉고 고운 ‘정(情)’의 시간으로 - 코리아 이모션 [공연]

유니버설 발레단 <코리아 이모션>을 관람하고
글 입력 2023.03.2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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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학창 시절에 나는 국영수보다 음미체를 더 싫어했다. 전자를 정말 좋아했다기보단 내게는 후자가 굉장히 나쁜 선택지였다. 애석하게도 예체능 영역에서는 영 힘을 쓸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타고난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깊은 좌절에 머무르기보단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애초에 바란 적이 없다고, 처음부터 내겐 없는 선택지였다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한계를 철저히 무시할 수 없는 순간도 분명 존재했다. 학창 시절 내내 나를 괴롭히던 대상이 있었다. 학기 초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유연성 검사’ 때문에 어린 나는 체육시간이 두려웠다. 그냥 좀 유연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얘가 지금 장난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뻣뻣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 목표는 만점이 아니라 ‘빵점’이었다. 어떻게든 ‘마이너스’를 탈출하는 것이 내 한계치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언젠가 1 cm라는 기록이 나왔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한 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십 대에 또 다른 기적은 없었다.

 

재미없게도 조금 당연하다시피 몸치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더 이상 유연성 검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홀가분했듯이, 모쪼록 내 삶에 춤을 춰야만 하는 일이 없었으면 싶다. 

 

누군가는 ‘이게 왜 안 되지?’라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몸치에게는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더 신기하다. 어떻게 본인 몸이 온전히 본인 통제 하에 있을 수가 있냐는 말이다. 나의 팔다리와 몸통은 저마다 자아가 너무 강해 도무지 주인의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으니…

 

하지만 부끄러운 춤실력을 지녔다고 해서 별로 불행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세상은 춤실력으로 서열을 정하지도 않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열렬히 갈망하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낭만을 일찍이 포기했고, 한 편으로는 현실과 잘 타협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열등감이 전혀 없었던 것은 또 아닌 것 같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지만 내가 몸치라는 이유로 춤을 철저하게 외면해왔는지도 모르겠다. 

 

한창 댄스 경연 프로그램이 인기의 절정에 있던 시기에도 춤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핑계로 주류에 편승하려 하지 않았다. 춤의 세계를 잘 모른다고 해서 특별히 아쉬울 것은 또 없어 보였다. 나의 관심사로 채워진 세상에서 나름 지루하지 않은 날들을 보냈고 그것만으로도 꽤 충분해 보였다.

 

 

2023 정기공연 코리아이모션 포스터.jpg

 

 

유연하지 못한 것은 내 신체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향해 닫힌 마음은 비록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세계로는 뻗어 나갈 수 없게 사고를 뻣뻣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생전 처음 관람하는 발레 공연, 1시간 남짓 한 시간 동안 인간의 신체가 표현하는 미(美)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했던 세계는 퍽 감동스러운 곳이었다.

 

문훈숙 단장의 소개로 시작된 발레 공연은 첫 입문자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유병헌 안무가는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 ‘정(情)’을 주제로 이번 공연을 연출했다. <코리아 이모션>이라는 제목은 곧 가장 한국적인 정서 ‘정(情)’을 의미하는 것이다.

 

발레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한국적’이라는 표현과는 좀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 장르를 어떻게 ‘정’을 묘사하는 수단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이유이다. 이러한 궁금증은 공연을 관람한 뒤 전부 해소되었다. 

 

 

2021( Korea Emotion 1 ) - ⓒ Universal Ballet_photo by Kyongjin Kim 1.jpg

 

 

국악과 컨템퍼러리 뮤직, 한국적 특색이 살아있는 고운 빛깔의 의상과 부채 등의 토속적인 소품, 한국 무용이 가미된 안무와 수묵화로 표현된 배경까지. 마치 처연한 달빛 아래서 펼쳐지는 것 같은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몸짓이 국악적인 선율과 만나 한국적인 정서를 구현해 내고 있었다.

 

한류 드라마 OST의 대가 지평권의 앨범 <다울 프로젝트>(2014)에서 발췌한 국악 크로스오버 음악들과 한국 전통 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 창작그룹 앙상블 시나위의 곡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짝패 OST <비연>에 맞춰 공연이 시작될 때 국악 크로스오버와 네오 클래식 발레의 만남이라는 설명이 가장 와닿았다. 

 

클래식 악기로 만들어내는 한국적인 선율 위에 국악과 성악의 가락이 교차하며 펼쳐지고, 닿을 듯 말 듯 한 애절한 선이 두 무용수를 통해 그려질 때 ‘한국적’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곱씹게 되었다.

 

나의 세계는 주로 언어를 통해서만 표상되곤 했다. 조금 오만하게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풍부한 묘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이라는 복잡한 정서를 예술의 형태로 구현한 무대를 보며 편협했던 생각을 반성했다.

 

‘정(情)’을 정의하기란 까다롭다. 수많은 예시를 들을 수는 있겠지만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정(情)’은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 등의 이분화된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아가며 체득해 나가는 개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내재되어 있는 미묘한 정서. 이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완벽히 설명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내가 가진 언어 능력만으로는 충분히 정의할 수 없는 ‘정(情)’을 공연예술로 표현해낸 <코리아 이모션>을 관람하며 내가 알아온 세상만이 정답일 수는 없다고 느꼈다. 대사 한 마디 없이, 표정마저 제한되는 환경에서 몸짓만으로 전달해 내는 감정을 보며 무용과 춤이 가진 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21( Korea Emotion 2 ) - ⓒ Universal Ballet_photo by Kyongjin Kim  (57).jpg

 

 

문훈숙 단장의 설명에는 ‘아리랑’에 대한 뜻풀이가 있었다. 본래 아리랑은 순우리말로 정의되지만, 이를 한자로 표현하면 ‘나 아(我)’ ‘이치 리(理)’ ‘즐거울 랑(朗)’으로 풀이된다고 한다. 나에 대한 이치를 깨닫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의미이다.

 

공연 내내 이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마지막 공연인 ‘정선 아리랑’이 펼쳐질 때가 되어서야 이 말의 의미가 가슴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구슬픈 가락과 애처로운 군무로 시작되는 아리랑은 잠시 후 분위기가 반전되어 신명 나고 화려한 분위기를 선사하기도 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좌절로 무너질 때도 많겠지만 그로 인해 한 층 단단해지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닿을 듯 말 듯 하고, 좋기도 싫기도 한 우리의 ‘정(情)’과 가장 닮아 있는 ‘아리랑’이 아닐까.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인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은 ‘아리랑’과 닮아 있었다. 특히 그들의 ‘발’이 그랬다. 발레를 생각하면 왠지 호수 위에 백조가 떠오른다. 겉으로는 우아하게만 보이지만, 그 모습을 위해 수면 아래서 두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백조. 

 

완성된 미를 선보이기 위해 수많은 좌절과 스스로의 한계를 이겨내야 했을 무용수들의 두 발. 그들의 노력이 담긴 까마득한 시간들을 상상하며 나를 알아가는 과정의 의미를 이해했다. 

 

즐거움은 다름이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상처 많은 두 발에서 온다고. 때론 애절하며 다시 구성지는 아리랑과, 밉기도 하고 곱기도 한 ‘정(情)’과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김소형.jpeg

 


[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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