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공간을 초월한 연대가 건네는 온기 –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

세상의 모든 ‘실비아'들에게
글 입력 2023.03.2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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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 자매 같은 작가들의 존재 자체가 굉장히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직업활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된 때가 백 년도 이제 채 안 됐으니까…

 그런데도 그 전에도 쓰는 사람을 막을 수가 없었던 거에요.

사실 이름을 남기기도 하고 못 남기기도 했겠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천년 전에도 있고 기원 전에도 있어요. 남아 있는 여성 작가가.

그런 천 년 전, 이천 년 전의 사람들을 생각할 때

이상하게 마음 속에 '언니'인 거에요. 너무 이상하다라는 생각을 해요.

'왜 언니라고 생각하지?' 라고 생각을 하는데, 다 언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아 어떤 흐름 속에 내가 있구나. 이게 릴레이 같다'라는 생각을 해요."

 

- 정세랑 작가,

jtbc 예능프로그램 <방구석 1열> 출연 당시

영화 <제인에어>에 대해 이야기하며

 


누군가 존재했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고 있는데도 이어져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세상 속에서 좌절하고 흔들리면서도 빛나는 재능과 의지를 숨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고, 그들을 억압했던 구조를 스스로 지적하고 고발했던 사람들이며, 단 한 발자국을 나아가기 위해 온 생을 바쳤던, 그런 여성들이다.

 

그들의 이름은 많은 경우 감춰지고 사라졌지만, 누군가는 그 이름들을 찾아 그들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들의 이름과 삶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하게 했다. 어쩌면 그들과 같은 이들로 인해 조금씩 변화해 온 미래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들의 삶을 다시 바꿔 놓는, 역설적이지만 참 벅차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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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과거를 바꿀 수 있을까? : “우린 모두 술탄 물을 마신거야”



뮤지컬 <실비아, 살다>도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고 재구성하며, 그런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20세기 초·중반 당시 여성으로서 삶과 사회에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한 글로 풀어냈던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였다. 하지만 그는 꽤 오랜 시간 작품보다는 비극적인 죽음과 결혼생활로 더 큰 관심을 받았고, 사후에야 그 예술성을 인정받아 퓰리처상을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 ‘실비아 플라스’의 삶과 작품을 뮤지컬 <실비아, 살다>를 통해 처음으로 접하고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참 반갑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의 맨 처음 기차에 오른 ‘실비아’에게 누군가 ‘미래가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처음에는 이 질문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복선과는 별개로 극이 진행됨에 따라 이 질문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극 중 실비아 플라스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실비아의 아버지는 실비아를 작가의 길로 이끌어주었지만 가부장적으로 어머니를 억압했던 사람이었고, 실비아의 어머니는 실비아를 위해 엄청난 희생과 헌신을 했지만 동시에 실비아에게 엄격한 성별규범을 강요했던 사람이었다. 실비아는 둘 모두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했고,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특히 실비아는 사회 안에서 강요받았던 ‘여성’으로서의 규범에서 벗어나 ‘시인’으로 성공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어머니처럼 ‘완벽한 어머니이자 부인’도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런 압박감과 내면의 갈등으로 상담을 받게 된 실비아가 ‘빅토리아’를 통해 처음으로 ‘엄마를 증오해도 된다’라는 허락을 받았을 때, 실비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마주보고 스스로를 용서하게 된다.

 

이 장면을 통해 앞서 언급됐던 ‘미래가 과거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바꿀 순 없어도, 과거를 보는 관점은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때로 과거를 바꾸는 것과 같은 영향력을 지니기도 한다. 이는 빅토리아가 실비아를 위로할 때 자주 건넸던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대사와도 이어진다.

 

실비아를 괴롭게 했던 압박감과 죄책감, 증오와 사랑, 좌절과 타협 모두 실비아의 ‘잘못’이 아니었다. 실비아는 가부장제와 성별규범 아래 억압당하며 그것의 부당함을 인지하고 지적했던 예술가인 동시에 그것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실비아 개인이 지닌 혼란함과 양면성을 개인에게만 초점을 두고 본다면, 개인을 온전한 스스로로 존재하기 어렵게 하는 구조의 부당함을 볼 수 없다.

 

극 중 ‘술탄 물’ 넘버는 이러한 구조와 개인의 관계를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은유한다. 일부러 그랬든, 실수로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누군가 물잔에 술을 따르고, 그 술을 마신 사람이 취해서 진상을 부린다면, 누가 사과를 해야 할까? 심지어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술을 마셔 중독이 되고 술 없이 살 수 없는 상황까지 된다면 어떨까? 술을 마시면 술에 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는 너무 쉽게 진상을 부리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이 상황을 물잔에 술을 따른 사람이 아닌 술에 취해서 진상을 부리는 사람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너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네가 그런 상황들 속에 놓여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그렇게 될 수 있는 거고. 그럼 너 자신을 탓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런 상황들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생각해야 하는 게 문젠데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게 문제야."

 


조금은 유쾌하게 풀어냈지만, 빅토리아의 이야기와 ‘술탄 물’ 넘버가 건네는 질문은 개인 뒤의 구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비록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해 보일 지라도, 이렇게 구조의 문제를 계속해서 지적하고 이로 인해 가려졌던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변할 수 없을 것 같은 과거도, 미래도 조금씩 바꾸어 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시공간을 넘은 연대가 건네는 온기 : “너의 글이 누군가에게 목도리가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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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실비아는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 10년에 한 번씩 ‘비상정차’를 시도한다. 그리고 실비아는이 비상정차가 죽기 위한 것이 아닌, 새로운 삶을 통해 해방되기 위한 수단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달리는 기차에서 멈출 수 있는 방법이 비상정차 밖에 없는 것처럼, 실비아가 해방되기 위한 수단으로 죽음만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실비아는 자신이 ‘벨 자(bell jar)’ 안에 갇힌, 한계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오롯이 본인 스스로로서 살아 있고, 살아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자신을 가두는 ‘벨 자(bell jar)’의 존재를 너무나 분명히 인지하고 또 느끼고 있음에도, 어떻게 해도 그것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실비아에게는 비상정차라는 선택지 만을 생각하게 했다.

 

어쩌면 실비아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그럼에도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확인 받고, 살아 있어도 된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의 넘버 중 ‘글은 나의 대체물’은 이런 실비아의 마음을 아름다운 선율 위에 그려낸다.

 

 

"글은 나의 대체물이죠. 선택이 아닌 꼭 해야 하는. (…)

내 글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바래요. 멋지게 근사하게 훌륭하게 받아들여지길.

아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원해. 내 글은 나, 내 자신이니까.”

 


이 가사처럼 실비아는 글을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하고 삶의 이유를 찾으려 했다. 이는 젠더 규범과 가부장제 아래에서 온전히 스스로로 존재할 수 없었던 실비아의 현실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벨 자(bell jar)’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혐오를 재생산하고 소수자를 배제하는 구조는 개개인에게 ‘벨 자(bell jar)’와 같은 형태로 다가와,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며 그들을 합리화와 무력함의 늪으로 빠뜨린다. 이는 스스로에 대한 정체화만으로는 깨뜨릴 수 없을 만큼 견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이 ‘벨 자(bell jar)’를 제대로 마주하고 이를 깨뜨리기 위해 끊임 없이 두드려온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바뀌어 왔다. 

 

이들은 오롯이 자신 그 자체로서 사회 안에서 살아있기 위해, 또 살아가기 위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어 온 또 다른 ‘실비아’들이기도 하다. 어쩌면 헤아릴 수 없이 멀고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기도, 또 지금 우리 바로 곁에 있기도(그리고 어쩌면 우리 자신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존재만으로도 시공간을 넘어 지금의 우리에게 힘과 온기를 준다.

 

그렇기에 우리를 둘러싼 ‘벨 자(bell jar)’가 너무나 단단하고 춥게 느껴질 때, 시공간을 넘어 연대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힘과 온기가 조금이라도 서로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너의 글이 누군가에게 목도리가 될거야’라는 빅토리아의 대사처럼 말이다.

 

극의 맨 마지막, 극은 첫 장면에서처럼 다시 실비아를 태우고 달리는 기차 안으로 되돌아간다. 이 기차에 올랐던 어린 실비아가 그랬듯, 우리 역시 누군가가 쥐여 준 기차표를 쥐고 삶이라는 기차에 올라탔더라도, 기차 밖으로 우리를 던지는 것이 아닌 기차 안을 바꿀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는 적어도 살아냈다는 사실만으로, 어쩌면 작은 행동과 마음가짐만으로 우리가 있는 기차 안의 풍경을 조금씩 바꾸어 갈 수 있고, 이로 인해 기차 밖의 풍경 역시 조금씩 변화해 갈 것이다.

 

그러니 꼭 살아 주기를, 그래서 변화해 가는 창 밖의 풍경을 꼭 함께 볼 수 있기를.

 

실비아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수많은 '실비아'들과 그들의 목도리를 받아든 우리 모두의 앞에 놓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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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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