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유리종을 깨는 주문 세 가지 -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

빵과 장미 그리고 망치를!
글 입력 2023.03.1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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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실비아가 기차를 탔다. 어디까지 가냐고 묻는 여성에게 “9번째 왕국” 종착지에 간다고 말한다. 낯선 여자가 당부한다. “비상 정차하지 말고 꼭 종착지까지 가야 해.”한 문장을 남겨둔 채, 우리는 실비아 플라스의 기차를 동행한다.

 

그녀는 열심히 시를 쓴다. 유명한 시인이 될 거라는 꿈을 품은 채 뉴욕에서 런던으로 넘어와  캐임브리지 대학교를 다닌다. 당대 유명한 시인 테드와 사랑에 빠진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실비아는 강의하고 집안일을 하고 심지어 아이도 낳아 기른다. 그녀에게는 시를 쓸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그에 비해 남편 테드는 평단에 찬사를 받는 시인으로 승승장구한다. 테드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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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벨자(유리종 모양 용기)에 갇힌다.


실비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인물이 있다. 바로 빅토리아다. 빅토리아는 실비아에게 벨자를 깨는 주문을 하나씩 알려준다.

 

 

 

벨자를 깨는 주문 No.1 “증오해도 돼”


실비아는 버거운 현실을 버텨내면서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을 쉽게 미워하지 못한다. 


7살 때 죽은 아버지는 나의 재능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테드도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이기 때문에 쉽게 사랑에 빠졌다. (두 번째 주문과 연결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손바닥 안에 실비아를 두고 싶어서 그녀의 개성을 죽인다. 시는 정돈되어야 한다며 가스라이팅을 한다. 


그리고 엄마. 여성은 엄마에게 죄책감이 쉽게 느낀다. 실비아 엄마는 아빠 몫까지 채우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왔다. 여성으로 엄마가 누리지 못했던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엄마의 희생 덕분이다. 하지만 나는 엄마처럼 완벽한 엄마, 아내가 될 수 없다. 엄마의 사랑이 나를 만들었지만 나를 가둔다. 엄마를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다. 


아버지와 테드는 가부장제에서 가해자이기 때문에 증오하기 쉽다. 하지만 엄마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기 때문에 증오하기 어렵다. 빅토리아가 실비아에게 건네는 “엄마를 증오해도 돼”라는 말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한다. 


 

 

벨자를 깨는 주문 No.2 “너의 글이, 누군가에게 목도리가 되어줄 거야.”


 

실비아는 글을 쓸 때 가장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녀가 말했듯이 “글은 나의 대체물”, 즉 존재 이유다. 당연히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한테 존재 이유를 확인받고 싶다. 아이들이 엄마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유도, 연인 간에 ‘사랑해’를 말하는 이유도 결국 그 사랑이 나에게 돌아오길 바라는 대가성이다. ‘당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말과 동의어다. 실비아의 사랑은 글을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향했다. 


아버지가 죽고 첫 번째 비상 정차(자살)를 한 이유도 자신의 글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충격으로 짐작된다. 그리도 다시 글을 알아보는 사람, 테드를 만났다. 하지만 결혼하고 실비아만의 글을 빼앗긴다. 글을 계속 쓰지만 테드의 입맛에 맞게 가공해 쓴다. 그녀에게 글을 뺏긴 삶은 죽음이다.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사람이다. 인정보다 질책을 자주 듣는다. 실비아는 외도한 테드가 집 나갔다. 글을 인정해주는 두 사람(아버지, 테드)가 모두 떠났다. 


실비아는 인정 대상을 세상으로 바꾼다. 혼자 열심히 아이를 키우고 다시 시를 쓴다. 세상은 실비아의 솔직하고 과감한 글을 담기에 그릇이 너무 작았다. 평론가를 만나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말에 이렇게 답한다. “내가 필요한 건 도움이 아니었어요. 그냥, 확인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녀의 글을 결국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세상에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 사랑에 실패한 실비아는 결국 비상 정차를 선택한다. 


현실 속 실비아의 삶은 여기서 멈추지만, 뮤지컬 속 실비아의 삶은 그녀의 친구 빅토리아가 등장한다. 빅토리아는 그녀의 비상 정차를 만류하며 말한다. “너의 글이, 누군가에게 목도리가 되어줄 거야.” 


되어줄 거야. 현재형 ‘된다’가 아니다. 즉, 현재의 세상은 아니다. 미래의 세상에 있다. 언젠가 그녀의 사랑을 알아채는 사람이 있다. 바로 빅토리아다. 기차에서 꼭 종착역까지 가라고 목도리를 뜨며 말한 사람도, 실비아의 유일한 소설 <벨자>에 쓴 가명도 빅토리아다. 빅토리아는 미래의 실비아였다. 


실비아의 구원 서사는 자신만 가능하다. 실비아에게 필요한 사랑, 쏠모의 인정은 자신이 만든 목도리를 자신에게 건네주어야만 한다. 미래의 실비아(빅토리아)가 현재의 실비아를 살리기 위해 기차로 영원히 회귀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9번째 왕국에 도착할 테니까. 그때까지 빅토리아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벨자를 깨는 주문 No.3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자”

 

그녀 앞에 놓인 두 개의 계단, “하나는 밝게 불을 켠 넓은 계단 다른 하나는 어두컴컴한 좁은 계단” 중에 어두운 계단을 선택해 올라간다. 어두운 계단 끝에 빛이 있지 않을까, 언젠가 그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빛의 실제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 계단 끝에 빛이 없어도 괜찮다. 대신 계단 끝까지 걸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을 알 수 있다. 빛이 있을 거라는 믿음, 희망이 실비아에게 필요하다. 현실 속 실비아 플리스는 ‘비상정차(자살)’를 선택했지만, 뮤지컬 속 실비아 플라스는 영원회귀 속에서 살아내 언젠가 9번째 왕국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실비아가 오른 계단 옆 그리고 뒤에는 많은 여성이 함께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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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실비아, 살다>를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본 건 (과장하지만 진심으로) 운명이다. 빵과 장미를 선물하는 날에 모든 여성에게 망치를 함께 주고 싶다. 유리종을 깨고 나와 당당하게 어둠의 계단을 선택하길. 그리고 끝에 빛이 있는지 9번째 왕국까지 함께 걸어가 보자.

 

만약 실비아가 벨자 안에 숨어있으면 빅토리아와 함께 내가 망치 들고 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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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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