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찬란한 햇살이 아닌 은밀한 햇볕을 받아들이기까지 [영화]

<밀양>이 말하는 위로의 문법
글 입력 2023.03.13 16:0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누구든 목놓아 울고 싶은 순간이 한 번쯤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하기도, 누군가는 자신과 함께 울어줄 사람을 찾기도, 누군가는 자신을 보듬어줄 단단한 사람을 찾기도 한다. 어느 쪽이 가장 효과적인 방식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그 대상이 된 사람과 그 주체가 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지독할 정도로 불쌍한 처지에 놓인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이 ‘위로’의 다양한 형태를 그려낸다. 이창동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관객이 직접 해석해내야 할 이야기의 공백이 많은 편이다. 그렇기에 끊어 놓고 보면 자칫 단편적이고 일방적으로 보일 수 있는 메시지들은,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 서로 얽히고 맞물리면서 관객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크기변환][포맷변환]common (1).jpg

 

 

영화는 남편을 잃은 여자 ‘신애(전도연 분)’가 생전에 남편이 오고 싶어했던 밀양으로 오면서 시작된다. 오던 중 차가 고장난 신애는 자동차 수리공인 ‘종찬(송강호 분)’에게 도움을 받게 되는데, 이때부터 종찬은 신애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한편 신애는 작은 도시 밀양에서 ‘서울에서 온 돈 많은 피아노 선생’으로 소문이 나게 되고, 신애는 이런 시선을 딱히 의식하지 않고 밀양의 사람들과 최대한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뿐인 아들인 ‘준’이 납치되고, 곧 동네 저수지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범인은 준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으로, 신애가 부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뜯어내려 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여느 범죄 영화처럼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데 긴 시간을 쏟지 않는다. 이 영화가 카메라를 통해 응시하는 건, 세상에 홀로 남겨져 고통에 몸부림치던 신애가 마주하게 되는 서로 다른 형태의 위로들이다.

 

 

 

큰, 그러나 너무 컸던 ‘신’이 건넨 위로


 

아들의 사망 신고를 하러 갔다가 북받치는 마음에 사무소를 뛰쳐나온 신애는, 바로 앞의 교회에서 진행되는 기도회를 보게 된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 사실 앞서 신애는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 바 있다. 초반부에 영화는 신애의 시선을 빌려,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듯한 말을 하는 기독교인 약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이 죽기 전에도, 아들이 죽은 후에도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던 사람. 사전에 이 기도회의 존재를 알려준 것도 그 약사였고, 갈 곳 없던 신애는 일단 기도회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음을 만지시는 하나님. 우리를 고통 속에서 일으켜주시는 하나님.” 아마 신애는 그 말에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아들이 죽은 후 그녀에겐 그녀의 마음을 만져줄 가족도, 그녀를 고통 속에서 일으켜줄 이웃도 없었으므로. 작은 도시 속의 이방인이었던 신애가 기댈 곳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위로를 건네는 하나님뿐이었다.

 

흔히 사람이 종교에 귀의하는 때는 가장 힘든 때라고들 한다. 신애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이라도 자신의 편이라고 믿어야,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곪아터질 것 같은 상처로 고통받을 때 의사가 없다면, 일단 반창고라도 붙이고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완전한 개신교인으로 거듭나, 신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고 굳게 믿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쫓아 기도회까지 따라온 종찬에게, 신이 지켜보고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며 몰아세우기도 한다. 열렬한 신자가 된 신애는,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결심마저 하게 된다. 그 유명한 “원수도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범인을 만나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신애. 그런데 범인에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크기변환][포맷변환]img.jpg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애의 시각에서, 너무나도 자비로운 하나님은 범인까지 용서해 버린 것이었다. 피해의 당사자인 자신이 용서할 기회는 어디에도 남겨두지 않고. 크게 충격받은 신애는 그만 실신하고 만다.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신의 잘못일까? 범인의 잘못일까? 범인은 정말 신을 만나기는 한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마지막까지도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신애에게 좌절감을 안긴 건 ‘누구에게나 사랑과 용서를 베풀 법한’ 신의 특성이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교도소에서 사회와 단절된 범인조차 만날 수 있었던 게 신이었고, 그런 신에게서 범인은 너무나도 쉽게 마음의 위안을 찾아 버렸기 때문이다.

 

설령 기독교의 교리에 ‘신은 그런 용서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이 적혀 있더라도, 이미 스스로 구원을 찾아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범인에게 신애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셀프 구원’은 그렇게나 잔인했다.

 

 

 

당사자가 없는 신자들의 위로


 

신애는 이때부터 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고, 자신과 함께하던 신자들과의 관계도 모조리 끊어 버린다. 모든 일에 뜻이 있다는 신이 신애에게 한 일이라곤 남편을 빼앗는 것, 아들을 빼앗는 건, 원수를 용서한 것밖에 없었다. 길거리의 기도회 소리조차도 듣기 싫었던 신애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노래를 틀고 도주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신애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나중에는 신애 혼자를 위한 기도회를 열기도 한다. 그런 신자들에게, 신애는 그만하라며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진다. 하지만 신자들을 끄떡없다. 하나님에게 그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묻고, 그녀의 영혼을 치유할 방법을 묻는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계속해서 자신들의 시간과 마음을 쓴다.

 

 

[크기변환][포맷변환]common (3).jpg

 

 

신애의 관점에서 신자들은 무척이나 얄미운 존재다. 이미 신을 믿지 않게 된 자신에게 마땅한 해결책 하나 제공해 주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문장의 첫마디에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호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애에게 신자들의 위로란 ‘당사자가 빠진 위로’다. 신자들이 자신들끼리 하는 기도회는 신애에게 닿을 길이 없다. 설령 신이 정말 존재하고, 그들이 한 기도가 신에게 닿아 신이 정말 신애에게 무언가를 베푼다고 해도, 신애는 결코 그것을 신이 해준 일이라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의 시선에서 신자를 바라보자. 정말 그들을 나쁜 존재라고 손가락질해야 하는가? 물론 ‘당사자 없는 위로’를 하는 게 위로의 대상에게는 얄미운 일일 수 있겠으나, 그것도 신자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문법’이었다. 그들은 평생 그렇게 함으로써 남들에게 사랑과 기적을 베풀 수 있다고 믿어온 거다. 남들에겐 와닿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방식 안에서 최선을 다해 누군가를 보듬고 위로하려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대답을 바라지 않는 종찬의 위로


 

지금껏 거의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한 명이 더 있다. 송강호가 맡은 종찬이다. 종찬은 2시간이 넘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신애를 쫓아다니며, 그녀가 힘들어하는 순간마다 곁에 붙어 있는다. 독특한 점은 그럼에도 신애와 종찬 사이에 ‘러브라인’이라 할 만한 기류는 전혀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종찬의 사랑은, 지나칠 정도로 일방적인 구애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 종찬을 보며, 관객들은 의문을 느낄 수 있다. “저 캐릭터는 왜 계속 나올까?” 신애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종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이 영화가 사랑을 말하는 영화였다면, 종찬은 정말 의미 없는 배역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랑이 아닌 ‘위로’를 말하는 영화다. 그 점에서, 종찬의 의미는 이 영화에 나오는 그 어떤 캐릭터들보다도 중요해진다. ‘곁에 있어주는 것’.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림자처럼 곁을 지켜주겠다고,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는 것. 그것이 종찬의 역할이자 종찬만이 할 수 있는 위로였다.

 

 

[크기변환][포맷변환]common (2).jpg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신애를 위해 거울을 들어주는 종찬의 모습을 보여주다 서서히 마당에 든 볕으로 시선을 옮긴다. 종찬이 바로 밀양(密陽)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찬란한 햇살처럼 내리쬐는 선한 말들보다 은밀한 햇볕처럼 조용한 위로가 더 효과적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저마다 위로의 문법이 다르더라도


 

이 영화는 ‘기독교 비판 영화’로 오인받기 쉽다. 주인공인 신애가 기독교를 혐오하게 되기도 하고, 신애의 마음에 와닿는 위로를 해내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그렇게 ‘퉁쳐’ 버리는 건 너무 단순한 발상인 듯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신과 기독교인들의 위로는, 신애가 아닌 누군가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위로로 다가갈 수 있는 것들, 즉 사랑이 담긴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위로에 실패한 자는 모두 나쁘다’가 아니다. 외려, ‘나와 다른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가’이다.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의 길을 살아온 이를 공감하고 위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 성심성의껏 해준 위로 역시 누군가에겐 상처이자 멋모르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그 사람이 고통을 깨고 나오길 진심으로 바란다면, 우리는 그 사람 곁을 서성여야만 한다.

 

위로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그가 스스로 고통을 이겨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니 정말로 중요한 건, 위로의 방식이라기보다도 ‘끈기’라고 하겠다. 영화는 끝내 종찬에게 마음을 여는 신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 종찬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을 신애의 모습을 상상한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종찬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애가 세워둔 마음의 벽을 넘으려 시도할 테고, 그러다 언젠가는 조금 낮아진 벽을 발견하고야 말 테니까. 마음의 문은, 언제나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법이니까.

 

 

 

에디터 태그.jpg

 

 

[강민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