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소리 사이의 공백을 음미하는 시간 - 한일 재즈교류 프로젝트 'East Meets East'

글 입력 2023.03.06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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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채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비우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추상조각의 대가 최만린이 한평생 관념을 정제해 비움을 추구하는 길을 걸었듯이, 공백으로 예술적 성취를 이루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수행을 필요로 한다. 깨끗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것에서 멈추면 조급한 의욕에 그칠 뿐이지만, 비워내는 과정 끝에는 균형의 여운이 남는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를 끝까지 소급하면 소리와 공백이 남고, 결국 그것을 조절하는 것이 음악의 동작법일 테니 말이다.


지난 2월 26일 접하게 된 공연 ‘East meets East’는 그러한 여백의 미학을 되새겨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정형화된 재즈의 이미지가 뒤집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막연하게 재즈의 매력인 밀고 당기는 리듬감의 정수는 스윙재즈라고 여겼는데, 이번 공연에서 접한 재즈는 어딘가 색달랐다. 재즈 연주의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쉴틈없이 몰아치는 화려한 즉흥연주 없이도 소리와 공백의 조율을 입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 소개글에 의하면, 이번 무대가 ‘동양적 서정성’이 스며든 재즈를 선보이는 자리인 덕이었을까. ‘East meets East’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번 공연은 아시아 재즈 아티스트들 간의 협업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색소포니스트 손성제와 드러머 신야 후쿠모리를  주축으로 재즈피아니스트 송영주와 베이시스트 토루 니시지마가 합류했다. 지난 2월 24일부터 3일간 도쿄 케야키홀과 세종 재즈인랩을 거쳐 서울 JCC 아트센터에서 마지막 공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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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이 들려줄 동양의 정서로 소화한 재즈란 과연 무엇일까. 사실 재즈의 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출발은 지극히 서구적인 맥락에 기인한다. 재즈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뮤지션들이 유럽 밴드의 형식을 그들의 감각대로 체화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세계로 뻗어나간 재즈는 여러 갈래로 변주되어 왔고, 오늘날의 재즈는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장르가 됐다. 그래서인지 이번 공연의 내용 또한 쉬이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대가 끝나자 포스터에 적혀있었던 문구가 바로 공연 전반을 관통하는 수식어였음을 깨달았다. “고요한 재즈의 물결 위로 반짝이는 공명”. 색소폰과 피아노, 드럼에 콘트라베이스까지 함께했지만 ‘고요한 재즈’라는 설명답게 특정 악기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은 흔치 않았던, 그래서 더욱 특별했던 시간이었다. 피아노와 색소폰은 곡의 선율을 이끌면서도 세심하게 완급을 조절했고, 그랬기에 베이스와 드럼의 역할 역시 함께 돋보였다. 덕분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곡의 디테일을 책임지는 작은 소리들에 매료될 수 있었다.


신야 후쿠모리의 연주에서는 재즈 드럼 특유의 은근하고 차분한 박자감, 그리고 심벌을 브러쉬로 간질이듯 연주할 때 들리는 모래알 같은 소리들이 귀를 사로잡았다. 다양한 악기와 도구를 거쳐 탄생하는 드럼만의 입체적인 사운드가 매 순간 풍성함을 더했다. 연주를 감상하면서 ‘재즈다운’ 분위기가 짙어진다고 느꼈던 시점은 대부분 드럼 연주가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토루 니시지마의 콘트라베이스 연주는 이번 공연 전반에서 감돌았던 공백의 기운 속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저음역대의 깊은 울림이 연주의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라이브 공연을 통해 연주자의 손놀림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녹음된 음원을 들을 때와는 달리 베이스의 존재감을 느끼기 쉬웠다는 부분이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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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Unsplash, Dolo Iglesias

  

 

손성제의 색소폰 연주는 마치 목소리를 담고 있는 듯했다. 그의 연주는 관악기야말로 연주자의 생명력을 분출하는 악기임을 체감하게 했다. 소리의 생성에 직결되는 연주자의 호흡, 그리고 호흡에 묻어들어간 세세한 감정이 악기로 표출되는 순간이었다. 공기감이 섞여 약간 투박하면서도 중후하고 묵직한 색소폰의 음색에 오롯이 빠져들 수 있었다.


반면 송영주의 피아노 연주는 잔잔한 물결을 연상시켰다. 투명하고 맑은 피아노의 음색이 유려하게 합주에 녹아들었다. 여러 옥타브를 극적으로 넘나들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담담하고도 진심 어린 고백처럼 느껴졌다. 그는 관객들 앞에서 화려한 스킬을 보여드려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내려놓느라 애를 썼다고 말했지만, 멘트가 무색하게 절제된 선율 안에서 응축된 감정을 십분 느낄 수 있었다.

 

프로그램 곡 중 이번 프로젝트의 정체성이 가장 잘 묻어난 곡은 공연의 첫 번째 순서였던 신야 후쿠모리의 ‘Hoshi Meguri No Uta’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장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하다면, 비록 이번 콰르텟의 연주는 아니지만 신야 후쿠모리 트리오의 음원을 감상해보길 적극 권한다.  20세기 초에 활동한 일본의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동요를 편곡한 곡으로, 명상적인 선율이 잡념을 가라앉히고 복잡한 마음을 맑게 정화해주는 듯하다.


이처럼 ‘East Meets East’는 재즈가 열기로 관객과 하나되기도 하지만, 절제미로 관객의 귀를 사로잡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손성제와 신야 후쿠모리가 비슷한 시점에 음반을 내면서 접점이 된 재즈 레이블 명가 ECM의 모토 역시 이번 공연과 맥을 같이한다. "The Most Beautiful Sound Next To Silence(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연주자들이 창조해내는 소리 사이에서 침묵을 즐기는 것은 온전히 듣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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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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