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 시점에서 장애인권, 장애학

내가 장애학을 공부하려는 이유
글 입력 2023.02.19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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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 글들은 누구에게는 정보성의 띠거나 누구에게는 에세이 정도로 읽힐 수 있는 이야기들이지만 무엇보다 나에게는 나이기를 다짐하기 위한 글들이다. 여건만 된다면 나는 내가 세상을 견지하는 태도가 어떤 상황에서든 한결같고 굳건하길바라고, 어느 순간부터 그렇지 않게 되더라도 이 글들이 내가 이전보다 더 유연한 관성력을 갖추는데 밑바탕이 되는 조각보가 되길 바란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느낀 여러 가지가 어떤 문단에서는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문단에서는 불필요한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이 정제되었다고 느낀 그 순간마다 감상과 생각들을 기록할 예정이다.

 

 

비장애인 시점에서의 장애학


비장애인 시점에서 장애인권을 공부한다는건 사실 조금 까다로운 입장처럼 보일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랬다. 누군가는 연민이나 당위성에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혹은 주변에 내 가족이나 지인이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후자의 경우엔 장애학은 공부하기 위한 학문의 범위가 아니다. 그들에겐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또한 비장애인 입장에 위치해 있어 비슷한 고민을 공유한다.

 


당사자주의 껍데기 벗기기


초반엔 당사자주의에 여러 번 굴레에 빠지고 괴로워 했다. 그들만이 느낄 수 있는 아픔, 내가 함부로 말을 했다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이런 고민 들이 몇 주 동안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사실 장애를 '공부'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아주 크고 수치스러운 패널티를 가져다주었는데, 그 수치의 원천은 내가 그들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간접적이거나 단시간 동안 장애체험을 할 수야 있지만 실제로는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장애인이 몇 년 동안 겪었을 단절과 외로움을 이런 단시간 만에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만일 내가 어느 시점이 되어 신체의 손상을 입고 장애인이 되었을 때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웃기도록 현학적일까 조금 소름이 끼쳤다. 만약 내가 장애인이 된다면 이런 '공부'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몇 달간은 내가 처한 모든 상황에 불만을 품고 부당함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까. 왜냐면 이제부턴 공부하지 않아도 들이닥치는 일들 뿐이니 최대한 나의 영역을 지키고 고수하려들것이다.


누군가에겐 생존의 영역이고 누군가에겐 학문적이고 거리가 먼 영역일 수 있다. 장애와 비장애인 외에도 인권학의 대부분은 이런 구도다. 분석하는 외부자와 당사자. 이런 간극을 녹이거나 좁힐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그저 비장애인'이라는 제 3자로서 장애인권을 보필하고 도와주는 존재에서 그쳐야 할까.

 

 

당사자주의에 숨어있는 이분법 파헤치기


예컨대 이전부터 장애인권 속 당사자주의 논의는 계속되어왔다. 특히 제 3자의 개입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제 3자는 알다시피 비장애인을 일컫는다.


이때, 1998년, 토요타 마사히로는 <당사자 환상론 : 혹은 마이너리티 운동에 있어 공동환상의 논리>라 는 기고문에서 당사자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 그는 '당사자주의'가 소수자 운동에서 문제의 본질 을 가리는 공동환상의 논리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당사자주의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체성의 정치에 기초한다. 요컨대 비장애인과는 다른, 장애인 이라는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이들만이 장애 문제를 가장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장애 문제의 주체 라는 것이다.... (중략)"


당사자주의의 껍데기를 벗기면 '민족주의' 배타적  권위주의''당사자에 의한, 당사자를 위한, 당사자들 의 권익옹호'라는키워드가 붙기도 한다. 장애인권 은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 관계의 문제'라는 점에서 당사자주의의 한계점이 드 러나게 된다. 이외에도 장애학의 도전에서는 장애인 권에서의 당사자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횡단의 정치 : 뿌리내리기, 옮기기


이런 당사자주의의 한계점이 드러남과 동시에 장애 학에서는 '횡단의 정치'를 제시하는데, "횡단의 정치 란 공통의 주제나문제 앞에서 대화적 방법을 통해 함께 모인 주체들이 이익과 열망을 아우를 수 있는 합의점을 찾아내는 정치이다. 모든 정체성은 자치와 교차하며 구성되기 때문에 횡단의 정치는 여성운동이나 장애인운동 같은 모든 소수자 대중운동 자체를연합의 정치의 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요컨대 횡단의 정치에서는 연합의 경계들이 '메신저'보다는 메시지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목이다.


"횡단의 정치에서는 위치의 고정성보다는 대화가 영향력 있는 지식의 기초가 되는데, 이는 어떤 위치에 있는 주체도 기본적으로 부분적이고 상황적인 경 험-앎을 지닌다는 것, 그들의 경험-앎에 일정한 공 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대화 참여자들은 각기 자신의 멤버십 및 정체성에 뿌리내리기를 하지만 동시에 다른 정체성을 지닌 주체들과의 교류 및 공감을 위해 '옮기기'를 시도한 다. 이와 같은 형식의 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횡단주의'다. 이렇듯 횡단의 정치는 당사자주의를 전 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그 한계를 유효하 게 비판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가될 수 있다."

 

 

정답은 연립이라는 단어에 있다


우리는 각기 다른 환경에 놓여 여러 가지 선택을 해 왔고 여러 번의 선택과 선택당함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 와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다르다. 횡단 주의는 우리가 놓여있는 위치와 상태보다는 각기 다른 개인들의 상호작용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이것은 다른 단어로 '연립'이다.


이것은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차별하여 공통점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서로의 다름과 차별점을 인정하고 그 사람보다대화의 오고 감, 상호작용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주의이다. 횡단의 정치 대목을 읽었 을 때 지금껏 고민하고 망설여왔던 일부분이 어느 정도 해소됨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장애 인-장애인으로 나눔 짓는 이분법적인 틀에서도 일부분 해방될 수 있었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란 단어는 신체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명사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 작용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신체적으론 다르게 명시될 수 있으나, 언제든 연립과 횡단주의의 관점에서 서로의 메시지의 교환을 통해 서로가 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는 권리나 자격은 언제든지 충분했기에.


장애인권은 어쩌면 나에겐 학문적인 특성을 더 강하게 띠고 있다. 내가 관련 영상을 보거나 책을 읽지 않는다면 지금으로선 계속 나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장애학의 공부는 실용과 실천을 위해 존재한다. 내 방식대로의 사회적 실현을 위해 학문을 공부 하는 것이고, 결국은 내가 장애인권과 장애학을 알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너와 나 사이의 연립점을 찾아간다. 그리고 언제든 나는 그들이 될 수 있고 그들은 한 번도 우리가 아니었던 적이없다. 언제든 같은 메시지를 교환할 서로 존재이다. 모든 건 실현이 우리 눈 앞에 찾아올 그 날을 위해서다.

 

 

[김성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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