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름날》 속 할머니의 보청기

영화 《여름날》 단평
글 입력 2023.02.19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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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가 할머니에게 보청기가 어디 갔는지 묻는 장면이 있다. 그러자 할머니는 ‘창고’라는 대답을 내놓는데 정작 창고에는 언제 마지막으로 사용했는지조차 모르겠는 낡은 낚싯대와 통발뿐 보청기는 없는 것 같다. 삼촌의 얘기를 들어보니 보청기는 창고가 아니라 옷장 서랍에 있을 거라고 하니 단지 할머니가 잘못 말한 건가 보다 싶은데 그때 내 머릿속에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가 금세 심상하게 가라앉기도 했다. 혹시나 할머니의 노쇠한 청력이 보청기에서 ‘보’라는 음절을 탈락시키고 ‘청기’를 ‘창고’로 잘못들은 건 아닐까 하는. 물론 이에 대해 네 말대로라면 할머니가 끝 음을 올려 “창고?”라고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저 언젠가 비슷한 내용의 대사를 시나리오에 쓴 적이 있고 그런 하찮은 유머를 (유머라고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나는 웃긴) 오히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여름날을 찍은 감독이라서 관객들 몰래 담아내고자 한 것이 아닐까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대가 반영된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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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름날》 스틸컷

 

 

하지만 이런 추리에 가까운 해석이라도 붙들고 이 영화를 조금 더 마주하고 있으면 앞서 말한 무언가의 탈락이 일정 부분은 이 영화를 견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반 관객들이 영화에, 특히 장편이라는 형식을 가진 영화에 기대하는 수많은 요소가 여름날에서는 탈락되어 있다는 사실에 아마 이견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승희는 다른 영화 속 인물들과는 달리 목적의식이나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서울 생활을 언제든 다시 올라가도 무리가 없을 만큼만 정리한 승희가 거제도에 내려와 하는 일과라고는 선풍기를 틀어 놓은 채 낮잠을 자는 게 고작이며, 우연히 결정한 낚시터에서마저 서투른 탓에 그저 밀려오는 파도 아래에서 무엇인가가 자신의 의도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건져 올려지기를 기다질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연치않게 형성된 것이 바로 거제 청년과의 새로운 만남이지만 마찬가지로 별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드물게 언제 서울로 올라갈 것이며 왜 올라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고민이 아른거리기도 하지만 그녀는 대체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고민을 낳지 않으며 예감과 기대가 섞인 질문에는 계획이 없다라는 답변만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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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름날》 스틸컷

 

 

그러나 탈락하는 것이 있다면 반대로 탈락하지 않고 잔류하는 무언가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 여름날을 어떤 조건과 자격을 부합해야 하는 합격이라는 말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으니 대신 똑같이 탈락의 반의어지만 느닷없는 행운과 우연을 동반해야 하는 당첨이라는 말로 바꾸어 바라보고자 한다. 특히나 승희가 여느날처럼 낮잠을 자는 와중 그 앞을 지나가던 닭이 똥을 싸는 장면은 그야말로 당첨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하기 힘든, 영화 밖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스크린이라는 수면 위로 건져 올려진, 무언가이다. 물론 수없는 테이크의 반복을 거쳐 해당 장면이 탄생했는지는 알 수 없고 감독이 닭이 똥을 싸는 것까지 예상했을 리는 더욱 만무하다. 그러더라도 우연히 당첨된 이 같은 장면은 나로 하여금 영화 밖의 세계에서 누군가가 이 무료한 여름날과 승희를 찍었을 과정 자체를 상상하게끔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거기엔 어떤 기다림의 작용이 분명히 또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승희가 서투르지만 다시 낚시대를 잡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행위는 단순히 하는 동안만큼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제 청년의 말마따나 현실을 외면하려는 듯 싶다가도 꽤나 용감한 기다림처럼 느껴진다. 승희는커녕 감독조차 이 영화가 무엇을 건져 올릴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최정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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