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하얀 여인 세계의 길 잃은 남자 - 도서 '파도'

글 입력 2023.01.3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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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

 

 

 

1. 탐미적이고 우울한 작가가 만들어낸 두 세계


 

을유문화사에서 새로 낸 '파도'는 카이절링의 '하모니', '파도', '무더운 날들' 세 작품을 하나로 묶은 단편집이다. 카이절링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배경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카이절링은 독일계 지방 귀족의 대가족 중 하나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이후로는 귀족들 사이에서 배척받다 어머니의 영지를 관리하였다. 이후 여러 예술가와 교류하다가 시력을 잃고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는 점차 고립되어갔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탄로 난 뒤에는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지방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간 귀족출신의 작가답게, 그의 작품은 자연 풍경과 귀족의 생활상에 대한 사실적이고 초연한 묘사가 돋보인다. 이번에 리뷰할 '파도'의 세 단편에도 자연 풍경과 귀족의 생활상이 대립된 존재로서 생생하게 묘사된다. 일반적으로 자연은 붉은색, 젊음, 원시성, 열정, 육체적이고 비문명적인 역동성을 품은 곳으로 묘사되며, 귀족은 하얀색, 나이듬, 이성, 비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문명으로 묘사된다. 카이절링의 작품은 이러한 '자연성'과 '귀족성'을 여성 캐릭터에 반영하고, 두 가지 속성을 가진 여성 캐릭터의 갈등과 특정 유형의 여성들을 사랑하는 남성 캐릭터를 통해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을 내세운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카이절링이 대등해 보이는 두 요소간 갈등에 대해 그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카이절링의 세 단편 소설은 평민적이고 육체적인 붉은 여인의 세계보다 귀족적이고 정신적인 하얀 여인의 세계가 작가에게 더 큰 매혹으로 묘사되었던 것 같다. 예를들어 '파도'에서 등장하는 밀라와 안네마리는 육체적인 평민 여성과 정신적인 귀족 여성이라는 점에서 각각 붉은 여인과 하얀 여인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은 하얀 여인을 사랑하고, 또 동경하면서도 열정적인 삶을 포기하지 못해 여행을 떠나거나 밀라와 불륜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는 '붉은 여인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는다.전체적인 묘사를 살펴보면, 밀라에 대한 묘사는 턱없이 적을뿐만 아니라 주인공은 하얀 여인인 안네마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압도되어있다. 그는 밀라와의 밀회를 저버리고 우아한 모습으로 자살한 안네마리를 건져 올리면서 절망에 빠진다. 하얀여인에 대한 특별한 초점은 '하모니' 뿐만 아니라 '파도', '무더운 날들'에서도 반복된다.

 

'파도'의 주인공인 도랄리체는 붉은 여인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얀 여인으로 태어나 하얀 여인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중간지점에서 머무는 여인이며, '무더운 날들'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붉은 여인의 세계를 맛보고 경험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하얀세계로 돌아와 그 틀안에서 절망감과 슬픔을 느끼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2. 하얀 여인 세계의 길 잃은 남자


 

책을 읽는 내내, 왜 카이절링이 이런 소설들을 써야 했는가에 대해 고민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소설에서 묘사된 '하얀 여인의 쇠락'이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붉은 여인의 세계'를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한 그가 어째서 '하얀 여인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그것이 왜 매료되고 휘둘려지는 '남성'과 그들을 파멸로 이끌 뿐만 아니라 스스로 파멸하는'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길, 나는 남성작가의 여성상에 대해 고찰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카이절링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여인'들은 작가의 성적 판타지가 아니라 어떤 통합을 향한 욕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에 단서를 제공했던 것은 '하얀여인'에 대한 묘사다. 소설 중 '하모니'의 안네마리가 하얀여인의 특성을 절실히 보여준다. 안네마리는 하얗고 아름다운 귀족적인 여성으로, 탐미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그녀는 고전 속 신의 사랑을 받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되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귀족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고귀한 핏줄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포기한 삼촌과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사이지만, 그와의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삼촌과 결별한 이후 우아한 모습으로 목숨을 끊는다. 소설에서 드러난 하얀 여인의 세계는 아름답고 부유하지만 생명력 없고 비관적인, 아니 허무주의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무더운 날들'의 묘사에 따르면 이들은 장식장에 놓인 '귀족 문화의 꽃'인 사기인형처럼 묘사된다.

 

이런 하얀 여성의 세계를 욕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소설속 남성들은 이 매력적인 여성들에게 매료되고, 다시 연결되기 위해 몸부림친다. 하지만 이 중 사랑에 진정으로 성공한 자가 없다는 점에서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소설 속 등장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 강렬하게 원하는 혼합과 회복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반대로 말하자면, 작가가 당시에 가장 회복하길 바랬던 그 안의 여성상들이 바로 이 하얀 여인들, 혹은 붉은 여인의 모습을 갖춘 하얀 여인들이었던 것 같다.

 

카이절링은 당대 남성으로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쉽게 해결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카이절링은 학교에 진학하고, 이름을 알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했다. 귀족이었던 그는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것에 열중했지만, 결국 고독한 삶을 살았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감각과 미세한 정서적 흐름은 놀라울 정도다. 그런 그가 '남성성'과 '여성성'에 몰입한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여성들은 아름답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연약하고 사랑받는 존재다. 이런 부분이 카이절링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왜 그가 하얀 여성을 쫓고 얻지못하는 남성들을 그려냈는지 이해가 간다. 그는 결국 '파도'의 연약한 소년, '무더운 날들'의 하얗고 부드러운 손을 가진 남자주인공을 닮았다.

 

개인적인 추측을 떠나서, 카이절링이 살았던 시대는 계몽주의 문학이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귀족인 카이절링에게는 안과 밖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파도'의 도랄리체는 이러한 혼란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도랄리체는 울타리 밖 사건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붉은 여인이지만, 동시에 귀족적 삶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는 하얀 여인이다. 그는 늙은 백작을 떠나 젊은 화가와 사랑의 도피를 하지만, 그녀가 도착한 파도치는 곳은 평민의 생활터이자 귀족들의 휴양소로 묘사된다.

 

파도의 한쪽에는 무덤이 쓸려나가 시체가 둥둥 떠다닌다. 파도에 휩쓸리는 뼈들은 삶과 죽음의 모호함을 암시하면서도 천천히 물에 쓸려 쇠락해가는 귀족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 같다. 결국 도랄리체는 바다에 의해 한스를 잃고 귀족이면서 귀족세계에 속하지 못한 추한 곱추인 크노펠리스와 함께 파도 근처를 배회한다. 파도가 그들을 놓아줄때까지.

 

 

 

3. 나가며


 

카이절링의 '파도'는 당대 시대의 갈등을 간접적이고 아름답고 복잡한 비유로 완성해낸 멋진 작품이다. 파도에 대한 묘사와 캐릭터들의 물 흐르는듯한 행동들은 일견 단순해보이지만 복잡한 상징으로 가득차있다. 개인적으로 파도의 무덤 부분과 '울타리 밖' 사건을 기대하는 도랄리체가 처음 한스를 만났을때처럼 향수를 뿌리고 드레스를 입은 다음 기다리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캐릭터들을 조소 없이 읽는 것이 어려웠다. 이는 주로 소설 내내 드러나는 귀족들의 자기파멸적인 유미주의적 삶의 묘사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에 대해 단호하게 거절하고 자아도취적인 종말을 원하는 귀족 캐릭터들은 내 안의 혁명 DNA를 집요하게 건들였다. 하얀 모슬린 잠옷을 입고 아름다운 연못에서 노래를 부르며 라일락 꽃을 손에 쥐고 자살하는 장면에서는 사실 화까지 났다.

 

카이절링이 이러한 삶의 형태를 긍정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서는 어떤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과 융합되고자 하였다. 소설에는 어떤 교훈보다 사랑에 대한 절실함이 강박적으로 박혀있었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이상한 분노도 가라앉고,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하얀 여인에 집착했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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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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