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we're aliens somewhere - 노매드랜드 1편 [영화]

우리는 어디선가 이방인이다
글 입력 2022.12.30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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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e aliens somewhere”

 

오늘날의 현대인들에 대한 설명으로 더없이 적절한 말이다. ‘alien’은 이방인 혹은 외계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에 완전히 상반되어 보이지만, 서로를 부연할 수 있는 보충재와 다름없다. 그 예로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스팅의 < Englishman in New York > 중 “I’m an alien. I’m a legal alien.”을 살펴볼 수 있다. 영국인의 신분으로 타지인 미국에 와서 생활하는 그는 미국인들에게 낯선 존재인 이방인이다. 두 발을 미국의 땅에 붙이고 있지만 원주민과 다른 외형, 문화, 관념을 가진 바깥의 세계에서 온 외계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선가 이방인-외계인-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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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의 핵심 주제이자 주인공인 “Nomad”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각양각색의 사연을 품고 집을 떠나 이동하는 삶을 살아간다. 베트남 전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앓아 소음이 가득한 도시에서 생활할 수 없는 노인,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통해 카르페 디엠의 삶을 즐기고자 노마드 생활을 선택한 여인들, 5년 전 자살한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며 길 위의 사람들을 돕는 밥 그리고 데이브와 린다, 스왱키까지. 이들은 서로에게 이방인이지만 길 위의 노마드족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러나 이들의 노마드 삶이 과연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따라붙으며 사회∙정치∙경제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다. 펀은 2008년 경제위기를 겪으며 남편과 일자리를 잃고 몰락해가는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자본과 노동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하자 가차 없이 외부로 내몰렸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 부당한 짐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즉, 물질적 진보가 빈곤을 부른 것이다. 전세계적 흐름으로 거부할 수 없는 개인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본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으며 이들의 노동은 또다시 착취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펀은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거주지를 충분히 찾을 수도 있었다. 한때 이웃이었던 이의 손길과 동생의 만류, 데이브의 권유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펀과 연을 맺은 린다, 데이브, 라이터를 건네준 소년에게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펀을 보고 “여행을 실컷 하는 노마드족”이라는 편견 어린 시선을 보낼 수 있으며, 백인 여성이기에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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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펀의 노마드 생활을 여행이라 치부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펀에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가능성만 있었을 뿐이다. 

 

그는 인생의 길 위에서 방황하며 자신을 부정하고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고 있었다. 정착민의 입장에서 노마드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화는 노마드의 라이프 스타일을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반영하여 노마드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확대되지 않게 연출했다. 노마드 삶의 형태는 그 자체로 담론을 형성하며 집의 의미에 대한 사유를 촉발했다.

 

어디선가 이방인-외계인-으로 존재하는 현대인의 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노마드’라는 소재는 자본과 노동, 정체성 담론, 집의 의미를 고찰하게 한다. 이에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과 김애란 작가의 「물속 골리앗」『비행운』을 통해 물질적 진보에 수반하여 발생하는 빈곤의 양태를 살펴보고, 정체성 담론을 이끈 노마드의 형성 과정과 특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자본과 노동



산업사회의 발전은 풍요로운 물질적 조건을 마련하고 이전과 차원이 다른 편의를 제공받는 생활환경을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막연한 희망은 산업 불황과 함께 사라졌으며 노동의 가치는 자본 앞에 무력해졌다. 막대한 자본의 흐름 앞에 노동은 비자발적 실업을 겪고, 축적된 자본은 낭비되며, 국가와 기업들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호받지 못하며 자본주의의 거대한 시장에 휩쓸리는 노동자 계급은 가난의 공포와 불안, 고통에 시달린다.  

 

 

“돈과 시장의 횡포를 용인하고 또 그에 순응합니다. 우린 기꺼이 돈의 멍예에 속박되어 한평생을 살아가죠. 가축의 비유가 생각나네요. 열심히 죽어라 일만 하다가 벌판으로 쫓겨나는 가축. 우리가 그런 신세죠.”

 

 

헨리 조지의 진보가 빈곤을 가져온다는 주장은 극 중 밥 웰스가 RTR(고무 바퀴 유랑자 모임)에서 청중에게 하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현실에 대한 냉소적인 분석에 관람자는 불쾌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하층 계급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칠 때, 자본을 가진 상층 계급은 돈으로 돈을 벌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혜택을 누린다. “사회가 물질적 진보를 가져오는 여러 조건들 속으로 발전해감에 따라 그 사회에 가난과 부작용이 등장”하며 “증가된 생산력의 결과인 생활 조건의 개선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헨리 조지) 

 

자본주의 체제가 다국적 기업의 대량생산과 이윤추구를 위해 전 세계적으로 보급∙확산되면서 사회적 하층민들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의식주를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시장의 고용불안을 이유로 일용직이나 시간제 노동자로 일하며 노마드 생활을 유지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화는 불공평한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지도, 변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도 없이 조용하고 심심한 전개를 이어 가기 때문에 관람자로 하여금 허무주의적인 낭만에 빠지는 것을 막는다. 사회, 정치, 경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위치에서 현실에 대한 회피 혹은 변명일지도 모르는 행위가 정답이 될 수 없으며, 이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 생활에서 낭만을 찾기란 힘들다는 사실을 그대로 내보낸 것이다. 무언가의 개입 없이 유목민을 미화하지 않으며 함부로 다루지 않는 성격에 객관적인 재현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동안의 사회, 정치, 문화가 양산해 온 다큐멘터리의 전통은 객관화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오히려 타자화에 대한 고정 관념을 고착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 속 다른 인종의 부재는 지역의 이동에 있어 자유로울 수 있는 신분을 가진 백인우월주의에 기반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종차별주의자의 시각적∙서사적 병리를 포착한 의견이지만, 영화감독의 다국적 정체성과 다층적인 담론을 인지하지 못한 해석이라 평할 수 있다. 영화 속 비치는 대상에 대한 시각적 판단은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인종적 헤게모니를 역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예속된 지식에 대한 단편적인 의견에 불과하며 단순한 범주에 대한 전제로서 다중의 차이 혹은 맥락을 가져오면 쉽게 무너질 단상이다. 

 

만약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유색인종이었다면 어떤 의견이 나왔겠는가. 사회 최하층 설정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하며 적절한 대처 방안을 요구할 것이다. 이처럼 일차원적이고 파편적인 논의는 인종에 기인하는 해석의 한계를 드러낸다. 영화가 보여주고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은연중에 흘러가는 현실의 문제를 파악하고 사유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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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김애란의 소설 「물속 골리앗」은 각각의 요소에 상징성을 부여했으나 대단히 직접적인 사회 문제를 언급한다. 주택 담보 대출을 갚을 즈음 철거명령을 들은 소년의 아버지는 재개발 반대 집회에 나섰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갑자기 찾아온 낯선 사람들에 의하면 40미터 타워크레인에 올랐다가 실족했다고 한다. 뒤이어 “아버지의 송장이 물대포라도 맞은 양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젖어 있었기” 에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라는 말은 진실을 묵시적으로 전달한다. 집 혹은 집이 포괄하는 사회적 함유를 갖기 위해 20년 동안 신도시의 건설 현장에 나가 아파트를 지었던 아버지의 일생이 시니컬하게 드러나며, 물이 마을을 집어삼켰을 때 출현한 타워크레인은 골리앗의 모습으로 소년 앞에 나타난다. 거대 자본에 의해 삼켜진 노동이 맞이하는 비참한 결말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모여 가장 아래에서부터 차오르며 인간이 이룩한 문명을 파괴하는 스펙터클한 장치는 자연의 본질을 전복시키면서 하나의 배설로 정화작용을 일으킨다. 수세에 휩쓸린 사회에서 앞날을 보장하기 어려운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헨리 조지가 실용적 검증을 통해 파헤친 -진보가 빈곤을 가져오는- 역설적인 현상과 공동체로서 개인 생활의 도덕적 실천에 대한 요청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마을이 떠내려가는 듯한 장마 속에서 한 소년이 겪은 일은 자연을 은유하는 자본의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집을 떠날 수 없어 버티다 자연에 의해 내쫓기게 된 소년과 집을 떠날 수밖에 없어 자연을 유랑하는 펀은 대조적이나 그 본질은 주인공 배경 설정에서 사회문제에서 내몰린 약자라는 점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 2편에서 계속

 

 

[문지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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