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민둥산에서 마주한 두 겹의 자연 [여행]

자연의 양면성에 대한 소고
글 입력 2022.12.0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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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민둥산역으로


 

강원도 정선에 우뚝 선 민둥산은 나무 대신 억새가 뒤덮인 정상부의 독특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매년 억새꽃 축제가 개최될 만큼 아름답지만, 특별히 민둥산을 올라야겠다는 계획하에 정선을 방문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연한 이끌림에서 시작된 이 산행의 기억은,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생생하다.

 

민둥산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꺼내 읽었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18년이 흘러도 잊지 못한다는 한 초원의 풍경을 묘사하며 시작된다. 그런데 그 묘사가 민둥산역에 처음 내렸을 때의 감상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면, 책장의 많은 후보 중 하필 그 책을 골라 기차에 올라탄 것은, 어떤 운명에 의해서라고 밖엔 설명할 길이 없으리라.

 

 

며칠 계속된 부드러운 빗줄기로 여름 내내 덮어썼던 먼지를 깔끔이 씻어 내린 산 능선은 깊고 선명한 파랑을 띠고, 억새꽃을 흔들며 불어 가는 10월의 바람 속에서 길고 가느다란 구름이 파란 하늘에 차갑게 달라붙어 있었다. 가만히 쳐다보노라면 눈이 아릴 만큼 높은 하늘이었다.

 

-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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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 민둥산. 나무가 없어 민둥민둥한 산, 벌거숭이산, 이조차도 고유명사가 되기엔 참 성의 없다 싶었지만 그런 산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기차역이라니. 이름부터 기묘한 그곳은 대개 최종 목적지보다는 다른 역으로 향하는 경유지였다. 민둥산역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린 사람의 수는 나를 포함해 고작 서너 명뿐이었고, 그래서인지, 내려앉은 아침 안개 속 조용한 기차역은 마치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였다.

 

또한 그곳은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 <1Q84>에 등장하는 '고양이 마을'을 연상시켰다. 고양이 마을은 낮에는 사람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괴괴한 마을이지만, 밤에는 주민인 고양이들이 시끌벅적하게 활동하는 미스테리한 공간이다. 어떤 우연한 계기로 고양이 마을에 도착하게 된 인간은, 나가는 열차를 영영 타지 못하고 그곳에 갇혀, 마치 '없는 사람'처럼 모두의 기억으로부터 서서히 잊혀간다. 꽤 소름 끼치는 이야기다.

 

사실 정선으로의 여정은 내게 여행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피였다. 한 번쯤 나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 마치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한. 그러니만큼 민둥산역이 '고양이 마을' 같았다는 감상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맥가이버가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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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을 목적으로 떠난 여정은 아니었으나, 모종의 계기로 산을 오르게 되었다. 혼자 등산하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로, 글자 그대로, '혼자'. 민둥산은 등산 애호가들에게 꽤나 인기 있는 장소지만, 내가 오르던 길은 공식 등산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험심 넘치는 행인들이 지나가면서 밟은 풀이 누워 형성된, 첩첩산중의 비공식적 등산로. 길이 정돈되지 않아 나뭇가지가 들쑥날쑥한 데다가, 가끔은 이정표조차 없었기에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기억을 더듬어야만 했다. 무엇보다 신경 쓰였던 점은,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이라곤 오로지 나 한 명뿐이었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불필요한 마찰에 학을 떼며 정선으로 도피했지만, 정작 인적의 완전한 부재로부터 오는 적막함은 내게 큰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은, 정말 사회적 동물이 맞기는 하는가 보다.

 

"산에서는 맥가이버가 되어야 해. '안되면 어떡하지'가 아니라 되게 만들어야지."


그런데요, 정말 너무 무서울 때는 어떡하죠? 산의 중턱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으면서, 새삼스레 내가 참 겁이 많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등산을 시작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온갖 불안한 상상이 머릿속을 엄습해 왔다. 갑자기 멧돼지가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나는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될까 무서워 황급히 스마트폰 검색창에 '산에서 멧돼지'를 검색했다. 그 결과, '멧돼지보다 빨리 달려 나무 뒤에 숨으면 시력이 나쁜 멧돼지로부터 안전할 수 있습니다' 따위의 도무지 실천하기 어려운 해결책과 점점 짧아지는 이동통신 전파 칸만이, 불안의 북을 마구 두드려 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말로) 저 멀리 들려오는 수렵꾼의 총소리와 동물 몇 마리가 쏜살같이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와, 타이밍 한 번 죽이네.' 제발, 방금 뛰어간 동물이 멧돼지가 아니기만을 바라며, 되돌아가기에 너무 늦어버린 길을 바라보며, 약간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안되면 어떡하지'가 아니라 되게 만들어라. 아주 어릴 때, 부모님과 등산하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하필 비까지 우레처럼 쏟아져 산 중턱에 고립될 뻔했다. 다행히도, 아버지께서 마치 인디아나 존스처럼 날렵하게 나를 업고 탈출에 성공하셨는데, 그 덕에 우리 가족은 그때의 에피소드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도 인디아나 존스도 곁에 없고, 가진 건 유약한 몸뚱이뿐인 내게 설령 무슨 일이 생긴대도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면, 걱정할 시간에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하나, 파괴력과 경외심



돌이켜 보면, 그날 내가 느꼈던 공포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자연에 대한 '무지'와 '예측 불가능성'이었다. 기술이니 문명이니 하는 인공물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설계 망을 벗어나지 않으며, 변수가 발생한다 한들 경험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은 설계는커녕 아직 발견하지도 밝혀내지도 못한 미지의 영역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저 빙산의 일각의 일각의 일각뿐이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튀어나올까 두려워서, 등산 가방보다 무거운 걱정을 한 보따리 껴안아야만 했다. 순간, 광활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정말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런데, 무지무지 무지한 내가 산을 오르며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공포심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러기엔 등산로에서 보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말하자면 '경외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경외심은 경탄에 견줄만하지만 기쁨이 덜한 정서, 단어 그대로 풀이하자면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두려움과 놀라움의 중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늦은 밤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 바닥에 누워서 별 보는 걸 즐기곤 했다. 그러다 한 번은, 아주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다가 지나치게 넓고 깊은 밤하늘이 문득 공포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현듯 찾아온 공포에 당황하여,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벌떡 일어나 앉아야만 했다. 그때의 느낌이 아직까지도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아마 이때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처음으로 실감했던 것 같다.

 

'자연으로 떠난 여행'이라고 하면 으레 평화롭고 따뜻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반면, 내가 겪었던 산행은 (아직은) 그와는 조금 거리가 멀다. 종종 자연은 '힐링'의 맥락에서 해석되는데, 이는 지극히 일면만을 분석한 결과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치유될 뿐, 자연 그 자체가 '힐링'의 동의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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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떠올려 보자. 인간이 거듭해서 자연을 파괴하자, 신은 분노에 휩싸인다. 산의 수호신인 멧돼지 일족은 인간을 공격하며 전쟁을 선포하고, 숲의 현자 '성성이'들은 증오로 인간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감독은 이러한 묘사에서 자연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힐링'이라 일컫는 생명력이라는 일면과, 우리가 두려워하는, 파괴력이라는 자연의 다른 일면을. 모든 신의 수장이자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는 시시가미가 생과 사를 모두 관장하듯이, 자연은 따뜻한 생명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순식간에 삶을 앗아 갈 파괴력까지 지니고 있다. 수많은 인명 파괴를 낳았던 자연재해처럼, 자연은 때때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냉정한 잔인성을 내비친다. 그러므로 깊은 자연으로부터 불현듯 두려움을 느꼈다면 그것은 빙산의 최하단부에 숨겨진 자연의 파괴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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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원령공주>에서는 인간 역시도 이중적인 존재로 표현된다. '에보시'는 제철소를 만들기 위해 숲을 파괴하고 신에게 총구를 겨누었지만, 동시에 그러한 파괴로 얻은 기술력이 소외당하던 나병 환자를 보호하고 성별로 인한 차별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인간 역시 마냥 파괴적인 존재로만 표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에보시의 행보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여겨졌던 나병 환자와 전통 사회 여성이 마을 공동체에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만들었고, 궁극적으로 이들 삶의 생명력을 되찾을 계기를 제공했다고까지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문제의식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 아니다. 니체가 말했듯, '과'라는 접속사를 사용하며 인간을 자연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는 것조차도 오만함의 방증일지 모른다. <원령공주>의 핵심 메시지는, 생명력과 파괴력의 대립으로부터 온다. 인간도, 그리고 자연도, 생명력과 파괴력이라는 양면성을 동일하게 내포하는데, 이 때문에 인간과 자연은 대립 쌍을 이루지 않는다. 오히려, 이 공통의 양면성은 생명력을 통한 '공명'으로써 인간이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음을 확증한다.

 

 


둘, 생명력과 여유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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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행으로 돌아와, 한참을 걷던 중 마침내 사람들이 이용하는 등산로와 합류하면서 잠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정상은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정상부에 끝도 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밭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장관이었다. 사진 속에 담기지 않는 청량함과 싱그러움이 그곳에 있었고, 몸으로나마 그 모든 감각을 흡수하고자 일부러 과장되게 숨을 쉬곤 했다.

 

민둥산 정상에서 나무가 사라지고 수십만 평의 억새밭이 자리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과거 민둥산에 살던 화전민들은 식량으로 쓸 산나물이 많이 자라게 하고자 매년 산에 불을 질렀다. 화재로 인해 땅의 영양소 순환이 빨라지면서 초본식물이 번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나무가 다 타 버리고, 억새가 자라기 시작하며 서서히 억새 군락지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저지른 산불이라는 파괴 행위는 나무를 태워 산을 벌거숭이 상태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산나물과 억새 군락지라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탄생할 수 있게 했다. 민둥산의 이 같은 내력을 들으면서, 어쩌면 생명력과 파괴력은 뫼비우스의 띠로 이어 붙인 종이의 양쪽 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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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돗자리 하나 펴지 않고, 가져간 배낭으로 머리만 받친 채 한참을 누워 있었다. 남 눈치 보지 않고 이렇게나 편하게 누울 수 있다니, 자연이 최고의 휴양지라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주변에는 비박을 위해 텐트를 치거나, 정상에서 인증 사진을 찍는 등산객들도 있었다.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어진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조곤조곤 들려오는 대화 소리와 한여름의 풀벌레 소리를 배경음 삼아, 부드러운 억새풀 내음을 향초 삼아, 누워서 바라본 푸른 하늘은 고등학생 때 목도한 밤하늘의 두려움과는 다른 한적함과 여유로움을 내게 안겨 주었다.

 

 

 

돌아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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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상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지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무지와 그로 인한 두려움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함을 뜻하기에, 나는 다시금 긴장의 끈을 붙잡아야만 했다.

 

하산하는 길은, 예상했던 대로,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야생동물에 대한 두려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현실이 되어 버렸는데,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걷던 내 뒤로 갑자기 고라니 두 마리가 튀어나와 달려나갔기 때문이다. 스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고라니 등의 얼룩무늬가 아주 선명하게 보였을 정도니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데, 자라보다 더한 게 튀어나왔으니 심장이 터질 뻔했대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멧돼지는 아니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내려오는 도중 갈림길에서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땅거미가 지면서 길이 잘 보이지 않아 곤혹스러웠지만, 테세우스가 실뭉치를 늘어뜨리고 미로를 탈출했던 것처럼 왔던 길을 되돌아, 다행히 마침내 안전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산에서 내려올 때 인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치, 한동안 미지에 세계에서 머물다 빠져나온 내게 비로소 현실 세계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듯했다. 긴장했던 몸을 툭 늘어뜨리고, 돌아와서는 밥솥에 따뜻한 감자를 쪘고 선물 같은 휴식을 만끽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날의 산행에서, 자연의 파괴력을 두려워한 무지는 경외심을, 자연의 생명력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광경은 여유로움을 안겨 주었다. 인간은 생각보다 왜소했고 자연은 그리 친절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연의 안락함은 모든 인공으로부터의 스트레스를 이겨낼 만큼의 큰 힘을 북돋아 주었다. 생명력을 통한 공명, 서툴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방법을 어떻게든 배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이 내게 준 선물을 한 아름 껴안은 채 돌아오니, 나도 모르는 사이 다시금 일상으로 복귀할 에너지가 비축된 기분이었다. 이제는, 다른 산을 오를 준비가 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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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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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김경훈
    • 친절하진 않지만 자연에서의 선물을 안아름 안고 오셨군요. 당신의 삶을 응원합니다.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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