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영화가 만나] 여름이었다.

글 입력 2022.11.2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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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영화가 만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방구석에서 본 영화에 대해 신나게 떠들 수도, 재미있게 본 TV 시리즈를 이야기할 수도, 좋아하는 작품을 비교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영화제에 갑니다.

 

 

올해 여름은 이상했다.


유난히 불쾌지수가 낮았던 건 둘째 치고 자꾸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상한 이유는 내가 원체 여름을 질색하는 사람이어서다. 사계절 중 가장 피하고 싶은 계절로 꼽을 만큼 여름은 내게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한때는 ‘여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자동으로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땡볕에서 조금만 걸어도 비 오듯 쏟아지는 땀, 온몸을 끈적끈적하게 만드는 높은 습도, 밤낮으로 귓가에서 왱왱대는 모기들과의 전쟁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자동으로 몸서리가 쳐졌다. 아마 더위를 많이 타고 벌레를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여름은 가을이 깊어질 무렵까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토록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계절이 올해 처음으로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름이 그립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여름을 배경으로 한 책과 영화를 주야장천 찾아보고 있었다. 여름이 그리워서 여름에 관한 작품을 찾아보기 시작한 건지, 그런 작품들을 줄곧 이어보다 보니 여름이 그리워진 건지는 그 경계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까닭이다. 어느 순간 일상 속에 스며든 여름의 흔적을 발견하고서야 나는 슬금슬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여름이 조금 그리워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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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내가 여름의 계절감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은 퍽 당황스러웠다. 왜냐면 나는 엄연한 겨울 예찬자이기도 했으니까. 매년 다가오는 겨울을 생각하며 여름을 버티는 사람이 나였다.


올여름 인생에서 잊지 못할 사건이 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잔잔하게 흘러가서 자꾸만 사소한 기억들을 곱씹게 되는 것 같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거리를 걸을 때 온몸을 감싸 안던 아늑한 햇살과 울창한 나무들이 만들어주던 다정한 그늘을 기억한다. 그 뒤로 매미 우는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강물 흐르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가 너도나도 뒤섞여 귓가를 맴돌곤 했던 산책길을 기억한다. 한 발짝만 들어서도 폭발적인 생명력이 느껴지던 그곳. 그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오간 출근길의 산책로뿐만 아니라 뜨거운 태양 아래 울려 퍼지던 페스티벌의 노랫소리도 잊지 못한다. 틈만 나면 잔디밭에서 꿀꺽꿀꺽 들이켰던 500cc 생맥주까지도. (페스티벌과 생맥주는 최고의 조합이다. 페스티벌에서 처음 맥주를 마시던 순간을 뭐랄까, 영화 <킹스맨>의 한 장면처럼 머리에서 폭죽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그날부로 술은 소주가 진리지 어쩌고 했던 과거의 신념을 미련 없이 철회했다. 다만 소주와 맥주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게 되어 어쩌다 소맥만 먹는 부작용이 생겨버렸을 뿐···.)


이런저런 추억 여행을 하다 보니 지난날의 여름을 그리워하게 된 건 결국 코로나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스크는 여전히 쓰고 다닐지언정 전보다 자유롭게 거리를 거닐고, 산책하고, 놀러 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얼마 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필름 콘서트를 보고 와서는 더더욱 지난 여름날을 그리게 되었다.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영화의 첫 장면이 상영되는 순간부터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이 났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리면 나는 늘 그 앞에서 주책바가지가 되곤 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엔딩 장면을 보면서 어김없이 울고 있던 나는 어쩌면 엘리오의 처지가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엘리오의 고통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우리는 똑같이 그해 여름을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엘리오와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슬퍼하고, 부단히 그리워하고, 부지런히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수밖에.


실컷 주책을 떨고 공연장을 나오는 길에 이 글을 쓰기로 다짐했던 것 같다. 여름을 근사하게 담아낸 멋진 영화들에 관해 써보자고. 그래서 여름을 마음껏 추억하고 그리워하기 위해. 한 달 넘게 앓고 있는 이 지독한 계절병을 조금이라도 해갈하고자 말이다.

 

 

 

<해변의 폴린느>,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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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폴린>을 관람한 시기에 책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있던 건 재밌는 우연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예술가의 세계를 좋아하는 것은 비슷한 이유에서일지 모른다. 섬세한 인물 묘사와 독보적인 세계관, 일관된 톤과 분위기까지. 무엇보다 이들의 작품에는 언제나 남녀 간의 사랑, 관계, 이별이 사건의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서로가 우연한 계기로 만나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리고 그 과정에서 상대를 오해하거나 의심하는 일이 반복된다.


다양한 인물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전개되는 방식은 하루키와 로메르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배신하고, 누군가는 실연을 겪고, 누군가는 진실을 찾아 헤매고, 누군가는 결실을 보는 과정에서 모두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늘 어딘가에서 떠나오거나 떠나가며 누군가로부터 떠나오거나 떠나가는 사람들. 내가 하루키와 로메르의 세계를 좋아하는 건 결국 그 모든 관계 속의 의문과 갈등과 오해가 해소되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여러 인물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는 로메르의 작품은 그 자체로 최고의 여름 영화라 불릴 만하다.

 

 

 

<기쿠지로의 여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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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도 재미난 우연을 발견했다. 책 『아무튼, 여름』을 읽기 바로 며칠 전에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을 본 것이다. 『아무튼, 여름』의 첫 문장은 <기쿠지로의 여름>의 주제곡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누구에게나 익숙한 멜로디의 그 노래는 히사이시 조의 ‘Summer’였다. 나는 오프닝서부터 경쾌하게 흘러나오는 그 곡을 듣고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질 결심을 했다. 혹자는 이 영화가 OST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다. 왜냐면 이 곡이 <기쿠지로의 여름> 속 분위기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까닭이고, 그래서 나는 이 둘을 도저히 떼놓고 볼 수 없다. 내가 ‘Summer’라는 곡을 들으면서 전율한 순간도 이 영화를 보던 때가 유일했으니까.

 

무엇보다 이 영화, 웃기다. 이렇게까지 웃길 줄 몰랐는데 깔깔 웃으면서 봤다. 아니 이거 코미디 영화였어? 감독의 유머 코드가 속속들이 들어찬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최고의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 무려 영화의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가 주인공까지 맡았으니 말 다 했지. 영화가 예상치 못한 순간으로 휙휙 반전될 때마다 나는 한참을 웃기도 하고 한참을 씁쓸해하기도 했다. 이토록 아름답고 씩씩한 우정 연대기라니. 그런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정말이지 나는 이런 영화가 너무 좋다. 익살스럽고 유쾌하고. 이따금 좌절하거나 실패하면서도 서로의 손길을 통해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늘 마음 한구석을 찡하게 했다.


무더운 여름날을 고스란히 스크린 너머로 느끼고 싶을 때마다, 마음 놓고 웃고 싶을 때마다, 두 사람이 떠나는 얼렁뚱땅 로드 무비를 보고 싶을 때마다, 따뜻한 우정 영화를 보고 싶을 때마다 나는 <기쿠지로의 여름>을 찾을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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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과 여름을 떠올리면 늘 변함없이 떠오를 영화. 아마도 내가 학창 시절에 이 영화를 처음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일본어 시간에 이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무더운 여름날이 코앞에 다가와 있던 때였다. 적당히 아늑한, 불 꺼진 교실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던 순간이 아득하다. 당시에는 언제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타임 리프 설정에 매료되어 영화 속 세 친구의 관계가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라는 관념을 이토록 자유자재로 다루는 영화가 신기했고, 그래서 마코토와 치아키, 고스케의 우정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어떻게 이 영화를 잊을 수 있을까. 교복을 입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진로 고민을 하고, 땀이 뻘뻘 나는 여름날을 견디는 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분명 동질감을 느꼈을 터였다. 이후에도 학교에서 종종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볼 적이면 매번 알 수 없는 여운에 휩싸이곤 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러 작년인가 올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거의 10년 만이었다.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여름 냄새가 짙은 영화였다. 맑고 푸른 하늘과 귓가를 맴도는 매미 소리, 뜨거운 태양 아래 오가는 야구공, 흐르는 땀방울, 노을 지는 강가가 아득하게 펼쳐진 풍경. 학창 시절에 여러 번 보아 이미 그 내용을 다 알고 있음에도(어쩌면 알고 있기에)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울었다. 이렇게 슬픈 영화는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마코토가 카메라를 앞질러 뛰어가는 장면과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의 마지막 이별 한마디가 그토록 마음을 울렸다. 10년이 넘도록 흐른 지금, 영화 속 두 사람은 미래에서 만났을까. 그런 고민과 기대를 하며 영화 속 한 문장을 떠올리게 된다. Time waits for no one.


 

 

<다함께 여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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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도심과 휴양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유쾌하고 청량한 여름 영화. 에릭 로메르가 떠오르는 기욤 브락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보물섬> <여자 없는 세상> 등 휴양지에서의 일상적인 풍경을 재치 있게 그려내는 그의 작품은 늘 나를 미소 짓게 한다.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함께 여름!>(a.k.a. 전원, 승차!)을 보고 기욤 브락 감독의 세계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시작부터 영화 속 인물들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얘들 영화 주인공 맞나, 싶어질 정도로 다들 사소한 무언가에 쩔쩔매고 있었다. 주차하는 데 애를 먹고, 차가 막혀 거리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누군가의 속임수에 감쪽같이 넘어가는가 하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꾸만 흑역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너무도 유쾌하고 친근하여 영화를 보던 관객들과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당최 영화가 이렇게 재밌을 줄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크나큰 쾌감을 느꼈음은 물론이다. 당시 코로나19 상황으로 감독님은 화상 GV(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만나볼 수 있었다. 영화만큼이나 밝고 부드럽고 따뜻한 분이셨다.

 

감독님의 실물을 보게 된 건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사하게도 특별상영으로 <다함께 여름!>을 추가한 뒤 감독님을 한국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1년 전에 화면으로만 보던 감독님이 직접 한국에 온다고? 그것도 부산국제영화제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현장 GV에 참석하는 감독님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기 위해 목 디스크의 위험을 무릅쓰고 B열을 예매했다. 그렇게 1년 만에 마주한 영화는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나는 부산에서의 마지막 날을 감독님의 영화와 GV로 행복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이 영화를 잊을 수 있겠는가. 감독님의 영화를 떠올릴 때면 늘 물기 가득한 여름의 이미지가 펼쳐지니 말이다. 무엇보다 계획한 일이 자꾸만 어긋나고 뜻대로 굴러가지 않을 때도 <다함께 여름!>은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누구나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살아간다고, 때로는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고 영화가 (그리고 감독님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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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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