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익숙한 리듬을 따라 만나는 로맨틱 코미디 - 영화 ‘피가로~피가로~피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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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은 오페라가수로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정해진 게 많지 않은 학생 시절에는 지금 하던 걸 그만두고 다른 걸 시작하기 쉽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며 어떤 식으로든 내 인생의 결과물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 결과물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쉽게 버릴 수 없게 되어버린다. 하던 일을 당장 때려치울 것처럼 불평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다들 조용히 그 일을 다시 하고 있는 것이다.
<피가로~피가로~피가로>의 밀리는 그런 면에서 지극히 영화적인 인물이다. 잘나가는 펀드매니저 밀리는 같은 직업을 가진 남자친구와 함께하는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뒤로하고 갑자기 오페라가수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샤워하면서 오페라 잘 부르려고?”라며 되묻는 남자친구의 반응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펀드매니저로서의 삶은 밀리에게 공허하기만 할 뿐이다. 밀리는 여느 주인공들처럼 자신의 꿈을 향해 돌진한다.
펀드매니저로 산다는 것은 대도시 레스토랑에서 연인과 식사를 한 다음 좋은 차를 타고 멋진 집으로 돌아가는 하루가 이어지는 일이다. 반면 오페라가수 지망생은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농업용 트랙터와 마주치는 시골로 들어가 괴팍한 스승에게 레슨을 받으며 마을의 유일한 식당 겸 숙박업소 겸 술집에서 일상을 보내는 일이다. 꿈을 좇는 과정이 평탄하지 않아도 밀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반신반의하던 관객도 밀리에게 설득당해 어느새 그를 응원하게 된다.
익숙한 리듬을 따라 편안하게
안락한 삶을 박차고 나와 진짜 자신의 꿈을 찾는 밀리, 그런 그를 우스꽝스러울 만큼 혹독하게 가르치는 왕년의 디바 메건, 같은 스승에게 수업을 받는 라이벌 맥스. <피가로~피가로~피가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성격의 등장인물들이 익숙한 리듬을 따라가는 영화다. 섣불리 실험적인 음을 넣거나 갑작스레 장조에서 단조로 빠지는 일은 없다. 오페라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하고 온 관객을 위해 영화는 준비된 것들을 묵묵히 차근차근 내어 준다. 모두 아는 맛이기에 식상한가 싶다가도 편안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 안에서는 긴장할 것도, 심각할 것도 없다. 다른 장르였다면 갈등의 요소가 될 만한 부분도 둥글게 넘어간다. 예를 들어 외부와의 교류가 많지 않은 시골 마을에 외지인 티를 팍팍 내며 홀로 방문한 여자는 표적이 되기 쉽다. 마을 사람들이 보이는 관심 역시 자칫하면 무례해지기 마련이다. 퉁명스러운 맥스의 존재도 위협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낯설던 마을 사람들은 이내 수더분하고 정 많은 모습을 보이며 밀리를 응원하는 조력자가 된다. 까칠하던 스승 메건도 밀리를 가르치며 그가 가진 열정과 성실함에 감화된다. 맥스와의 관계도 점점 진전되며 로맨틱 코미디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새로운 맛을 추구하다가 먹을 수 없는 요리가 되는 것보다 익숙한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더 낫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에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도 장점이다. 밀리가 오페라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는 데까지는 영화가 시작되고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남자친구와 함께 보러 간 공연에서 남자친구는 정신없이 졸지만 밀리는 벅찬 마음으로 무대에 선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장면, 밤늦게 혼자 노트북으로 오페라 영상을 보며 눈물 흘리는 장면은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구체적인 사연을 전하는 대신 그만큼 밀리가 간절하게 오페라가수를 꿈꾼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 메건, 그런 메건에게 관심이 있는 듯한 숙박업소 사장, 5년간이나 레슨을 받았지만 자신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맥스. 밀리의 주변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서사를 갖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는 다른 이야기에 한눈팔지 않는다. 밀리가 오페라를 배우고, 사랑에 빠지고, 마침내 꿈꾸던 무대에 서는 것에 집중한다.
오페라와 스코틀랜드 자연의 만남
익숙하고 슴슴한 이 영화에도 양념 역할을 해주는 요소가 있다. 우선 제목에서부터 짐작했듯이 오페라 음악이다. 기존의 오페라는 로맨틱 코미디보다 테너나 소프라노의 도전을 그린 드라마나 오페라와는 별 상관없는 영화의 OST 정도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오페라 자체가 지닌 소리의 울림이나 가사에 집중할 일은 많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만큼은 오페라가 주인공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중 ‘나는 이 거리의 만물박사’, 비제의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 등 익숙한 오페라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오페라 음악으로 시작한 영화는 오페라 음악과 함께 막을 내린다.
영화에 삽입된 다양한 오페라 음악 중에서도 주인공이 부른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작은 별’이 기억에 남는다. 오페라로 들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곡을 밀리가 풍부한 목소리로 부르자 원래 곡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새롭게 들린다.
오디션 최종 무대에서 불렀던 베르디의 <라 트리비아타> 중 ‘addio del passato’도 인상적이다. 번역하면 ‘지난날이여 안녕’이라는 제목이다. 딱 1년만 해보겠다고 시작한 오페라가수 연습생 생활이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순간, 밀리에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선택지는 이제 없다는 걸 관객도, 밀리 본인도 알았을 것이다. 그 노래를 부르며 밀리는 여지를 두던 펀드매니저로서의 삶에서 완전히 탈피한다.
스코틀랜드 북부 하이랜드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영화의 매력이다. 메건을 만나기 위해 산속으로 난 길고 구불구불한 길로 나아가는 밀리의 차를 카메라가 멀리서 잡으며 광대한 하이랜드의 풍경이 처음 스크린에 비칠 때, 저절로 감탄을 삼키게 된다. 오페라는 도시적인 음악이라고 여겨지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자연과 어우러지며 그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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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연중에 심각하고 어려운 영화가 그렇지 않은 영화보다 더 좋은 영화라고 평가되곤 한다. 하지만 영화보다 더 잔혹한 현실에서 꼭 필요한 것은 꿈과 이상을 이야기하는 영화일 것이다. 자연과 오페라가 함께하는 로맨틱 코미디를 보며, 편안하고 쉬운 영화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영화를 보며 웃던 관객들이 많았고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이 영화는 그것만으로도 빛을 발한다.
[김소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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