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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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는 책이었다.
우선 이 책은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는 추리 소설 형식으로 쓰여졌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시간 속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대만풍 이름들을 따라가면서 이야기들의 퍼즐을 조심스레 맞춰보며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내용 또한 쉽지 않다. 대만 사회를 고발하는 소설이지만 소설이 그리고 있는 사회는 우리나라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형 성범죄, 친족 성범죄, 성폭력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피해자다움', 진실을 말했을 때 피해자에게 지워지는 낙인 등 우리 사회의 모습들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을 소설은 다루고 있었다.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비밀의 존재를 숨기고 없는 척할수록 그 비밀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어디를 가도 그 비밀이 따라온다. 시간이 쌓이면서 그 비밀을 지키고 싶기도 하고 없애버리고 싶기도 한 두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며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p.111)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는 변호사 판옌중이 하루 아침에 자취를 감춘 아내 우신핑의 행방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판옌중은 아내의 행적을 쫓으며 그동안 자신이 몰랐던 아내의 비밀들을 알게 된다. 친구가 없다던 아내에게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이 있었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지만 그 역시 거짓이었다.
우신핑의 동창 장전팡, 담임 교사였던 롄원슈를 만나며 판옌중은 우신핑이 지역 유지였던 쑹집안의 장남, 쑹화이구에게 학창시절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는 것과 쑹화이구의 동생 쑹화이쉬안과 꽤 사이 좋은 친구였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입에 공공연하게 오르내리는 소문도 알게 된다. 합의금을 위해 우신핑이 합의된 성관계를 강간으로 고발했다는 것.
의구심이 가득한 상황에서 작가는 '나'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소설에 교차로 배치했다. 친오빠에게 지속적으로 그루밍 성범죄를 당한 어느 소녀의 이야기. '나'는 불안정한 가정 환경 속에서 오빠에게 가장 많이 의지했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오빠를 사랑했기에 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신핑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일까?
우신핑을 찾아 헤매는 또 다른 인물, 친구 오드리도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자였다. 자신의 장점을 알아준 초등학교 선생님이 어린 오드리는 좋았다. 낮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낭독 연습이 즐거웠고 아이들 사이에서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을 느끼는 것도 즐겼다. 오드리는 린 선생님을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피해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열두 살이었던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조금이나마 해석해보려고 했다. 외로움. 나는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오빠와의 씁쓸한 유희에 동참했다. p.216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는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혼란을 조심스러우면서도 세밀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다룬다.
책의 맨 뒷장 인터뷰에서 담긴 것처럼 작가의 많은 고민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루밍 성범죄는 대개 미성년자나 청소년을 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행해지는 범죄이기 때문에 피해자는 피해 당시, 자신이 겪은 행위가 성폭행이라는 것조차 인지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책은 현실 사회가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들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그들을 얼마나 평면적으로 다루고 있는지도 지적한다. 강압과 저항이 있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피해자들의 고백은 대가를 노린 거짓이 되어버린다.
이런 인식 때문에 '나'는 끝끝내 자신이 겪은 일을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했고, 오드리의 부모님은 그녀의 고백을 듣고 나서도 사실을 묻어버렸다. 미투 운동 때 고백한 피해자들의 언행을 낱낱이 파헤치며 '피해자다움'을 찾던 수많은 기사들과 현실 세계의 인물들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저는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가련한 여자, 나쁜 남자,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난 이야기를요. p.443(작가 인터뷰)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모든 비밀이 반전으로 밝혀진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전혀 후련하지도, 통쾌하지도 않다. 사회의 시선과 현실의 편견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들의 아픔과 충격만이 있을 뿐이다.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어도 어떤 비밀은 진실로 드러나야만 한다. 마치 이 책의 제목처럼. 그리고 사회 구조와 구성원들은 그 진실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피해자에게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사회가 되기 바라며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의 리뷰를 마친다.
[정선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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