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재능이라는 벽에 직면할 때 [드라마/예능]

세상의 모든 진목과 송아들에게
글 입력 2022.09.1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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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내가 가진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과도 같다는데, 그런지 몰라도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해갈수록 본인의 모자란 재능을 고백하는 글이나 콘텐츠들에 눈길이 간다. 이 글에서 소개할 두 편의 드라마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있어 재능이라는 벽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두 인물의 상반된 선택을 그려내고 있다.

 

 

*

이 글은 해당 드라마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주어진 재능을 의심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는 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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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지 터너> 공식 포스터

 

 

<너의 목소리가 들려 (2013)>, <당신이 잠든 사이에 (2017)>, <스타트 업 (2020)> 등 다양한 히트 드라마를 만들어냈던 박혜련 작가가 허윤숙 작가와 함께 2016년에 집필한 단편 드라마 <페이지 터너 (2016)>는 한주예술고등학교 피아노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려낸 청춘 드라마다.

 

나는 여기서 진목이라는 캐릭터가 무척 인상깊었다. 유슬에 가려져 늘 피아노과 2등에 머물렀던 진목.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유슬을 대한 증오가 그녀를 향한 저주의 기도로까지 이어질 정도였던 극 초반의 모습에, 나는 그가 단순히 주인공과 대립하는 악역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회가 거듭할수록, 자신의 실력으로는 1등인 유슬을 평생 따라잡지 못할 것만 같아 늘 불안해했던, 그는 그녀와 함께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내게 이 드라마 속 가장 입체적인 인물로 다가왔다.

 

특히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그가 던지던 대사는 아직도 마음 깊은 구석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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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BS2 TV <페이지 터너> 3화

 


- 아버지 말씀이 다 맞을지도 몰라요. 저는 어정쩡해서 잘 돼야 그저 그런 레슨 선생님만 할지도 모르고요. 근데 전 피아노가 좋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10년 뒤에 어정쩡한 선생이 된 대도 전 괜찮아요.


- 괜찮아? 겨우 그거 되자고 이 아까운 시간을 날린다고?


- 네, 상관없어요. 전 그냥 자기 전에 오늘 하루 진짜 근사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중요해요. 피아노로 성공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 앞으로 10년이 즐거울 거예요. 왜냐면 전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요.

 

<페이지 터너> 3화 중

 

 

가끔은 어정쩡한 재능이 더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일말의 희망, 조금만 더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희망은 금세 좌절로 바뀌어 버린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이 분야에서 '타고난' 사람들을 이기기에는 불가능할 것만 같아서. 나의 이 어정쩡한 재능으로는 그 선을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그것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비교를 동반하곤 하니까. 그래서일까, 그럼에도 이제 1등이라는 재능의 영역이 아닌 좋아함이라는 본인의 마음에 집중하려 하는 그의 모습을 응원하게 된다.

 

 

 

바이올린을 포기하는 결심, 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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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공식 포스터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2020)> 속 주인공 송아는, 4수 끝에 서령대 음대에 진학할 만큼 바이올린에 대한 애정이 깊은 인물로 나온다. 본래 같은 대학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송아는 과외로 레슨비를 벌어가면서까지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여러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늦깎이 음대 신입생이 된다.

 

어렵게 입학한 음대에서 송아는 소위 말하는 '재능충' 동기들을 보면서 자꾸 기가 죽는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재학 내내 그녀의 실기성적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자신의 노력과는 달리 대학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듣기도 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기도 한다.

 

바이올린에 대한 애정 하나로 달리던 그녀는, 드라마 후반에서 본인이 지금까지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던 바이올린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 굳은 살도 벌써 많이 없어졌고 여기 자국도 아마 곧 없어지겠지. 그러니까 나도 괜찮아질 거고. 네 말대로 악기도 영혼이 있으니까 이제는 나보다 더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줄 사람한테 보내주고 싶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16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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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유투브 SBS Drama

 

 

그동안 소중히 여기던 본인의 바이올린을 팔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악기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며' 작별인사를 읊조리던 이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To. 바이올리니스트 채송아 님]이라는 싸인 CD를 받고나서 그 CD를 한참동안 어루만지던 극 초반 송아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말이다.

  

바이올린 연주자로서의 길은 포기하지만, 그녀는 공연기획이라는 또 다른 분야에 새로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언젠가 들었던 '좋아하는 무언가를 계속하다 보면 꼭 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그 마음이 닿아 결국 비슷한 일을 하게 된다'라는 말을 떠올랐던 것 같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럼 덜 행복한 거 아닌가'라는 마음이 컸는데, 송아라는 인물을 통해 이제야 그 행복의 질량은 내가 쉽게 계산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

 

'존버는 승리한다'라는 말처럼 누군가는 버티는 게 답이란다. 또 한 편에서는 '포기할 줄 아는 용기'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이렇게 상반된 삶의 조언들 속에서 나는 가끔 내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갈피를 잃기도 했다.

 

요즘 나는, 결국 이 모든 삶의 태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나의 마음'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재능이라는 벽 앞에서 내린 진목과 송아의 결정에 어느 한쪽이 옳다, 그르다고 말할 수가 없다.

 

각자의 사정 속에서 그들이 내린 결정은 모두 그들 내면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누구의 등쌀에 떠밀린 것이 아닌, '본인의 선택'을 내린 진목과 송아의 삶을 내가 아직도 응원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 역시 언젠가 맞이하게 될 이 갈림길에서 한 명의 진목, 또 한 명의 송아가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럼 그때 나는 무슨 말이 가장 듣고 싶을까?

 

세상의 모든 진목과 송아들에게. 삶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단지 너의 결정을 응원한다고, 그 마음에 힘을 보태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게도 언젠가 그 순간이 찾아 온다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마 이것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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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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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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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너무 공감 되고 또 위로 되는 글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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