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목이 '제목 없음' [미술/전시]

글 입력 2022.09.1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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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즐겨 본 지 얼마 안되었을 때 마주한 <무제>라는 제목은 작은 희열감을 줬다. ‘제목 없음’이 제목이 될 수 있다니! 창의적이고 도발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몇 발자국 옮겨 보니 작품들이 <무제> 투성이라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각기 다른 모습을 가졌는데 이름이 똑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가뜩이나 아무것도 모르는데 제목마저 없으니 전시 입문자로서 ‘이건 뭐지?’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도 <무제>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는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단어를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관람객에게 생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의도이자 개개인이 각기 다른 감상을 내놓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타당하다고 생각했고(여전히 일리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후에는 괜히 겉멋이 들어 작품 제목이 ‘무제’면 괜히 그 앞에 오래 서있고는 했다.

 

‘무제’와 관련된 일화로는 작가 문신의 <개미>가 유명하다. 1970년도에 제작된 문신의 작품은 원래 제목이 없었다. 그러나 전시장을 방문한 프랑스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고 개미를 닮았다고 했고, 그렇게 그 작품은 ‘개미’로 명명되었다. 이로 인해 이후 제작된 비슷한 형태의 작품들까지 <개미>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어이없긴 하나 가볍게 웃어 넘길 에피소드는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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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개미>, 1970, 참나무, 119.5×30×19.6cm [국립현대미술관]

 

 

실제로 문신은 <무제>라는 제목을 즐겨 사용했다. 관객들이 각자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적극적인 상상의 결과 ‘개미’가 작품의 제목이 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한 거다. 하지만 제목을 <개미>로 알고 봤던 관람객들은 이를 보고 “아, 개미구나” 하고 넘어갔을까? “이렇게 보면 만세하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또 저렇게 보면 모래시계 같기도 하군”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제목’이라는 것이 상상을 제한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고를 이끌어낼 수 있는 출입구는 아닐까 라는 생각에 글을 써본다.

 

제목은 작품을 다시 보게 만든다. 해당 작품이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배경이 있는지, 또는 도드라지는 조형적 특징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게 한다. 그렇게 한참 생각하고 나면 제목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할 수도, 여전히 궁금증을 품은 채로 지나갈 수도 있다. 반면 ‘무제’ 앞에서는 오히려 멍해진다. 지나치게 얻은 생각의 자유는 때론 사고를 멈춰버린다. 아무거나 말해보라고 했을 때 뭘 말해야 할 지 모르겠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작가의 세계를 알고자 갔는데 알아서 생각하라고 하니 ‘뭐야?’ 싶을 때도 있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글을 쓸 때 제목을 먼저 정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막상 쓰다 보면 하고싶은 말이 바뀌는 경우도 있어 대개는 다 쓰고 나서 제목을 붙인다. 또 제목 짓는 데에 영 소질이 없어 마지막까지 미뤄두는 것이기도 하다. 속된 말로 제목만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어그로 끌기’에 재능이 없다. 그래서 몇 글자 안되는 제목이지만 지을 때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여전히 글에 제목을 다는 일이 세상 골치 아프다. 이 글에는 또 어떤 제목을 달아야 하나.

 

내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제’라고 제목이 적힌 작품들을 보면 부러운 동시에 괘씸한 마음도 든다. 창작자로서 감당해야 하는 고뇌의 과정을 관람자에게 떠넘기고 ‘나는 <무제>니까 나머지는 당신들이 알아서 해석해’라며 무책임하게 다음 <무제>를 제작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다.

 

이러한 억울함(?)을 털어놓았더니 친구는 ‘정말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아 제목이 없을 수 밖에 없는’ 작품도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작품이라고 여겨질 수 있을까? 세상에 선보일 작품을 ‘재미’로 만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혼자 보는 것은 무의미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무언가를 세상에 내보일 때는 책임감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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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샘>, 1917

 

 

또한 우리가 ‘작품’이라 부르는 것들은 시대 흐름 상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 것들이다.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후대에는 그 시대 상황을 알려주는 매개체가 된다. 개념미술의 시작을 알린 뒤샹의 ‘샘’을 생각해보자. 지금 ‘샘’이 나왔다면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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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 오크 화판에 유화, 60 x 82.2 cm

 

 

반면 구체적인 설명은 상상을 제한하는 것이 맞다. 다양한 상징으로 유명한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학교에서 처음 마주하게 된 그림이다. 교수님은 이 작품이 이탈리아 상인 아르놀피니의 부유함을 강조한 결혼식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열매가 맺힐 정도로 따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모피코트를 입고 있는 인물들, 당시 귀했던 오렌지가 창틀과 서랍 위를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는 모습, 창문 위의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상징은 아르놀피니 부부가 그 지역을 주름잡는 부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한참을 부유한 상인의 성스러운 결혼식이라고만 생각하며 그림의 다른 요소들도 부와 결혼에 관련지어 해석하고자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아르놀피니 가문에 두 명의 지오반니 아르놀피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촌 지간으로, 만일 그림의 주인공이 사촌 아르놀피니라면 결혼식이 아니라 죽은 아내의 초상으로 그림의 의미도 바뀌어 버린다. 결혼을 나타내는 상징들이 죽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이 작품은 수많은 가설들만 있을 뿐 풀리지 않은 난제로 남아있다. 다만 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내 생각의 방향이 좁혀지거나 확장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의미 있는 작품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설명은 상상을 제한하지만 제목은 아니다. 작가의 세계관을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적확하게 제목을 붙인 작품은 작가의 확고한 예술관을 보여주는 것 같아 명쾌하고 제목을 붙이지 못해 ‘무제’라고 제목을 붙인 작품을 보면 작가의 겸손함과 왠지 ‘자신 없어’ 하는 모습에 응원을 보내고 싶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신유빈 (1).jpg

 

 

[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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