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비의 어원은 함께 상처를 나눈다는 뜻이다 [도서]

최은숙 조사관의 [어떤 호소의 말들] 을 읽고
글 입력 2022.08.0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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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살다보면 눈물이 터져 나오고 가슴이 콱 막힌 듯 분통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보통 그럴 때 우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숨을 몰아쉬고 허공에 분노의 발차기를 몇 차례 날려보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일들은 시간이 약이라는 만병통치약의 주문처럼,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무뎌지기도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당시보다 커져버린 나에게 납득받기도 하지만, 어떤 누군가에겐 끝끝내 아물어지지 못해 일생을 아작 낸 채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외침은 한 순간의 음성만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그들의 간절함은 자꾸만 피 묻은 손으로 무언가를 두드리고, 갈라진 쇳소리로 애타게 도움을 청하게 되니까. 그래 사실 그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어쩔 도리가 없는 그 호소의 울먹임과 분통함의 손짓들에 조그마한 스피커를 달아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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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인 최은숙 작가는 국민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서 20년째 조사관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녀가 지난 시간동안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마주했던 이들의 사연과 사연 너머에서 조사관으로 그 사건들을 다뤄야 했던 그녀의 번뇌에 대해, 이 책은 현실적이고 솔직하면서도 온정어린 시선을 담고 있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착한 척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같이 들어주고 함께 걸어주고 등을 껴안고 울어준 순간을 보여준다.

 

책의 서두를 여는 프롤로그에서 최은숙 작가는 책을 지필하던 과정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글의 처음 제목은 ‘억울할 때 읽는 책’ 이었다.

 

그런데 글을 써내려갈수록 점점 ‘권리구제 매뉴얼’이나 

‘인권 교과서’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지식과 정부를 담은 책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많은데 말이다.

글을 멈추고 천천히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억울함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인권에 관한 지식과 정보도 필요하지만,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

 

인권위 조사관으로 일하며 만났던 다양한 무늬의 사연을,

그 안에서 때론 기가 막혔고, 때론 안타까웠고, 때론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기로 했다.

 

법률과 제도로 규정되는 인권이 아니라 조금 슬프고, 이상하고, 귀엽기도 한

모순된 존재인 우리의 모습 안에서 인권을 말하고 싶었다.

 

- 책속에서

 

 

글을 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의 내면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잘 알지도 못하는 필자라 할지라도 단문 하나에 인격의 호감을 느끼고 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에겐 그녀의 서두가 그러했다. 인권위 조사관으로, 또 그 전 시민단체의 일원으로, 누군가의 지푸라기가 되어주며 살아온 그녀만의 이야기보따리가 너무나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만든 다정한 스피커의 소리를 듣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떤 호소의 말들] 의 책 소개 글을 시작해본다. 책은 각각 1부(어떤 호소의 말들), 2부(고작 이만큼의 다정)로 나누어져 있고 그 안에는 여러 챕터로 나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이하에서는 개인적으로 밑줄을 여러 번 그어가며 읽어냈던 글 세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1. 용주골 그 방의 아이에게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하면 매시간 속보가 뜨고, 

개선책을 마련하겠다며 떠들썩한 말잔치가 벌어지고,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지만 피해자들은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연극이 끝난 무대 위 소품처럼, 관객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무대는 어둠에 잠겼다.

 

(...)

  

인권침해 가해자들의 말은 학연, 지연, 학벌, 돈과 권력으로 만들어진

성능 좋은 마이크를 통해 세상에 울려 퍼지지만

마이크가 없는 피해자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

 

인권침해 가해자들에 대한 심판이 끝난 뒤에도 피해자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다.

 

- 책속에서

 

 

2002년 10월, 월드컵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가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인권위의 조사관으로 일하던 최은숙 조사관은 서울지검에 대한 직권조사를 하며 마주쳤던 무력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인 검찰은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들어진 인권위의 조사에도 태연했다. 구태여 시간을 끌고 대응을 지연시키는 상황 속에서 조사관들이 우연히 찾아낸 50cm의 고문도구가 아니였다면 이러한 인권유린의 현장은 자주 그랬던 것처럼 묻혀 은폐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사건의 내막이 드러났다는 것이 모든 일이 잘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사건 담당 검사는 항소심에서 형량이 반으로 줄어 대법원에서 1년 6개월의 확정판결을 받고 몇 년 뒤 특별 복권 되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죽은 사람과 그 가족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는 게 맞는 말이겠다.

 

그녀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피의자의 아들이었던 용주골 작은 방의 아이가 생각난다고 한다. 어느새 20대의 청년이 되었을 그 아이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나까지 목이 메인다.

 

어느새 2022년이다. 20년이 지나오는 세월동안 인권에 대한 시각은 여러 분야에서 발전해왔지만 또 어떤 부분은 특정한 계층에겐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고여 있어 보인다.

 

억울한 일은 당하는 순간만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에 이를 피력하는 과정에서도 힘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너무나 큰 생채기를 남기는 것 같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건 타인의 고통을 가십거리로 치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고통 이후의 과정까지도 지속적인 시선을 보내주는 조그마한 연대가 아닐까.

 

 

 

2. 최저임금 받으며 참아낸 말들



 

매일매일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널렸다는 말을 듣다보니 

정말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자존감은 갈수록 낮아졌다.

 

(...)

 

1년 안에 그만두면 인내심이 부족하거나 사회성에 문제 있는 사람으로 평가된다고.

그러나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몸이 견디지 못해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간신히 버텼다.

 

어느 날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이러다 직장을 다시 구하지 못할 것 같다는 공포보다 커졌을 때, 

비로소 사표를 냈다. 사직서에 과로와 임금체불 때문에 사직하겠다고 썼다는 이유로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사장은 사무실이 떠나가라 욕을 하고 화를 냈다.

 

“저에게는 일하지 않을 권리도 없는 것 같았어요”

  

(...)

 

오늘도 도서관과 학원, 아르바이트 일터를 분주히 뛰어다닐 청년들.

청년들은 인터뷰 끝에 조용히 이렇게 물었다.


“이런거 정말 잘못된 거 맞죠? 그런데 왜,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는 거죠?”

 

- 책속에서

 

 

나에겐 아주 존경하는 소중한 친구 L이 있다. 스물 하나에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미 생활비를 비롯한 경제적인 부분을 전부 본인의 힘으로 벌어 쓰는 친구였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어린아이같이 징징대던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져 늘 부족한 자신을 반성하곤 했다.

 

그만큼 나에겐 귀감이 되는 아주 어른스러운 친구였는데, 하루는 아주 지쳐 보이는 목소리로 전화가 온 날이 있었다.

 

급전이 필요해서 단기 물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너무 풀이 죽어 있어 영문도 모른 채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이 난다.

 

물류 알바를 뛰는 일주일동안 태어나서 들을 수 있는 험한 말은 죄다 들은 것 같아 귀를 힐링하려고 전화했다는 음성을 듣고 있자니 얼굴조차 모르는 그 물류창고의 사람들이 너무 미워졌었다.

 

나 역시도 성인이 된 이후로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벌이를 한 경험이 있는데, 어떤 날의 기억은 몇 년이 지나도 생각이 난다.

 

스물 한 두살 무렵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더운 여름날이었고 꼬인 스케줄 탓에 소위 극악이라고 일컫는 주말 오후파트를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날이었다. 그 탓에 나름대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주문을 받아봤지만 혼자서는 버거워 손님들을 길게 세워둘 수밖에 없었다.

 

결국 평소보다 오랜 시간 기다린 탓에 화가 났는지 진열장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결제하려고 기다리던 한 손님이 본인의 차례가 되었을 때 포스기 앞에 있던 나에게 곽으로 포장된 아이스크림을 집어 던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 순간에는 너무 당황해서 죄송하다는 말만 외다가 (당황하지 않았어도 다르진 않았을 것 같다) 집에 와서 이런 대우를 받는 게 너무 억울해 펑펑 울었던 날이었다.

 

사람이 그런 취급을 받으면 처음에는 화가 났다가 나중에는 서러워진다. 내 친구인 L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그따위 행동을 취한 사람들의 기저에, 우리들은 본인이 그렇게 대해도 괜찮은 아래의 존재라는 인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부잣집 공주님과 왕자님들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못하면서 열심히 용돈벌이를 하거나 정말 필요한 돈을 모아가기 위해 뛰어다니는 청년들에게는 그렇게 대해도 되는 심보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누군가에겐 늘 배우고 싶은 소중한 친구이고, 또 누군가에겐 밥은 제대로 챙겨먹었는지 항상 걱정되는 딸이고 아들이다. 좋은 말만 듣고 다정한 사람들하고만 엮이길 바라는 사랑받는 존재들이다. 하다못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런 대우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은 없다.

 

별 일도 아닌 일에 현실을 모르는 풋내기가 할 군소리라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며 이런 대우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창해보여도 결국 이런게 인권이 아닌가.

 

 

 

3. 굴비장수 주제에


 

 

우리는 모두 이런 식으로 조금씩 ‘알아차리며’ 인권감수성을 키워간다.

인권은 법이나 제도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지만,

그 제도나 법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감수성이 없다면 실천되기 어렵다.

 

편견을 버리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말랑말랑한 마음이 법보다 훨씬 힘이 세다고 말하는 것이 인권감수성 아닐까?

 

(...)

  

작은 소리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리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

도덕 교과서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도저히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지 않다.

  

- 책속에서

 

 

좋아하는 책의 구절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아는 사람은 절대로 상처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만이 자꾸만 상처를 준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부분에 이미 깨어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최은숙 작가가 말한 것처럼 상대방의 인권에 상처주지 않으려 노력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난 이 말을 가슴 한 켠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볼 방 하나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혹여 과거의 무지로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면 충분히 부끄러워하고 진보할 것. 또 타인의 상처에 냉소의 미소를 짓기 보단 서로의 어깨를 보듬어 울어주고 함께 예민한 인권의 감각을 내세워 줄 것.

 

우리 모두가 그렇게, 같이 커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최은숙 작가의 [어떤 호소의 말들] 이 그런 온도를 맞춰가기 위한 작지만 끊기지 않는 스피커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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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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