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두려움에 흔들리는 우리의 삶과 사회를 붙잡는 것 – 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 [도서/문학]

두려움을 제대로 마주하고 더 나은 미래를 함께 그리기 위해
글 입력 2022.07.0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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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인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물이 가지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도, 드러내는 것도 꺼려 한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모든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발달한 감정임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두려움’은 이성적인 인간의 모습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원초적인 모습에 가까운 것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는 때로 더 약하고 지위가 낮으며, 어리석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이성과 논리가 필요한 사회 영역에서 이러한 두려움과 같은 감정에 대해 집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며 외면 받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무력한 존재’로 태어나는 한, 우리 안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분명히 존재하며 여러 다른 감정과 행동을 유발하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정치 현장에서 혹은 사회 구조가 유지되고 변화하는 갈림길에서, 두려움과 같은 이러한 ‘감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오랜 시간 연구해왔다. 특히 그의 저서 『타인에 대한 연민(The Monarchy of Fear)』은 우리 개개인 안에 존재하는 ‘두려움’이란 감정이 어떻게 분노, 혐오, 시기심으로 연결되는지 제시하며, 이것이 어떻게 평등과 상호존중, 신뢰 등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한 가치를 위협하는지 살펴본다.

 

마사 누스바움은 책 속에서 미국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양극화와 사회적 불안 등 여러 실질적인 문제들, 타자화를 통한 혐오와 배제, 정치적 분열과 공동체에 대한 신뢰의 상실 등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연히 법과 제도 등 구조적인 차원에서도 지속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 합의와 변화도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고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감정, 특히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두려움’이란 감정은 역시 모두가 느끼지만 쉽게 인정하고 마주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고, 더욱이 이것이 어떻게 우리의 공동체와 이를 위한 가치를 위협하는지 쉽게 논의되지 못해 왔기에 더욱 그러하다.

 

단적으로 이 책의 제목이 ‘두려움의 군주제(The Monarchy of Fear)’라는 원제 그대로가 아닌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출간된 것에서도 이러한 사실의 영향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비약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이 책이 대중서로서 지금까지만큼의 성과를 낼 수 있었을지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왜 더욱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해보아야 하는지 더욱 뚜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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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토양에서 자라는 분노, 혐오, 시기심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론과 로마의 역사, 행동경제학과 심리학 분야의 연구 등 다양한 종류의 근거를 들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민주주의의 ‘위협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이를 경계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그는 물론 모든 ‘두려움’과 두려움에서 파생되는 감정들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하지는 않는다. 다만 두려움에서 자라난 분노와 혐오, 시기심과 같은 감정이 보복에 대한 환상과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 그리고 과도한 적대감으로 이어질 때, 오히려 당면한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지고 연대의 가능성은 희박해진다고 말한다.

 

이렇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우리 자신과 공동체에 위협이 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두려움은 인간의 타고난 취약함과 무력함을 전제로 한다. 다른 동물들보다 상대적으로 긴 기간 동안을 ‘무력한 존재’로 보내는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두려움’에 대한 정의대로 ‘곧 닥칠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일에 대한 괴로움과 이를 물리칠 힘이 없다는 무력감이 결합(p.55)’된 감정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을 능력이 없는 아이는 자신에게 당면한 혹은 당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육자의 맹목적인 사랑에 기댈 수 밖에 없다. 루소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형성하는 이러한 불균형한 관계를 군주제에서 군주와 그에게 복종하는 신하나 백성들이 맺는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수직적인 관계에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기대, 명령과 위협을 통해 개인의 삶과 사회를 유지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곳은 평등과 신뢰를 기초로 구성되어야 할 민주주의 사회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서로 평등한 관계 아래 도움을 주고 받으며 신뢰를 형성하고, 서로가 합의한 법과 제도 아래에서 각자의 권리를 존중하며 살아간다. 이런 곳에서 기본적으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안녕과 이익에만 집중하는 ‘두려움’은, 타인의 존재와 헌신을 간과하는 편협함과 충분한 성찰없이 타인을 통제하고 배제하려는 왜곡된 환상을 부추긴다.

 

이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없이, 두려움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특정 집단이나 사람을 지목하고 이들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분노는 이렇게 지목된 집단이나 사람들을 비난하고 심지어 이들에게 보복과 징벌을 가하려는 행동으로 표출된다.

 

물론 마사 누스바움은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며, 부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가능성도 품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품은 분노가 맹목적인 비난으로, 또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절망과 쉬운 해결책을 찾으려는 환상에서 비롯한 징벌과 보복으로 향하는 것을 경계한다.


 

고통을 고통으로 갚겠다는 것은 손쉬운 생각이다.

하지만 이는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더 많은 고통만 양산하는 거짓 유혹일 뿐이다.

간디가 말했듯이 "눈에는 눈 전략은 온 세상을 장님으로 만들 뿐이다." - p. 109

 

분노에는 몇 가지 명백한 오류가 있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나쁜 의도로) 부당하게 행한 것인지,

그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을 때

분노는 엉뚱한 대상을 향하거나 우리를 나쁜 길로 이끌 수 있다. - p. 115

 

우리는 정돈된 세상을 갈망하기 때문에

간단하고 헛된 해결책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복잡한 진실을 파고드는 일은 어렵고, 개인의 기쁨을 보장하지 않는 세상에서

희망을 품고 사는 것보다 마녀를 불태우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 p. 118

 

 

이렇게 두려움에서 기인한 분노가 성급한 비난과 근시안적인 보복이나 징벌로 이어지는 것처럼, 두려움은 자신의 취약함과 동물성을 가리고 회피하기 위해 특정 집단이나 사람을 혐오하는 태도와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특히 취약한 소수자 집단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으며 자신의 동물성을 회피하고 심지어 이를 초월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투사적 혐오’라고 불렀다. 이는 배설물이나 다른 체액들과 같이 일정한 특성을 공유하거나 죽음을 연상하는 동물과 인간의 사체 등에 대한,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한 ‘원초적 혐오’와 구분된다.

 

누스바움이 지적한 투사적 혐오는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진다. 이는 사람들 개개인의 행동에서뿐만 아니라 법과 사회 제도에도 반영되어, 각 집단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하고 다시 이러한 편견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소수자 집단은 더욱 배제되었고, 때로는 혐오 범죄의 대상이 되어 생명과 안전을 위협받거나 그러한 대상이 될 것이라는 불안을 마주해야 했다. 따라서 이는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뿐 아니라, 평등한 존중과 배려라는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공적 규범(p.133)을 흔들어 놓는다.

 

 

결국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피해도 계속 자신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면,

인간 사회에서 너무 흔한 전략의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

'우리가 아닌 그들이 동물이고 더럽고 냄새가 나는 대신 우리는 순수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발밑에 있다. 우리가 그들을 지배한다.'

이와 같은 모순적 사고가 골치 아픈 동물성과 자신과의 거리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다. - pp. 147-148

 

이와 같은 혐오는 사회적으로 건설적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혐오를 느낄 때 원하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회피이기 때문이다.

- p. 152

 

 

이처럼 분노, 혐오와 더불어 건강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를 위협하는 또 다른 감정 중 하나로, 누스바움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시기심’을 제시한다. 시기심은 불확실성과 불안 속에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를 증오하는 감정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만의 도덕적인 잣대를 들어 상대가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는 특히 경쟁과 분배의 문제와도 관련한다. 

 

앞서 언급한 분노와 혐오의 감정에 빠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우리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쟁과 분배에 대해 ‘제로섬 게임’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이러한 제로섬 게임 속에서 타인의 성공과 행복은 곧 자신의 실패와 불행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세상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우리는 평등과 상호존중, 신뢰 등의 가치를 지향하며 이를 위해 함께 논의하고 연대함으로써 더 큰 가치를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분노와 혐오, 시기심으로 인해 우리 자신과 타인 모두를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는 두려움의 함정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그리고 누스바움은 이것이 현실에서 드러난 사례로 ‘여성혐오’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두려움에서 비롯된 감정들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누스바움은 여성 혐오를 ‘견고한 이해관계를 지키겠다는 남성들의 결심(p.226)’이라고 정의한다. 여성이 소위 ‘남성의 영역’으로 들어오거나 남성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이를 막기 위해 여성을 비난하고 다양한 수단을 통해 여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들을 남성보다 더 육체적이고 동물적인 존재로 대하며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두려움의 토양에서 자라나 공동체의 가치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분노와 혐오, 시기심처럼, 여성혐오 역시 결국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태도와 방식은 아니다. 두려움은 너무 쉽게 문제의 본질을 가려버리고, 성급하고 일시적인 위안에만 머물러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의 함정은 특히 약하고 어리석으며 부도덕한 사람만이 빠지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 너무나 쉽게 빠져버릴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누스바움 역시 좌우의 진영이나 소수자 집단에 속해 있는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혹은 부당함에 저항하는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움에서 비롯된 분노와 혐오, 시기심에 빠져 중요한 가치들을 간과하게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무조건 차단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서로가 두려움의 함정에 더 깊이 빠지지 않도록 서로의 손을 더욱 단단히 붙잡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두려움에 흔들리는 우리를 붙잡는 희망과 연대의 끈


 

지금까지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말 그대로 어찌할 수 없이 자연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이어왔다. 특히 앞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위험을 피고자 했던 본능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했다. 비록 이렇게 이미 생겨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 이 감정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학습을 통해 정해진다. 이는 앞서 두려움에서 파생된다고 했던 분노, 혐오, 시기 모두 마찬가지다. 실제로 마사 누스바움 역시 감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규범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된다(p.40)’고 보았다.

 

그렇기에 이러한 감정들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마주보고 관리하며, 이를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발걸음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는 우리 사회에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꾸며, 공동체 안에서 어떤 가치를 위해 어떻게 노력해 나갈 것인지에 꽤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 속에 앞서 언급했던 복수, 혐오, 시기심에 대한 경고뿐만 아니라 이러한 감정들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다양한 측면의 제안을 함께 담아냈다.

 

먼저, 누스바움은 보복이나 징벌을 하겠다는 마음 없이도 부당함 그 자체에 분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분노를 그는 ‘이행 분노’라고 불렀다. 이는 ‘이미 지나가버린 고통을 숙고하기보다는 해결방법을 찾는 분노(p.108)’로서 문제의 해결과 실제 이를 위한 실천에 초점을 맞춘다. 누스바움은 ‘이행 분노’를 실천한 사람으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을 꼽는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이 강조했던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하는 태도가 ‘이행 분노’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고 본다.

 

물론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부당한 편견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사람들을 볼 때, 혹은 소수자들에 대한 괴롭힘과 폭력을 조장하고 이를 직접 행하는 사람들을 볼 때, 분노가 향하는 곳을 제대로 바라보고 행위와 행위자를 엄밀하게 구분해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믿는 열린 마음과 미래 지향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누스바움이 징벌 그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징벌을 어떤 의도에서 사용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징벌을 보복을 위한 수단보다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안녕을 지키는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또 미래의 범죄를 막고 범죄자를 무력화시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미래지향적인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분노 역시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실천의 계기로 작동할 수 있도록 분노의 방향을 스스로 조절하고 관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당연히 쉬운 일도 아니며, 때론 어쩔 수 없이 ‘나만 참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하고, 두려움과 분노에 사로 잡힌 비난을 건네는 것이 아닌 상대방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을 수 있는 이러한 태도는 꽤 전략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해 함께 행동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가치관에 완전히 동의하든 아니든 같은 사회 안에 살아가는 더 많은 사람들과 지지를 주고 받거나 조금이라도 더 합의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누스바움이 이야기하는 ‘이행적 분노’를 감정을 통제하고 도덕성을 지키는 차원에서만 실천하고자 한다면, 이는 너무 어려운 일일뿐더러 자칫 수혜적인 태도로 흘러갈 수 있다. 따라서 오히려 이렇게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접근하며,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에 집중해 작은 실천부터라도 시작하고 이어가는 것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누스바움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분노, 혐오, 시기심 같은 감정들이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태도 차원의 경계와 변화를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법과 제도, 종교와 예술 분야 등의 역할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이야기했다. 특히 투사적 혐오를 없애는 데 있어서 정책적인 지원과 문화 예술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편견없이 모든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으며, 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교육 계획의 수립과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편견이 개입되어 온 사법제도의 역사를 바로 보고 경찰 훈련 과정에서 암묵적 편견에 관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누스바움은 무엇보다 ‘혐오는 대상에 대한 환상을 먹고 자라므로,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이를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p.164)’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다양한 주체들이 일상 속에서 교류하고 직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주거와 학교의 진정한 통합이 이루어지는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자유롭게 어울리고, 자신과 타인을 ‘온전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를 위한 과정에서 문화예술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이 특히 인상깊었다. 문학과 코미디 장르의 TV 프로그램, 영화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과 여러 의제들을 다루는 문화예술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주체들의 존재와 삶을 인지하고 이들에게 공감하며 편견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다양한 차원에서의 접근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시기심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도 적용된다. 이를 위해 ‘제로섬 게임’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스바움은 제도적인 차원에서 사회 안전망의 구축이나 기본적인 권리와 경제적 안정의 보장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이는 사람들이 두려움과 시기심의 시작이 되는 무력하고 곤궁한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함께 상상하고 이를 위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므로 누스바움은 결국 두려움이 공동체에 건네는 위협을 넘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현실적인’ 희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너무 완벽한 미래만을 그리는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삶과 일상 속에서 ‘행동을 촉구하는’ 희망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의 밑바탕에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 이상으로 성장과 변화가 가능한 존재(p.266)’라는 믿음과,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또 최소한의 선을 행하고 변할 수 있는 인간(p.266)’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있다.

 

어쩌면 이러한 누스바움의 주장과 철학은 이상론에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누스바움은 희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너무 이상적인 목표를 품는 것을 경계한다. 그는 예술과 교육 기관, 연대 단체 등 일상의 영역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로 각자의 생각을 진지하게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이를 위해 모든 시민이 ‘최소한의 기본 권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역량접근법’을 제시했다. 그는 각각의 사회마다 다르게 구체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 다음과 같은 10가지의 핵심 역량을 정의한다. 

 

 

1. 생명 : 일찍 사망하거나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할 만큼 초라해지지 않는 상태로

평균 수명까지 산다.

2. 신체 건강 : 생식이 가능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며 적절한 영양과 주거를

보장받는다.

3. 신체 보전 : 자유로운 이동, 성폭력이나 가정 폭력 등으로부터의 안전,

성적 만족감과 생식에 대한 선택의 기회를 보장받는다.

4. 감각, 상상, 사고 : 기본적인 수학, 과학, 문자 훈련 등의 적절한 교육으로 함양된

인간적인 방식으로 상상하고 사고하고 추론할 수 있다. (...)

정치적, 예술적 표현이나 종교와 관련된 정신적 자유를 보장받는다. (...)

5. 감정 : 자신 이외의 사람이나 사물에 애착을 갖는다. (...)

두려움과 불안이 감정적 성장을 훼손하지 않는다.

(이 역량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인간의 성장에 중요한 유대 관계의 형태를

지지한다는 뜻이다.)

6. 실천 이성 : 선의 개념을 형성하고 각자 삶의 계획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종교 의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7. 관계

(A) 타인을 인식하고 배려하고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공존할 수 있다. 타인의 처지를 상상할 수 있다. 

(B) 자신을 존중하고 모욕당하지 않을 사회적 기반이 있다.

타인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존엄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이를 위해 서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민족, 계급, 종교, 국적에 따른

차별 금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8. 인간 이외의 종 : 동물과 식물, 자연계에 관심을 갖고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아간다.

9. 놀이 : 웃고 놀고 오락 활동을 즐긴다.

10. 환경 통제

(A) 정치적 :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정치적 선택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정치 참여의 권리가 있고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보장받는다.

(B) 물리적 : 재산을 소유할 수 잇므여 타인과 동등한 재산권,

동등한 고용 기회를 갖는다. (...)

 

- pp. 287-288

 

 

이러한 10가지 핵심 역량 역시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가치들을 사회적으로 합의하고 설득하며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 꼭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책을 통해 누스바움이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끊임 없이 시도하고 노력해 온 모습을 쭉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자신과 타인의 세계를 오가며 서로의 세계를 확장시켜가는 과정이 꼭 고통스럽고 두려운 과정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부정하고 외면하기보다는, 오히려 나 역시 이러한 감정들과 함께 타인에게 유독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겸손한 자세로 인정하고 이러한 감정을 제대로 마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사회에 함께 하는 타인의 존재를 제대로 인지하고 정의에 대한 합의 지반을 넓혀가며, 서로에게 ‘더 나은 미래’를 그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우리의 삶과 사회를 붙잡는 것은 서로의 일상 속에서 함께 만들어낸 희망과 연대의 끈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차근차근 다져온 사회안전망을 비롯한 다양한 법과 제도, 또 이러한 가치를 담는 문화예술이 더 많은 우리를 강하게 연결할 것이다.

 

 

 

김효중 컬쳐리스트 태그.jpg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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