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좀비’, 감염자를 죽여야만 하는 편리한 전염병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07.07 13:5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3555550099_vafAX6Ow_zombie-945622_1920.jpg

 


<부산행>, <킹덤>, <스위트홈>, <지금 우리 학교는>. 어느 날 인간성을 잃게 되는, 치료 불가능한 감염병. 기괴한 움직임과 생김새.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유혈 사태. 예전에는 매니악 한 소재였던 ‘좀비’가 이제는 시장을 휩쓸고 있다.

 

영화, 드라마, 웹툰, 게임 등, 장르의 구분 없이, 그야말로 ‘좀비 물’(또는 유사 좀비-감염병 아포칼립스 물)의 대 흥행 시대다. 물론 좀비가 발랄한 구석 하나 없이 징그럽기는 하지만, 극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들의 서사는 꽤 매력적인 면이 있다.

 

이렇게 한 가지 장르가 마구 쏟아지다보면, 의외의 공통점이나 문제점이 보이기 마련이다. 대표적으로는 역시 사람들이 폭력성에 무뎌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비 물이 폭력적인 이유가 단지 으깨고 부수기 때문일까. 죽고 죽이는 장면만 검열하면 좀비 물은 말끔히 비폭력의 세계로 넘어올 수 있는 걸까. 최근에 나온 좀비 물들을 바탕으로, 그들이 가진 폭력성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폭력성을 허용하기 위한 장치들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말에 우리가 떠올리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말랑한 살결과 따뜻한 체온이다. 그런데 좀비는 알다시피 살아있는 ‘시체’다. 때문에 좀비는 말랑말랑하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언어를 구사하지도 않고, 눈빛으로든, 말로든, 손짓 발짓으로든 의사소통을 시도할 수도 없다. 심장과 맥박도 뛰지 않는다.

 

좀비에게 남은 생명으로서의 기능은 ‘사냥’과 ‘본인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움직인다’ 정도뿐인데, 그건 인간적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그렇지만 좀비는 분명히 어느 정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증거로, 이성을 잃어도 직립보행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common1.jpg

영화 <부산행>

 

 

좀비는 인간과 매우 유사한 외형을 가졌으나 탈-인간화된 존재다. 우리는 좀비를 인간인 동시에 인간이 아닌 것으로 인식한다. 때문에 좀비 물에서의 살해 행위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의 자극을 가져가면서도, 윤리적 문제는 교묘하게 피해 갈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좀비는 주인공을 사냥하는 행동으로 먹이사슬에서 우위를 점하기까지 한다. 내 생존을 위협하는 인간이 아닌 것. 좀비를 거리낌 없이 살해해도 괜찮은 명분이다.

 

하지만 좀비를 살해한다는 말은 어딘가 부적절하다. 앞서 말했듯, 좀비는 이미 죽어 있기 때문에 또 죽일 수가 없지 않은가. 죽지 않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죽이는 것 이상의 행위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좀비를 상대할 때에는 ‘머리’로 상징되는 치명적 약점을 ‘파괴’하거나 불로 아예 ‘소멸’시키는 등, 특단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좀비 물이 화려한 액션을 갖추지 않더라도 극한의 자극을 가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이미 행위 자체가 매우 자극적이다.

 

이렇게 사람을 닮은 것의 머리를 으깨는 행위는 보편적으로 보기에 불쾌한 장면이지만, 이는 좀비 사태에서 생존하기 위한 유일무이한 필승법이기에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좀비는 엄연한 판타지다. 실제로 발생할 리 없는 재난에 이런 해결 방식은 괜찮지 않은가. 그런 말들로, 우리는 그런 것을 봐도 괜찮아진다.


 

 

다 살자고 마시는 사이다인데



‘살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말은 실로 어마어마한 편리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사태에서는 좀비에게 가책을 느껴선 안 된다. 살해에 뜸을 들이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전혀 연고도 없는 이들을 함부로 도우려 해도 곤란하다. 그러다 같이 위험에 빠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라는 말은, 반대로 ‘그럴 필요 없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사태에서는 좀비에게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전혀 연고도 없는 이들을 함부로 도울 필요도 없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미 얼굴을 아는 사람들도 예외는 없다. 가족, 반 친구, 이웃 사람, 동료 등, 누구라도 감염되면 감상에 젖을 시간 없이 죽여야 한다. 심지어 이러한 태도는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을 학습시키고 좀비 사태에 적합한 인물로 성장시키기까지 한다. 물론 때때로 주인공의 선한 의지가 상황을 이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끌고 와야만 한다. 답답한 전개가 따라오는 순간 제4의 벽 너머에서 비난이 날아 올테니.

 


jMx0RXY.jpg

넷플릭스 웹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이 ‘답답함’을 만드는 분야에서 흔히 말하는 ‘발암 캐릭터’가 빠지면 섭섭하다. 이들은 생존을 빌미로 좀비를 넘어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이득을 위해 악한 행동을 하거나,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로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민폐 짓’을 한다. 대체로 갱생도 되지 않고, 보는 이들을 답답하게 하기만 한다. 이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투입되는 것이 바로 ‘사이다’다.

 

그냥 사이다여도 안 된다. 발암 캐릭터’의 업보를 몇 배로 돌려주는 것이 요즘의 트렌드다. 다른 장르였다면 적당히 체면을 구겨주거나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좀비 물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체면 없이도 살아남아야 하는, 법 바깥의 세계니까. 그러므로 좀비 물이 ‘사이다’를 제시하려면, 이들을 좀비로 만들거나 고통받다가 죽게 만들어야 한다.

 

이 방식은 얼핏 시원한 인과응보 같지만, 사실 어떠한 갈등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 그 자체를 제거함으로써 경제성을 확보하고, 죽음을 통해 보는 이들의 ‘착한 마음’에 약간의 보상을 줄 뿐이다. 이미 발생한 갈등은 ‘발암 캐릭터’의 사이다 퇴장과 함께 쓸려가 조용히 스토리 중심부에서 멀어진다. 나 하나 살아남기도 힘든 극한의 좀비 사태니까 갈등을 일으킨 사람들은 다 없어져도 된다는 지독하게 편리한 해결 방식이다.

 

 


국민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국가



이 상황을 국가는 어떻게 타개할까? 예전에는 국가가 늑장 대응으로 비판을 사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나,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겪으면서는 ‘생각보다 국가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위기 상황에 빠르게 대처한다’는 설정도 꽤 많이 차용되고 있다. 이런 ‘유능한’ 국가는 감염병의 전파를 막기 위해 감염자 사살을 선택한다. 군대를 동원해 감염자를 최대한 없애는 것. 그것이 좀비 세계에서 국가가 국민을 지키는 방법이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국민을 사살해야 한다는 모순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쟁점이 하나 있을 것이다. 좀비는 국민인가? 이 쟁점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좀비가 되는 순간 인간이 아니라는 편리한 설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차피 인간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국가에서는 이 좀비-국민을 보호할 필요가 전혀 없어진다.

 


common.jpg

영화 <감기>

 

 

하지만 조금 너무하지 않은가. 국가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좀비를 죽이자고 단호하게 결정할 수 있을까. 약 10년 전, <감기>라는 영화 속의 대한민국은 감염자를 치료하지 않고 태워버리려다 발각되어 비판을 샀다. 그러나 좀비 물 속에서의 국가는 감염자를 태워버리는 바로 그 방법으로 유능을 증명해야 한다. ‘치료 가능성’ 자체를 삭제했기 때문이다.

 

간혹 '면역자'라는 설정이 등장하지만, 이는 순전히 운의 산물이다. 좀비는 정말 치료 불가능할까? 물론 작품 바깥의 우리는 좀비를 되돌릴 수 없다는 배경지식을 갖고 있다. 이제 그건 좀비 물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종의 클리셰가 되었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국가는 조금 다른 입장에 있다. 국가는 반드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입장이다. 아무리 좀비 물이 많이 나와서 <지금 우리 학교는>의 캐릭터가 좀비를 보고 <부산행>을 떠올린다고 해도, 국가까지 나서서 ‘<부산행>에서 그랬듯이 좀비는 죽이는 것이 답입니다.’라고 발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좀비를 죽여도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사라질 뿐이다. 감염자를 없애는 방역 방식으로 유능한 국가의 속 시원한 전개를 이끌 수 있는데,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13.jpg

넷플릭스 웹드라마 <스위트홈>

 

 

좀비 물은 극한 상황을 견디는 재난 물이다. ‘인간이 극한 상황에 어떻게 될까?’라는 주제 하나만으로 인간을 물고 뜯고 맛보며 쉴 틈 없이 달려간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며 보기에 좀비 물의 갈등 해소 방식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편리하다. 서로를 완전히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것. 살기 위해 서로를 모른 척하는 것. 좀비 세계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 범람하는 좀비 물에 익숙해져도 괜찮은 것일까?

 

결국 ‘좀비’라는 소재가 계속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인간은 어렵고 착하게 살아도 죽지 않는 세계를 필요로 하니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극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타인의 어려운 결심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 사실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렇다. 그러니 극한 상황에서도 편리하지만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재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김서인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