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문학과 기하학을 오가는 사진가의 작품 속으로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

인간의 삶을 기하학적으로 담아내는 방법
글 입력 2022.07.0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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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 그의 작품 속에는 묘한 매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아마 브레숑 자체가 이중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삶의 진정성을 포착하기 위해 누구보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일상 속을 파고드는 휴머니스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대상이 완벽히 정돈되면서도 기하학적인 미를 드러내는 순간에 흥미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독특한 예술관은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키워드로 일축 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현상할 때 어떠한 연출이나 크롭 등 인위적인 과정을 거치는 것을 거부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담고자 했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필름 카메라 여러 대를 손에 감고 다니며 대상이 ‘완벽히 미학적이고 절정의 순간’에 놓일 때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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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생 리자르 역 뒤편, 프랑스 파리 유럽 광장>을 보면 그의 작품 세계관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판자 사이의 좁은 틈으로 그 너머의 풍경을 훔쳐보고 있던 브레송은 한 남자가 개울을 건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마치 물 위를 거닐 듯 역동적인 남자의 몸짓과, 그 뒤로 펼쳐진 고즈넉한 역사 건물은 대비를 이루며 한마디로 완벽한 ‘결정적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저마다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브레송의 서문에 인용된 이 문구는 이렇듯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결정적 순간’을 표명하고 있다. 그는 본인 스스로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구도에 대한 내밀한 해석이 필요한 초기 작업과 이후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외부 세계에 대한 관찰자적 접근 두 가지의 세계 사이의 상호 작용을 강조했다. 언뜻 충돌하는 듯 보이는 이 두 세계 사이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지금부터 이러한 신박한 매력이 깃든 그의 작품 세계를 함께 들여다보자.

 

 

 

눈으로 포착한 질서를 박제하는 일에 희열을 느끼다


 

 

‘나는 사진이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붙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의 첫번째 세계의 키워드는 ‘기하학적인 질서’이다. 그는 사진이 지닌 영원의 힘을 알고 있었기에 항상 형식의 완벽함을 추구했다. 그는 사진 속 모든 요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배치될 때, 극한의 미학이 발현되고, 그 순간을 포착해 영원히 남기는 것이 사진가의 숙명이라고 믿었다. 이는 그의 초기 여러 작품들 안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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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세비아>라는 제목의 이 작품을 보면 브레송이 추구하는 기하학적인 질서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마치 미로처럼 켜켜이 배치되어 있는 건물들의 모서리, 두 소년, 그리고 원형과 사각형의 그림자들은 각자의 자리를 굳건이 지키며 장면을 채우고 있다. 이 풍경은 오른쪽과 왼쪽이 대칭되며 안정감 있는 구도를 그려냄과 동시에 다양한 각(角)이 상응하며 묘한 활기를 띠고 있다.브레송이 이 장면과 마주했을 때 얼마나 큰 희열을 느꼈을 지 과연 가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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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은 이렇듯 남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는 풍경의 매력을 캐치해 낼 수 있는 사진가였다. <스페인 마드리드>라는 제목의 이 작품을 보면 무엇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가? 대부분은 풍경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시선을 둘 것이다. 그러나 이 풍경의 구도를 온전하고도 운율감 있게 만드는 것은 이들의 뒤편, 건물에 해답이 있다.


이 풍경의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건물에는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의 창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안정감 있는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다른 각과 모양새를 가진 창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피아노의 선율을 듣는 것처럼 운율이 느껴지는 듯하다.

 

브레송은 이러한 기하학적인 요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감각적 쾌락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관람객들은 이렇듯 그가 숨겨놓은 기하학적 안정감을 가진 구도에서 어쩐지 눈을 떼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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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2분 이상 바라볼 수 있는 사진이다. 2분이란 굉장히 긴 시간이다. 그런 사진은 보고 또 보게 되는데 그래도 충분치가 않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렇다, 그의 사진은 신박한 구도를 통해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묘한 쾌감을 느끼게 하며 넋을 놓고 바라보게 만든다. 위 작품은 실제로 내가 2분, 아니 5분 이상 바라본 작품이다. 언뜻 보면 이 작품은 테두리가 불에 그을린 오래된 사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면, 삐뚤 빼뚤 무너진 장벽이 아이들이 놀고 있는 풍경을 감싸며 그러한 착시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구도가 가지는 신박한 트릭에 한 번 눈이 감기고 나면, 브레송의 카메라 렌즈에 비친 상황이 다시 한번 눈을 사로잡는다. 한바탕 비극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허물어진 장벽과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은 대비를 이루는데, 마치 장벽 너머로 그들을 훔쳐보는 듯한 우리의 관찰자적인 시선을 인식하고 나면, 어쩐지 ‘제3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씁쓸한 느낌이다. 그 사이 5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짧고, 덧없고, 위협받는 인간의 삶을 포착하다


 

 

‘사람 곁으로 다가갈 때는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다가가야 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 들거나 과격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순간 인간적이어야 한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1957

 

 

브레송의 작품을 나타내는 두번째 키워드는 ‘관찰을 통해 이끌어낸 인간성’일 것이다. 그는 마치고양이와 같은 태도로 인간들의 삶 주변을 맴돌았다. 그들이 자신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심히, 조용한 몸짓으로 곁을 맴돌다 피사체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냥감을 낚아채는 고양이의 동작보다 빠르게 셔터를 눌러 그 순간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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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선은 확실히 남달랐다. 위 작품은 인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조지 6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한 장면이다.

 

그러나 어떠한 설명이나 캡션이 없었다면 그 누구도 이 장면만 보고 황제의 대관식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대관식이라 하면, 으례 멋진 예복과 왕관을 갖춘 황제가 위엄 있게 카펫 깔린 길 위를 걸어가는 모습이 우리의 인식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브레송은 누구나 주목하는 대관식의 주인공 황제보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그들은 각자의 사정과 기대를 가지고 이 대관식에 참석하여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각기 흥분감, 기대감, 피곤함, 지루함 등의 다른 감정들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브레송에게는 그것이 화려한 황제의 대관식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오랜 기다림에 지친 것인지 모두가 모여 앉아 집중하고 있는 대관식이 시작되는 시간에 홀로 신문지 더미에 쌓인 채 기묘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는 양복 입은 신사의 모습이 우리의 눈길을 대번에 사로잡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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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하면 브레송은 손목에 감은 여러대의 라이카 카메라와 함께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역사적인 순간 속에서 극대화되는 인간의 감정, 그럼에도 이어 나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을 담아내기도 했다. 위 작품은 간디가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 후, 네로 수상이 그의 죽음을 군중들에게 알리는 연설을 장면을 담아 내었다.


생명을 비추던 밝은 빛이 꺼지고 사방은 빛을 빼앗겨 버린 듯 어둠에 잠겨 있다. 브레송은 통곡과 오열의 소리가 가득한 그 곳에 순간 출처를 알 수 없는 빛이 흐릿하게 어둠을 밝혀 군중의 슬픔이 수면위로 드러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삶의 표본이자 의지가 되었던 영웅을 잃은 그들은 슬픔에 젖어 포효하고 있지만, 사진 속에 멈춰버린 그들의 시간과 달리 현실에서의 시간은 단 일분의 기다림도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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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초상 사진을 찍는 방식은 사람들이 제자리, 즉 자신의 환경 안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서식지에 있는 동물처럼 말이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브레송의 남다른 시각은 그에게 가장 어려운 난제이기도 했던 초상 사진에서 더욱 여실 없이 드러난다. <집에서의 피에르 보나르>라는 제목의 위 작품은 말그대로 그의 집, 서식지에서의 보나르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이 사진을 건져 내기까지 브레송이 인내해야 했던 것은 나로서는 가늠조차 못해볼 인고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특별난 의뢰인들이 그렇듯 보나르는 카메라를 불편해했고, 좀처럼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브레송은 마치 투명망토를 두른 해리포터처럼 그의 곁에 공기처럼 존재하며 그가 보여줄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 작품 속 장면이다.


보나르는 자신이 작업 중인 성당을 그린 작품 앞에서 마치 축복을 내리는 우아한 성직자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어느덧 브레송과 카메라의 존재조차 잊고 작품에 심취한 나머지 그 속의 인물이 되어버린 듯한 보나르의 모습을 보고 브레송은 아껴왔던 한 방의 셔터를 눌렀고, 보나르의 순간은 그렇게 영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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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이 남긴 초상 사진들 중 단연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교각 위의 장 폴 사르트르를 담은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인물의 삶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과 기하학적 질서를 지닌 구도를 발견하는 브레송의 특징점을 모두 담아낸 사진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그것이 이 작품을 초상 사진의 아이콘으로 만든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의 얼굴에 물음표를 찍고 시작하는 것이 초상사진이라는 브레송의 말처럼, 장 폴 사르트르의 독특한 모습은 우리에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자아낸다. 어쩐지 위압감이 넘치는 그의 분위기에 사르트르의 눈빛으로 시선이 이끌리고 나면,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얼마간 그와 눈을 마주치고 나면, ‘아’하고 그가 가진 사시라는 신체적 특징을 그제서야 깨닫는 것이다. 이렇듯 브레송의 사진은 피사체를 깊게 마주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더불어 이 사진 속 인물에 더욱 집중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원인에는 교각이라는 공간이 만드는 안정감 있는 구도가 있다. 사진의 왼쪽 화면에 길게 이어지게 배치된 다리의 대각선 구도는 기하학적인 쾌락과 미를 보여줌과 동시에 오른쪽 구석에 위치한 인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배경이 되어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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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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