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오해를 견디는 일이다" [영화]

진실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든
글 입력 2022.06.20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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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 스틸컷.jpg

 

 

조용한 마리아 사랑병원에 엑스레이 사진 한 장이 나붙었다. 뼈 사진만 보고 누구인지 확정하기는 힘들다. 아무도 ‘누가’ 찍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고 사진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한다.


관객인 나는 사진의 주인공에 대한 답을 이미 갖고 있다. 그런데도 누가 찍었는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과연 저 사진의 주인공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를 궁금해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그 사람들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의심이 필요한 일도 아닌데.


다른 사람의 사진을 허락 없이 찍는 것은 분명한 범죄인데도, 누구도 그 사람을 잡아내 처벌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씁쓸했다. 인터넷에 사진이 올라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것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그게 너무 현실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은 의심의 불씨가 된다. 간호사 윤영과 남자친구 성민은 그 사진이 자신의 것이 아닌가 하고. 부원장은 그 사진이 윤영이 아닌가 하고. 그다음 날 병원에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는다. 갑자기 모두가 아프다며 병원에 나오길 거부한다. 과연, 정말로 아픈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대답할 수 없다.


윤영과 부원장, 두 사람은 진실을 찾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집을 찾아갔을 때 맞이한 진실은 ‘정말 아파서 쓰러져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그 사람을 시작으로 아프다고 결석한 모두를 믿기로 한다. 그 이후에 펼쳐진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믿어주기로 한다.


반지가 사라졌다. 윤영이 큰맘 먹고 사준 백금 반지. 그런데 동료의 발가락에 끼워진 반지, 어딘가 낯이 익다. 성원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료가 지갑을 잃어버리자, 기다렸다는 듯 돈을 줄 테니 반지를 팔라 얘기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반지는 성원의 것이 아니었다.


윤영은 어느 낮, 성원의 전 여자친구를 만났다. 전 여자친구는 그에게 맞은 적이 있다며 트라우마를 고백한다. 무시할 수도 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남자친구, 전 여자친구는 성원에게 악감정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윤영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의심의 싹은 마음에 이미 자리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윤영은 성원의 말을 들으며 자전거 운전을 하다 계단에서 크게 구를 뻔했다. 옳아, 의심의 싹이 고개를 내민다. 저 새끼. 날 죽이려 했을지도 모른다. 한 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니까 아무래도 같이 못 살겠다. 그렇게 윤영은 성원을 집에서 내쫓는다.

 

 

메기 스틸컷2.jpg

 

 

그리고 윤영은 성원에게 묻는다.


- 너, 여자 때린 적 있어?

- 어. 전 여친 때린 적 있어


메기가 튀어 오른다. 그리고 성원의 발밑이 무너진다. 성원은 온데간데없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싱크홀만 그 자리에 있다. 윤영이 무언갈 더 묻기도, 성원이 변명을 하기도 전에. 가해자의 이야기는 들어줄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한 결말이었다.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성원이 구덩이 밑으로 추락하는 순간을, 그리고 구덩이 아래서 윤영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장면을 돌려봤다. 납득이 가는 결말과는 반대로 불편한 감정을 맞이한다. 내내 성원이 전 여자친구를 때렸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망했다.


왜? 성원이 윤영에게 세 들어 사는 무능력한 남자라? 윤영의 말이라면 옳다구나 다 믿는 바보스러운 면 때문에? 모르겠다. 폭력성을 관찰할 수 없다고 폭력성이 없는 것은 아닌데. 의심을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의심을 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왜 그랬을까. 영화를 보고 후기를 찾아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감독이 설정한 인물이었을까?


영화를 보고 감독이 궁금해졌다. 이옥섭 감독의 인터뷰를 봤다.


짐작대로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변명의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맞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도 변명을 가질 자격도 없다. 현실에서는 폭력 피해자가 구덩이에 숨지만 영화는 냉정하게 성원을 싱크홀 안으로 내쫓는다. 싱크홀은 성원의 감옥이나 다름없게 됐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타르타로스가 생각났다. 일반적으로 신들의 감옥이라고 불리던 곳이니 폭력이 가둬지기에는 딱 맞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


영화 내내 의심과 의심을 쫓느라 도로에 뻥 뚫려있던 싱크홀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웃겼다. 도로에 그렇게 커다란 구멍이 뚫렸는데, 분명 재앙에 가까운 상황인데도 아무도 싱크홀을 신경 쓰지 않는다. 관객마저도.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내레이션이 귀에 자근자근 밟혔다. 전지적 메기 시점으로 함께 하는 영화는 계속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계속해서 의심하라고 등을 떠밀고 믿어보라고 손을 당긴다.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사람을 믿었을 때 발생하는지, 사람을 의심할 때 발생하는지 누구도 답을 줄 수는 없다. 쉽게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질문하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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