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와 나의 꿈을 복원하는 ‘오마주’

글 입력 2022.06.0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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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를 바라고 시작한 게 아니었던 일이, 직업의 형태로서 세상 밖으로 나와 여러 기준과 잣대에 놓이면서 움츠러드는 모습을 많이 목격한다. 즐거웠던 일이 도리어 고통을 줄 때 인생의 한 조각이 연소한 거뭇한 흔적은 쓰라리게 느껴진다. 타올라 없어진 공간은 다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더욱 공허하다. 종종 거기서 꿈과 자신의 필연적인 관계를 발견하지만, 그만큼 소중하기에 함부로 건드리기도 어렵다. 처음이라 무모했고 그만큼 괴로웠던 상실을 아로새긴 채 꿈을 다시 찾아가는 이야기는 그래서 그 어떤 히어로물보다도 용기 있고 강인한 서사라고 생각한다. 속력이 늦고, 정해진 순서와 관계없는 걸음으로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초능력이 있거나 힘이 센 영웅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모험이기에 그 자체로 단단한 격려가 된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예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작품에 쉽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이런 이유일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기만 해도 즐거웠던 어린 시절의 회상, 그림을 꾸준히 그리기 시작하면서 삶에 생긴 변화,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설명할 때 왠지 모르게 솟아나는 자신감을 작품에 녹아내며 예술을 향한 애틋한 고백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와 낙담 속에서 그 마음을 지켜내야 했을지 생각하면 뭉클해진다. 모진 풍파를 헤치고 마침내 도달한 진심을 관객으로서 대면했을 때, 수많은 꿈을 현실 속에서 포기해야 했던 지난날에 대한 위로는 말없이 쏟아진다. 우리 모두가 예술의 힘에 고요하게 압도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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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마주》의 주인공 지완은 막 세 번째 영화를 낸 감독으로,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며 위태로워진 입지에서 자신의 능력을 회의한다. 가족도 만류하고 동료도 포기하는 영화 일에 관한 고민이 깊어가던 중 지완은 한국의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인 홍은원 감독의 영화 ‘여판사’를 복원하는 일을 맡게 되고, ‘돈은 안 되지만 의미 있는 일’에 재미를 붙이던 찰나 필름의 일부가 유실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필름을 찾기 위해 지완은 홍은원 감독의 흔적을 따라 한국 곳곳을 누비며 ‘여판사’에 얽힌 다양한 인물과 상황을 만난다.

 

‘여판사’를 만나기 전 지완은 거의 낭떠러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영화는 계속 흥행하지 못하고, 집에 가면 엄마의 영화는 재미가 없어서 못 보겠다고 하는 아들과 ‘꿈꾸는 여자와 살면 외롭다’고 하는 남편이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 무엇보다 지완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실존적 위기감이다. 벌이가 넉넉지 않아 태풍 예보에도 깨진 창문을 수리하지 못하고 쌀이 떨어져 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설상가상 같은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까지 들리며 며칠째 방을 비우고 있는 옆집 여성의 추운 빈자리를 느낀다. ‘여판사’가 기반으로 한 실제 사건의 여판사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비화를 들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사람이 참 많이 죽는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지완은 죽음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영화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감각은 언뜻언뜻 나타나 지완을 찌른다.

 

사라진 필름을 찾아 감독의 자취를 좇는 과정에서 지완은 감독과 더불어 ‘여판사’의 제작에 참여한, 혹은 감독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당시의 인물들과 만난다. 감독이 자주 갔던 다방의 주인, 감독의 딸, 영화의 편집기사, ‘여판사’를 상영했던 영화관 주인, ‘여판사’의 배우…. 하지만 노인이 된 그들의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자료들은 먼지 쌓인 채 낡아있다. 그러나 ‘나도 이제 곧 죽어야지’라며 한탄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지완이 느낀 것은 역설적으로 선연해지는 삶에 대한 의욕이었으리라. 많은 것을 기대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한 듯 겹겹이 주름이 잡힌 눈가와 바랜 눈동자는 ‘여판사’와 관련한 단어를 들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초롱초롱한 아이의 것이 된다. 그들에게 영화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지완은 이들과 만나면서 오히려 영화 때문에 살 수 있겠다는,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 품었을 생각을 자신에게 증명했을 것이다. 지완은 이다지도 무용하고도 소중한 것에 삶을 바쳐왔던 사람들에게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감독의 삶을 하나씩 발견하며 영화뿐 아니라 자신의 꿈까지도 복원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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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완이 순탄치 않은 여정을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것은 지완을 따라오는 홍은원 감독의 그림자 때문이기도 하다. 지완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마다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은 수십 년 전 감독의 그림자는 지완 앞에 나타나 그의 걸음을 붙잡거나 보챈다. 지완과 마찬가지로 세 번째 영화까지 찍은 후, 그 이후로는 평생 영화를 만들지 않은 감독의 삶은 여러모로 지완과 많은 부분이 겹쳐 보인다. 그 때문인지 지완은 자신의 영화인 것처럼 사명감을 느끼고 복원 작업에 충실히 임한다. 이 작업은 어느 순간 뚝 끊긴 감독에 대한 기록과 ‘여판사’의 필름, 그리고 지완의 꿈을 동시에 이어붙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서가 쉽사리 찾아지지 않고 지완의 건강까지 악화되면서 프로젝트는 필름을 찾지 못한 채 미완성 상태로 끝맺게 된다. 하지만 지완은 간직하고 있던 감독의 모자에서 필름 일부를 발견하고, 이를 실마리로 사라진 필름을 모두 찾게 된다. 단지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라는 이유로 검열당해 잘려나간 내용이었다. 핵심적인 장면도 아니고 프로젝트는 이미 끝나 직업적인 성과와도 무관하지만, ‘여판사’를 상영한 낡은 영화관에서 구멍 난 천장 사이로 새는 빛에 필름을 비춰 확인하는 지완의 표정은 필름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한 듯 벅차 보인다. 단순히 필름 한 도막이 아니라 감독의 생애를, 잃어버린 자신의 꿈을, 영화에 대해 품었던 두 사람의 지고한 사랑을 찾아낸 것이다.

 

복원된 필름이 상영되는 곳은 영화관이 아닌 필름을 같이 이어붙인 ‘여판사’ 편집기사의 집 한구석이다. 할머니가 된 그는 여성이 담배를 피울 뿐인 짧은 영화를 감상하며 지완에게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당부하고, 지완은 담배 한 대 피우겠느냐며 농담을 던진다.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닌 홍은원 감독에 대한 마지막 배웅이자, 여성 감독으로서의 검열이나 제약에 방해받지 않고 영화를 계속해나가야겠다는 위트 있는 다짐처럼 들린다. 영화는 지완이 복원한 바로 그 장면이자 홍은원 감독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여성의 뒷모습을 오래 비추며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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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완이 앞으로도 영화를 계속 만들며 꿈을 좇을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영화가 가능하게 한 어떤 삶들의 존재를 지완이 알아차렸으며 이로 인해 죽음보다는 생에 더 가까운 감각으로 자신의 꿈을 바라보게 되었으리라는 건 분명하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옆집의 여성은 알고 보니 장기 여행을 갔다 온 것이었고, 지완은 안도감에 다소 엉뚱한 감사 인사를 건넨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던 존재, 지완이 긴 여정 끝에 발견해낸 것은 바로 그러한 삶과 꿈이었다. 대학을 자퇴하고 시를 쓰겠다는 아들의 꿈이 미덥지 않았던 지완은 이제 그의 시에 감동한다. 지완은 삶이 제자리에 고이지 않도록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꿈의 파동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이 그가 홍은원 감독을, 그리고 현실의 벽 앞에서 날개를 접어야 했던 모든 사람을 마음 깊이 존경(Homage)하는 방식이다.

 

죽었다고, 사라졌다고 생각한 꿈이 사실은 긴 여행을 떠나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엔 생존해 있다. 당장은 아득해 보이지만, 원래도 우연했던 첫 만남처럼 생각도 못 한 때 삶에 다시 찾아와 요동칠 것이다. 지문처럼 각각 다른 그 꿈의 주인은 오직 나 하나 뿐이기에, 세상의 기준과 상관 없이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용한 꿈으로 유일한 삶을 일구며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의 필름을 이어붙이고 있는 모든 이가 검열과 제약 없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기를, 이 영화가 표한 찬사의 마음을 빌려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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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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