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버랩 절망, 절망3 [도서/문학]

<<칵테일, 러브, 좀비>> 中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글 입력 2022.04.2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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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 <오버랩 절망, 절망2> 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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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밥



이 소설의 주제와 아이러니를 상징적으로 잘 담고 있는 소재는 바로 초밥이다. 필자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역시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오늘 문득,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찬석은 이미 내가 사랑했던 찬석이 아니고 나 역시 그때의 내가 아닌데 아무렴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내가 사람을 죽여서까지 지켜 냈던 나의 사랑이, 삶을 견디지 못하고 저 아래로 곤두박질쳐 바닥을 기는 것을 보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끔찍한 남자의 얼굴을 한 사랑하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데에도 질렸다. 계속 어렴풋한 과거 안에만 갇혀있는 나 자신도 혐오스러웠다. 그냥, 이라는 말만큼 적절한 것이 없었다. 그동안 수많은 날들을 그래도 버텨 왔는데, 이렇다 할 어떤 계기도 없고 사건도 없기 그냥, 모든 것을 관두고 싶었다. 그 와중에 오직 초밥이 먹고 싶었다. -p.154
 

 

그동안 가정을 이루고 난 뒤의 영희의 심리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녀는 가정 폭력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견뎌내고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이상한 여자로 그려졌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그녀의 모든 심리가 낱낱이 드러난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힘들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가장 사랑해야 할 대상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람의 얼굴을 닮아 가는 것도, 영희에게는 그 모든 순간이 끔찍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영희는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모든 것을 관두고 싶었다’며 기구한 운명 앞에 완벽히 체념하고 항복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초밥이 먹고 싶다고 한다. 모든 것을 관두고 싶다는, 어쩌면 죽음까지도 암시할 수 있을 말을 하는 와중에 입맛이 살아있다는 말이 함께 하는 상황은 굉장히 모순적이다. 어떻게 죽고 싶으면서 동시에 초밥이 먹고 싶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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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밥은 이렇게 이 대사에서도 모순적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복합적이고 절묘한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우선 영희는 사실 자신이 초밥을 먹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아들이 초밥을 사러 갔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영희가 ‘초밥이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이 죽을 날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초밥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세호가 듣기에 이 초밥의 의미는 좀 다르다. 단순히 살기 위해 먹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이 생겼다는 현상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상징할 수 있다. 삶을 위한 욕구와 희망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세호가 비참한 죽음 앞에서 고작 초밥을 제때 못 드린 점을 후회하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삶’을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자신이 그 외침을 끝내 돕지 못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초밥은 삶, 삶의 희망, 삶의 의지를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사실 어떤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은 별 이유가 있어서 드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 음식이 먹고 싶으니까 먹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들의 기구한 운명에도 별 거창한 원인이나 이유가 없다. 그냥 그렇게 될 이야기였고 처음부터 그런 운명이었다. 그런 점에서 초밥이 먹고 싶다는 상황은 곧, 이유도 원인도 없는 비극적인 운명 그 자체를 표현하는 상징일 수 있다.

 

초밥이 죽음과 삶을 동시에 상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초밥은 모순적이다. 그리고 초밥은 그 모든 욕망을 헛되게 만드는 운명을 상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모순적이다. 그런 복합적인 초밥의 상징은 이 소설의 전반적인 아이러니와 닮아있다. 초밥이 무엇을 상징하든 그것은 이 소설의 주제와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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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회에 가할 수 있는 비판



사실 필자는 소설을 읽으며 소설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를 하나 더 포착할 수 있었다. 필자는 당사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이야기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정말 이들의 이야기는 완전히 닫힌 이야기에 불과했을까? 그러다 문득, 시선이 가족 외부로 향했다. 우선, 스토킹과 가정 폭력 중 스토킹을 보자. 영희가 스토킹을 당한다고 생각했을 때,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 소설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부재한다.

 

 

경찰서에도 가 보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기 떄문에 조취를 취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전부 나를 신경이 과민하고 히스테릭한 여자로 보는 것 같았다. -p.116

 

 
주위 사람들 중에는 어차피 해는 끼치지 않는데 뭐 하러 신경 쓰느냐는 이들도 있었다. -p.117
 


소설의 거의 맨 첫 부분에 나왔기에, 이 부분은 어느새 독자의 머릿속에서 잊히거나, 그저 스토킹에 대한 현실 인식을 비판하는 말로 읽혔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어쩌면 이 부분이 꽤 핵심적인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영희의 스토킹에 큰 관심을 두고 이를 심각하게 여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까? 영희가 똑같이 낯선 남자인 찬석에게 기대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한 밤길을 걸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세호는 영희를 더 이상 스토킹할 수 없었고 찬석은 영희를 위해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면, 그래서 영희와 찬석이 만날 일이 없었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까. 어찌 되었건 아마도 영희와 세호가 각각 혼자서 운명과 사투를 벌이는 일보다는 가능성이 높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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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찬석의 가정폭력은 어떠한가. 여기에는 아예 타인의 시선 자체가 나타나지도 않는다. 찬석이 가정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 수조차 없다. 밤늦게 엄마와 아들이 손을 잡고 정처 없이 골목을 배회해도 그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웃은 단 한 명도 없다.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 않아 독자들이 생각하기도 쉽지 않다.

 

이는 가정 폭력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와도 맞닿아있다. 일단 외부인이 알기가 쉽지 않다. 가정 폭력은 지극히 사적이며 얼마든지 드러나지 않을 수 있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 중 단 한 명이라도 이들의 삶을 알아차렸다면 어땠을까. 가정폭력이 발견되면 제대로 해결될 수 있는 사회라면 어땠을까. 더 거슬러 올라가, 애초에 찬석이 실패를 딛고 일어날 수 있도록 그와 가족을 방치하지 않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영희는 무력하게 찬석에게 맞다가 죽는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렇게 소설에는 사람들이 부재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부재이기도 하고, 구조적인 차원의 부재이기도 하다. 작가가 비극의 현실을 독자들에게 내밀하게 들이미는 것 외에 다른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바로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90년에도, 현재에도 아무도 영희와 세호를 돕지 않았다. 그 또한 운명의 한 부분이었다. 그들의 무관심은 악마의 장난을 아주 쉽게 이루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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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소설 속에는 참 여러 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다. 소설은 복잡한 아이러니를 통해 한 가족의 비극을 ‘흔하지 않게’, 면밀히 끝까지 들여다보아야만 하는 이야기로 그려낸다. 그 아픔은 누구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초밥이라는 소재에서는 삶과 죽음, 운명을 가로지르며 주제를 전달하고 슬픔을 심화시키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사회적인 무관심이 져야 할 책임까지도 발견해낼 수 있었다.

 

재미도 있었지만, 단순히 ‘재미있다’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소설이라 좋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인지, 이렇게까지 절망적인 이야기가 독자들과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독자들이 늘어나면 어떨까. 적어도 앞으로 생길 세호와 영희의 이야기는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그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 작가는 이토록 잔인하고 절망적인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이것은 흔하고 흔한 이야기이다. -p.111
 

 

이 첫 문장에부터 담긴 아이러니를 보라. 이 소설은 전혀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복잡한 이야기가 짧은 단편소설 한 편에 담겨있다. 기꺼이 사정없이 찔리고 찔려보라.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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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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