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잔잔한 눈보라 속에서: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공연]
-
2018년 영국에서 막이 오른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이 국내 초연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십 대 소녀 ‘로리’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빠를 떠나보낸다. ‘로리’는 북극 탐험가가 꿈이었던 아빠를 대신해 그의 유골함을 가지고 홀로 북극 여행을 떠난다. 앞서 세상을 떠난 수염쟁이 탐험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나서는 ‘로리’의 성장 스토리.
여성 1인극으로, 이번 초연 공연은 유주혜, 송상은 배우가 ‘로리’역으로 캐스팅 되었다. 공연은 ‘로리’가 아빠를 떠나 보내는 여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공연의 무대세트 사진이다. (이외에도 ‘헤븐 마니아’ 인스타그램에서 공연 관련 사진을 볼 수 있다.)
무대는 고요하면서도 신비로웠다. 무대의 우측으로 난 경사를 올라가면 눈조각들이 떠다니는 북극이, 경사를 내려오면 적막한 나무 책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북극을 꿈꾸던 아빠의 책상이다. 책상 위에는 지구본, 탐험가 난센의 책, 그리고 아빠의 일기장이 있다. 자칫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공간은 죽은 아빠의 공간들로 한 곳에 모인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무대의 벽이 인상적이었다. 생각해보면 ‘벽’이라 하기에는 커튼에 가까웠던 듯 싶다. 푸른 색의 벽은 얼핏 보면 북극으로 보인다. 이는 북극이 ‘로리’를 감싸는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견고한 벽이 아니라 흔들리는 커튼의 형식을 띤 것도 한 몫 했다. 지구의 끝, 모든 것이 얼어붙는 추위의 땅이 ‘로리’를 따뜻하게 껴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모든 사실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무엇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지 선택해야 한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함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로리’에게는 끔찍했던 장례식이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장례식으로 표현된다. 실상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가 평생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미지의 땅으로 이미지화 되기도 한다. 하물며 북극은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지리적 북극, 자기적 북극, 지자기적 북극, 접근 불가 북극, 천구의 북극… 무려 5개로 구분된다. 이처럼 사람들은 같은 대상에 각자만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또는 현실과는 무관하게 대상을 새로운 의미로 탈바꿈 시키기도 한다.
그렇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단순히 개개인이 느낀 그대로, 제멋대로 기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그렇게 ‘믿기 위해’ 의미를 담는다. 극은 바로 이 지점을 짚는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속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슬퍼하며 아빠를 보낼 준비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로리’는 다른 사람들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홀로 북극 여행을 떠난다. ‘로리’가 엄마 몰래 아빠의 유골함을 들고 북극으로 떠난 건, ‘로리’가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무모해 보이는 여정에는 생전 아빠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픈 ‘로리’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아빠를 조금이라도 더 잘 보내주었다고, 생전 아빠가 원했을 것이라고 믿기 위한 마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의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별다를 것 없는 장례식에 애써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는 말을 덧붙인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이 조금은 더 특별하고,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로리’와 엄마는 먼 타지의 땅에서 서로의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 나름의 의미를 담아 아빠와 남은 자신들을 위해 마지막을 준비한다. 이처럼 어린 ‘로리’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며 받아들이고, 나아가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이 극은 북극으로의 여정이 아니라 ‘로리’의 성장 여행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
개인적으로 극이 꼭 잔잔한 눈보라 같았다. 이질적인 표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저 평범한 삶도, 그 개인에게는 눈보라 치는 날들일 수 있다. 나는 ‘로리’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다른 나라에서, 나는 전혀 해본 적 없는 경험들을 하는 ‘로리’의 모습에 공감하는 이유는 나 또한 평범한 눈보라의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잔잔한 눈보라 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시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