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담담하고 고요한 조제와 영석의 사랑, 그 너머에서 [영화]

영화 <조제> 분석 및 비평
글 입력 2022.03.13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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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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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책 『어린 왕자』에서 모두가 ‘모자’일 것으로 추측한 그림을 두고, 어린 왕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해당 이야기는 단지 아이의 순수함을 나타내는 것 이상의 함의가 있다. 서 있는 층위에 따라 시각이 달라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단 시각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속한 위치와 권력 여하에 따라 어떤 목소리는 유독 부각되고, 어떤 목소리는 소거된다는 점만 고려해 봐도 그렇다.

 

여기, 이러한 사회의 암묵적인 룰에 따라 목소리가 묻히곤 하는 ‘조제’가 있다. 영화는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조제를 대학생인 ‘영석’이 우연히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후 둘은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언뜻 고요하고 담담한 듯 보이는 그들의 사랑 너머에는 뿌리 깊은 불평등이 있었다. 낡고 추악하지만, 종내에 둘의 사랑을 잠식시킬 정도로 강해서 외면하기 어려운 사회의 민낯 말이다.

 

 

 

1. 바깥으로 밀려난 조제의 목소리, 그 안에서 주체성을 획득하려는 노력


 

조제와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정봉’의 증언에 의하면 조제는 이상하고 거짓말도 잘하는 데다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독특한 인물이다. 영석 역시 조제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이는 영석이, 스코틀랜드 국적의 아빠 밑에서 태어났다는 조제의 말에 “할머니가 조제는 고아라는데요?”라고 반문한 데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조제가 한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점은 조제의 말을 사람들이 비상식적인 무언가로 인식한다는 사실이다.

 

왜일까. 남성이고 비장애인이며 이성애자인 사람들이 주류로 상정되는 세계에서, 비기득권 자의 목소리는 변방으로 밀릴 때가 잦다. 여성이고 장애인인 조제의 목소리가 줄곧 수면 아래로 내려앉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때 여성이란 단순히 생물학적인 구분 하에 지칭되는 성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소수자나 소외계층 등 역학관계에서 약자의 위치로 상정되는 모든 대상을 통칭한다.)

 

대개 법의 언어는 절대적이며 공정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법조차도 조제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일례로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그 과정을 전부 진술해야만 하고, 사실관계를 입증해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언어 체계에는 모든 것을 형용하는 데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을 올바르게 서술해야 한다는 것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요구인 셈이다. 더욱이 장애인의 경우 최근까지도 이동권을 두고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법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그 자체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기실 그 안에는 위와 같은 모순점이 존재하는 셈이다.

 

조제가 자신에게 이국적인 이름을 붙이고, 자신만의 세상을 개척하고 생성하려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법의 맹점에도 불구하고, 정체성과 자율성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조제의 주민등록증도 말소돼 있었다는 사실 역시 궤를 같이한다.

 

이는 영석이 조제에게 “왜 정봉이의 엄마를 자처했냐”라고 묻자, "엄마에 왜가 왜 필요해. 엄만 그냥 엄만 거지.”라고 답한 데서 정점을 찍는다. 정봉의 엄마를 자처한 조제의 행위는 단순히 고아인 정봉이를 안쓰럽게 여기고 보듬어주려던 목적 이상의 함의가 있다. 낳은 엄마를 진짜 엄마로 보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자신이 직접 엄마의 범주를 규정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쥬류와 비주류,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단번에 흐트러뜨리고 세상의 규격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2. 영석과의 관계로 표상되는, 주류와 비주류의 이분법적인 구도


 

이렇게 영화에 등장한 기득권과 비기득권과 같은 대립 구도에서, 영석은 대개 기득권의 위치를 점했다. 나아가 영석은 자신보다 밑으로 상정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적인 면모를 잦게 드러냈다. 이때의 대상이란 때로는 조제가 되기도, 영석을 일방적으로 좋아한 후배가 되기도 했다.

 

우선 조제와의 관계를 살펴보겠다. 영석은 줄곧 조제를 안쓰럽게 여기면서 마땅히 조제를 도와줘야만 하는 위치로 자신을 인식했다. 영석이 선물로 받은 스팸을 불필요하다고 여기자 조제에게 건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말이다. 중요한 건 이를 두고 조제가 보인 반응이다. 조제는 “쓰레기를 줘서 고맙다”라고 비꼬았다. 자신을 밑으로 보는 영석의 태도에 못내 불편함을 느낀 것이다. 물론 영석이 불순하고 악한 목적으로 행했으리란 것은 아니다. 약자를 돕는 것을 ‘선한 범주’에 놓는다면 영석의 행위는 과연 선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석은 조제가 원치 않는 선행을 베풀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상대가 속한 사회적 구도를 공고히 했다는 점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영석의 행동이 순수한 선인지에 관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다. 영석은 자신의 행위를 맹목적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서 모종의 우월의식이라도 얻었다면 말은 달라진다. 어쩌면 영석의 봉사정신이 타인을 위한 게 아닌, 나르시시즘적인 욕망의 발현으로 읽어낼 수도 있는 셈이다. 무상으로 집을 고쳐준다는 영석의 말에 조제의 할머니가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라는 받아친 대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영석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적인 면모는 후배에게 건넨 영석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후배의 고시원을 방문했을 때 영석은 ‘원래 고시원이 다 이렇게 좁은지’를 묻는다. 영석은 이것보다 좀 더 좋은 집 구할 수 있지 않냐고 덧붙였다. 그러자 후배로부터 "저 이것보다 더 좋은 집 사려면 휴학해야 해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누군가에겐 선택이 가능한 문제가, 누군가에겐 불가피한 차선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영석은 인지하지 못 했음을 보여주는 대화였다.

 

 

 

3. 메타포와 미장센으로 구현된,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관점


 

이렇듯 영석이 타인의 위치와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위치에 따라 응시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각종 메타포와 미장센을 통해서 재현해냈다.

 

그 중 첫 번째 매개체로는 ‘꽃’이 있었다. 영석과 조제가 꽃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조제가 자신의 출생을 두고 거짓말을 하자, 영석은 불편함을 느꼈는지 떨어지는 꽃을 "예쁘다"고 하며 화제를 돌렸다. 뒤이어 등장한 "꽃이 죽는다. 아름답게."라는 조제의 나레이션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영석의 표현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었다.

 

사실 꽃은 죽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 죽음과 무관한 위치의 사람은 그 낙하가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 구태여 짚을 필요가 없다. 반면 온갖 차별을 경험하며 방어기제를 쌓아온 조제의 경우는 다르다. 영석은 예쁘다는 단순 감상에서 끝났지만, 조제는 그 너머의 것을 읽어낼 수 있었던 셈이다.

 

다음으로 ‘위스키’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도 대립 구도가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이는 앞서 기득권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던 영석이 비기득권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주목해야 한다.

 

영석은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한 여교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도의적으로 분명한 문제가 있으나 그런 점은 차치하고, 둘의 대립적인 권력 관계에 주목해보길 바란다.) 그런데도 영석은 기득권인 교수의 단 한 번의 언질로 일자리를 박탈당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김지혜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이 흔들릴 때 사람은 차별을 느끼고 불평등을 경험한다고 한 바 있다. 영석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영석은 교수의 권유에 따라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다”던 비싼 위스키의 맛을 봤다. 그리고 “이게 이런 맛이었구나”하는 반응을 보인다.

 

본래 위스키는 조제가 먹고 싶어 했지만 손에 넣을 수 없는 무언가였다. 이전의 전개에서 조제가 위스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뽐냈지만, 영석은 조제의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사회의 쓴맛을 보고 난 뒤에는 달라졌다. 영석은 자신이 원래 있던 위치에서 아래로 강등되었을 때야 조제의 난해하고도 이상한 언어를 비로소 해독하고 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과 밖’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대립 구도가 재현됐다. 인물이 바깥으로 밀려났는지, 안전하게 내부에 편입돼 있는지의 구분으로 말이다. 가령, 원래 영석이 속한 곳은 안전한 중심부의 세계이며, 조제가 속한 곳은 낯설고 비정상적인 주변부의 세계다. 여기서 영화는 각기 ‘바깥 사회’를 중심부로 설정하는 한편, ‘고립된 조제의 집’을 주변부로 그려냈다. 이때 바깥에서 카메라로 둘을 비추기도 하고, 안에 두 인물이 함께 있는 장면을 담아내기도 하는 방식으로 각자가 속한 사회적 위치를 재현해냈다.

 

 

 

4. 조제와 영석의 사랑과 좌절


 

한편 공고해 보이던 구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조제와 영석의 ‘사랑’이 있었다.

 

조제는 영석에게서 자신과의 차이를 느끼며 다신 오지 말아 달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잠시 후 대문을 넘어 영석에게 “가지 마”라는 본심을 내비쳤다. 이때 영석은 무릎을 꿇고 조제와 입을 맞춘다. 비로소 자신이 점하고 있던 기득권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가장 낮고 수평적인 자세로 조제와 동등한 교감을 한 것이다. 이 뒤에 둘이 사랑을 나누는 것은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섞였음을 시사한다. 숱한 차별 속에서 방어기제가 극대화된 조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위와 같이 영석을 붙잡는 장면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너머의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 단번에 납득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자신의 곁에만 머무르라는 조제의 바람과 달리, 쉽게 좌절되고 만다. “여기에만 있으면 굶어 죽어. 일을 해야지.”라는 영석의 일침이 둘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위 발언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선 경제적인 부분의 뒷받침이 필요함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조제에겐 괴리감이 느껴지는 발언으로 들릴 여지가 있다. 기본적인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한 그에게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부터 둘 사이에는 조금씩 균열이 일어났을 것이다. 둘의 관계는 마치 영화의 마지막 부근에 등장하는 고장 난 관람 차를 탄 장면과 유사하다. 관람 차를 타고 올라간 둘은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었다. 어떤 장애물 없이 마음껏 사랑하고 싶어도, 자의로 컨트롤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 봉착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는 조제가 아쿠아리움에서 이별 멘트를 건네는 계기로 작용했다.

 

"우리는 쟤네들이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만, 물고기들이 보기엔 우리가 갇혀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갇혀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어, 우리 둘이라면. 저 중에서도 행복한 물고기가 있겠지. 이제 괜찮아. 외롭지 않아. 네가 내 옆에 없다고 해도 난 네가 옆에 있는 걸로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조제와 영석은 이별을 하고 나오는 길에 함께 꽃길을 걷는다. 이때 다시금 조제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꽃들이 죽는다. 예쁘게, 조용하게 죽는다.” 그러나 영석은 이전과 달리 ‘예쁘다’고 하지 않는다. 죽는 걸 지켜보고 관조하는 대상이었을 때는 이상적이고 평화적인 감상만 들지만, 그 죽음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달라진다. 더는 그러한 층위에만 머무르기 어렵다. 영석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위스키의 맛을 알고, 이게 이런 맛이었구나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런데 기실 이러한 둘의 결말은 영화의 도입부부터 예견돼 있던 것이었다.

 

영화의 도입부, 영석이 조제를 카트에 태워 데려가는 장면에서 둘은 중앙선의 안쪽을 가로지른다. 이때 공교롭게도 둘이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둘이 같은 곳을 향함에도 다른 쪽을 바라보게 되리란 것을 암시하는 셈이다. 위 장면은 어쩐지 결말부에서 각자의 자동차를 타고 나아가는 장면과 병치된다. 다 사회가 가로막는 이상 둘은 영영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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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제의 한계점과 장점


 

<조제>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라는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은 개봉한 지 20년이 다 되어감에도 여전히 멜로 영화의 명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조제>가 개봉했을 당시 아쉬운 평가들이 쏟아진 것은, 어쩌면 원작이 올려놓은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여 필자는 <조제>를 보고 난 뒤에 원작을 찾아봤다. 그러자 각색 과정에서 놓친 바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의 <조제>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다소 평면적이다. 원작의 조제는 바깥세상을 동경해 나가고 싶어 한다는 욕망으로 점철되었고, 주체성을 가지고 뚜렷하게 행동하는 양상을 띠었기에 차이가 더 두드러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조제>에서는 여성 캐릭터들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적 차원에서 이용된다는 점도 아쉬웠다. 할머니와, 후배 캐릭터, 또 영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교수 캐릭터가 그러했다. 특히 조제의 할머니는 원작에서 조제의 욕망을 방해하는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했으나, 여기에서는 극에서 대사를 지우더라도 전개되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별다른 특색이 없었다.

 

이렇게 뚜렷하지 않은 등장인물의 묘사는 감정선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단점을 초래했다. 특히 조제를 향한 영석의 마음은 호기심에서 출발한 사랑이라고 명명할 수 있어도, 후배를 향한 영석의 마음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후배는 결국 영석과 결혼하는 대상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공백은 치명적이다. 개연성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화 <조제>는 장점 역시 보유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인물들 사이의 여백은 양날의 검마냥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둘의 상황을 은유적인 상징으로 그려낸 것은, 조제의 담담한 시선 너머에 있는 우리의 삶과, 경계, 그리고 그 너머를 바라보게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감벤이 『불과 글』에서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깃든 미지의 공백을 무지하게 내버려 두고, 신비스러움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역할이라고 역설한 것을 말이다. 물론 영화라는 장르에 이러한 잣대를 내밀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에 따라, 추상적이고 모호한 지점에 있는 조제와 영석에게서 그 너머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때때로 말이 주는 가시적 측면보다 정적과 침묵이 주는 감정의 울림이 더 묵직하게 다가오듯 말이다.

 


참고문헌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07.17.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책세상, 201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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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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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슈슈
    •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보게 된 리메이크판 조제에서 영석의 감정이 너무너무 궁금했어요.
      영석에게 조제가 사랑이긴 했던 건지 동정이였던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며칠을 힘들게 했고
      감정 정리가 안 돼서 이곳 저곳 검색하다 여기까지 흘러와 어지럽던 마음을 가라 앉히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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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쇼리
    • 슈슈슈슈님 안녕하세요! 추예솔입니다. 저는 늘 글을 쓰면서도 내 글을 끝까지 봐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슈슈님이 성심성의껏 달아주신 댓글을 보고 감사해서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어요. 매일같이 혼잣말을 늘어놓다가 불쑥 대답이 돌아온 것만 같아요.

      다시 읽어보니 부족한 점도 많이 보이고 슈슈님이 언급해주신 부분들을 더욱 깊이 있게 다루지 못 했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지럽던 마음을 가라 앉히셨다니, 어찌됐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드린 것 같아 다행이에요. 늘 갑갑했는데 슈슈님 덕에 다시 글을 이어갈 이유가 생긴 것 같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안온한 하루 되시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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