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의 색을 바라보는 우리: 마르크 샤갈 [시각예술]

모더니즘 작품을 심도 있게 감상하는 과정
글 입력 2022.02.2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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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Marc Chagall)

 

그는 언제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는다. 여러 감상자가 작품에 담긴 내용을 분석하지만, 언제나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는 ‘내 그림을 보는 이들이여, 당신들 좋을 대로 생각하시길!’이라 말했다. 샤갈의 그림에서만큼은 명화를 바라보는 부담을 덜 수 있을까? 그러나 그의 자유분방함이 갈피를 못 잡게 할 때, 하나의 감상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당신을 초현실의 세계로 인도한다.

 


샤갈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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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을

 

 

샤갈은 구 소련 비테브스크(Vitebsk) 출생의 화가이다. 그의 출신이 중요한 이유는 작품에 있다. 그는 ‘내 그림 중에 어린 시절을 보낸 비테브스크 마을에서 영감을 받지 않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고향을 애틋이 그리워했다. 그의 작품에는 가축과 시골 마을이 자주 보인다. 염소, 꽃, 닭 등의 요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게 샤갈의 공식처럼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나는 각각이 무엇을 상징하느냐보다는 그가 이러한 표현을 통해 고향을 회상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염소가 그려진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는 나도 모르게 그림 속 샤갈처럼 염소의 눈을 바라보며 교감하는 느낌을 받는다.

 

 

마음에 떠다니는 모습의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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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은 무엇인가 공중부양하거나 뒤집힌 모습을 많이 그렸다. 그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으며 다양한 미술 사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사물이 하늘을 나는 모습도 초현실주의적 표현방식이라고 흔히 분석된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샤갈은 특정 학파에 포함되는 것을 부정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표현에는 자신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는 어렸을 적 심심하면 지붕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곤 했다. 지붕 위에서 그림을 그릴 때의 황홀한 감정을 잊지 않고 훗날 작품 활동을 할 때에도 그 느낌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항상 고향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는 샤갈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한다. 샤갈의 작품에서 공중부양하는 모습을 볼 때면 창작 당시에 그가 느꼈던 행복의 감정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를 몽상가라 부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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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bist Landscape

 

 

샤갈은 20대가 되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다.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예술 사조는 당시 주류였던 입체주의이다. 그의 그림에서도 목이 잘리거나 몸이 분리된 입체주의식 모습이 많이 보인다. 하다못해 ‘Cubist Landscape’라는 작품명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샤갈은 어느 유파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은 비이성적인 꿈을 그리는 입체파나 초현실파가 아니며 실제 추억을 작품에 표현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샤갈은 자서전 ‘Ma vie’에서 ‘나는 더 이상 다비드나 앵그르의 신고전주의,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세잔이나 입체주의 추종자들의 초기 드로잉의 재구성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말인즉슨 지금까지 신경을 썼다는 것 아닌가? 나는 샤갈이 어느 한 예술 유파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표현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각 작품의 의미를 최적으로 전달   했다고 생각한다. 즉, 그가 당대 여러 사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암흑의 시기

 

샤갈은 제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으며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그의 생애는 그야말로 유랑민 자체였으며 안정적일 수 없었다.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는 그에게도 이런 침체기의 작품은 암울하며 어둑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노란색과 같은 온화한 계열뿐 아니라 파란색, 검은색 등의 차가운 계열도 사용된다. 학자들은 샤갈의 암흑기를 흔히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가난해졌을 때 혹은 첫 아내인 벨라가 죽었을 때라고 한다. 그리고 대중은 샤갈의 밝은 작품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내 눈에는 샤갈의 어두운 작품은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보인다기보다는 간간이 나타난다. 그는 에펠탑이 보이는 정경을 삭막하게 표현하거나 눈 내리는 모습을 쓸쓸하게 나타내곤 했다. 이는 행복한 삶 속에서도 한구석 존재하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표현이 아닐까?

 

 

영원한 뮤즈: 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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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샤갈의 첫 번째 아내는 벨라(Bella)이다. 벨라가 죽은 후에 딸 이다(Ida)는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를 소개했지만 그녀들은 그저 샤갈의 편한 작품 활동을 위한 버팀목이었으며 어쩌면 변치 않는 마음속의 뮤즈는 벨라였을 것이다. 나는 그가 벨라를 그리는 모습을 보며 특이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작품만 봤을 때는 생각지 못했는데 샤갈이 벨라를 자신과 닮게 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작품에서의 샤갈 본인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물론 작가만의 개성적 특징이 그림에 반영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벨라를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소중히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샤갈은 벨라를 처음 만난 날에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눈, 그녀의 검은 눈은 얼마나 둥글고 큰가! 그것이 바로 나의 눈, 나의 영혼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벨라는 그의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따뜻한 색채를 잃지 않은 데에는 사랑의 힘이 크게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샤갈을 그저 색채의 마술사, 따뜻한 고향의 이미지로만 떠올리는 감상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태로운 현실에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고 포근한 작품을 만들어낸 그에게 감사를 느끼게 된다. 그는 ‘예술에도, 삶에도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색깔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사랑의 색이다’라고 말했다. 어두운 작품도 여럿 있지만 그가 따뜻한 화폭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사랑의 색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구경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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