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어린 영웅 삐삐에게 [도서/문학]

용감한 9살 아이가 나에게 남긴 커다란 울림
글 입력 2022.02.2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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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출처 불명의 유전자가 하나 있다. 가족과 친척을 통틀어도 좀처럼 잘 찾아볼 수 없는 그 유전자. 바로 '덕질' 유전자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무언가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덕질은 삶의 동반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최애' 캐릭터를 정하지 않고, 뒷이야기가 어떨까 궁금해서 끊임없이 상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정말 크게 놀랐다.


나의 덕질 유전자가 발현된 가장 첫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는 종종 책을 읽어주시곤 했는데, 그 덕에 나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세계로, 그중에서도 '삐삐 롱스타킹'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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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삐삐>

 

 

불에 타는 듯 새빨간 머리와 얼굴을 뒤덮는 주근깨를 가진 아이.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에 두 발을 올린 채 거꾸로 자는 아이. 밥 먹듯이 재치 있는 거짓말을 하는 아이. 삐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너무 삐삐에 푹 빠진 나머지, 나는 시공주니어의 삐삐 시리즈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꼬마 백만장자 삐삐,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사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 그게 당시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애정 표현이자 덕질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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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주니어 삐삐 시리즈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흘렀다. 며칠 전 아끼는 책만 모아둔 책장 앞에서 서성이는데 익숙한 초록색 책등이 새삼 눈에 띄었다. 삐삐였다.


23살이 되어 다시 읽은 삐삐는 여전히 11살의 내가 사랑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삐삐는 말을 단숨에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센 힘을 못된 사람들을 혼내고 아이를 구해 주는 데 사용했다. 불이 번지고 있는 집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고, 태연하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정말 대담한 영웅이다.


삐삐는 강도와 밤새 춤을 추기도 했다. 두 강도가 삐삐의 금화를 훔치기 위해 삐삐의 집에 몰래 들어오자, 삐삐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을 밧줄로 묶어 두었다. 살려만 달라는 강도의 애원에 삐삐는 그들을 경찰에 신고하거나 쫓아내지 않고, 그저 함께 춤을 추자고 제안했다. 폴카 춤을 막 익힌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삐삐와 두 강도는 밤이 새도록 춤을 추었는데, 삐삐는 그들을 배웅하면서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금화를 한 닢씩 나눠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아저씨들이 떳떳하게 번 돈이에요."


단순히 강도를 삐삐의 힘으로 제압한 다음 내쫓는 것에서 끝날 줄 알았던 이야기를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방향으로 매듭을 지을 때, 나는 바로 지난 기억을 생각해 냈다. 아, 이게 바로 내 최애 에피소드였잖아!

 

두 강도가 이 사건 이후에도 도둑질을 하고 다녔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후로는 떳떳하게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삐삐 시리즈를 읽으며 마음대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여자아이 캐릭터가 주는 쾌감을 처음 경험했다. 삐삐는 내가 빠져들고 좋아할 수밖에, 덕질할 수밖에 없었던 캐릭터였다. "모두들 안녕. 내 걱정은 말아요. 난 언제나 잘해 나갈 테니까."라는 말을 정말 자기다운 방식으로 꾸준히 증명해 내는 캐릭터에게 어떻게 안 빠져들 수 있을까?


삐삐의 나이를 두 배 하고도 더 나이가 많은 이 시점, 나의 어린 영웅에게 부족하지만 진심을 담은 이 사랑의 글을 보낸다. 내 첫 기억 속 사랑하는 캐릭터가 너여서 정말 행복하다고. 정말 끝내주고 짜릿했던 덕질 경험이었다고.

 

 

[류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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