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죽음과 마주하는 일 - 당신이 살았던 날들 [도서]

글 입력 2022.02.1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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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 평소에도 죽음에 관하여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30살까지만 살고 싶다는 친한 친구의 말부터 초중고 학창시절을 내내 함께했던 반려견의 죽음, 중학교 적 멀찌감치 이름만 알고 지내던 동갑내기의 죽음, 허구한 날 네가 틀렸니, 어쩌니 옥신각신하면서도 남몰래 조금은 좋아한 적이 있던 초등학교 시절 짝꿍 친구의 죽음, 유난히 작은 키와 인자한 미소가 썩 잘 어울리던,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촌 할아버지의 죽음, 외국에서 생활할 당시 함께 지내던 호스트 가족 가운데 내게는 양아버지와 다름없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뉴스에서 시시각각 접하는 그 수많은 죽음의 행렬들까지. 잊을 만하면 어딘가에서 슬그머니 튀어나와 마음을 휘적휘적 뒤집고 가는 이 죽음에 관하여 나는 자주 생각한다.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접할 때면 마음 한구석이 착잡해지면서도 죽음이 늘 우리 곁에 머무는 존재라는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근 몇 년간의 행보를 미루어볼 때, 엄마 역시 자식 못지않게 죽음에 관하여 관심이 많으신 듯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 이후의 삶’에 조금 더 초점을 두신다고 해야 하나. 특정 종교에 딱히 열성적이지 않은 우리 집안으로선 죽음 이후의 삶에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거나 죽음 이후에 영혼들이 모이는 세계가 있다거나 생명은 무한한 형태로 환생을 거듭한다거나. 엄마는 생전에 죽음을 경험했거나 영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전해 들으며 죽음 이후의 삶과 세상에 관해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시곤 한다. 한때 [죽음에 관하여]라는 웹툰을 보고서는 별안간 눈물이 차오른 적이 몇 번이던지. 그 세월이 벌써 몇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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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심심찮게 죽음의 그림자를 맞닥뜨리며 사(死)에 관한 끈질긴 사유를 거듭하는 것은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곱씹으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면면이 넘나드는 인간의 생에 관하여 다시 한번 치열하게 고민해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조금 특별하다. 저자 델핀 오르빌뢰르는 1974년생 랍비이자 철학자, 작가의 삶을 살고 있다. 작가 개인의 삶도 상당히 흥미로운데, 그는 이스라엘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파리에서 기자로 활동한 후에, 뉴욕에서 랍비가 되는 과정을 밟았다. 오르빌뢰르는 프랑스의 세 번째 여자 랍비라고 한다. 책을 펼쳐 듦과 동시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질문이 있다면 ‘그래서 랍비가 뭔데?’라는 물음이었다. 책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의심할 수 없는 교리를 가장 강력하게 의심하는 것이 랍비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전한다.


총 11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저자가 랍비로 살아가면서 목도한 여러 죽음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저자가 의학을 공부하면서 처음 접했던 죽음이기도 하고, 종교적 극단주의에 희생당한 (그리고 현재까지도 희생되고 있는) 유대인들의 죽음이기도 하며, 동료의 죽음, 친한 친구의 죽음, 아이 사람의 죽음, 또는 낯선 타인의 죽음이기도 하다.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그 죽음의 향연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뿌리내리는지 지켜보자고, 오르빌뢰르는 말한다. 읽기 전부터 어딘가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 책은 예상외로 무겁지 않은 독특한 문체를 유지하며 탈무드와 성서에 관련된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적극 개입시킴으로써 다방면으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가 부족한 탓에 이따금 작가의 말과 해석에서 진행 속도가 더딘 부분은 있었으나 그만큼 낯선 세계에 대한 의식이 확장되는 경험을 누렸음은 물론이다.


‘랍비’에 관한 지식이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저자는 첫 장에서부터 독자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

 

 

랍비의 일이란 뭘까? 단연, 의례를 집행하고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성서」의 텍스트들을 번역해서 그것들을 읽을 수 있게 해주고, 한 전통의 목소리들을 각 세대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그 전통은 새로운 독자들을 통해 또 다른 세대에 전달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내 직업과 가장 엄밀하게 가까운 직업명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바로 이야기꾼이라는 이름이다.


천 번을 되풀이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에게 새로운 실마리를 건넴으로써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게 나의 소임이다. (..) 우리의 거룩한 이야기는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 통로를 연다.


- 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 중에서


 

내게 특히나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장례식에서의 랍비의 역할이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장례문화에만 익숙해져 있는 내게 이들의 장례문화는 다소 낯설고 생경한 어느 것이었다.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현대 유대인들의 경우 고인이 사망하면 최대한 빨리 장례식을 치르고 땅에 묻는다고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사망 날짜 혹은 그다음 날 바로 땅에 묻어야 한다고도 전한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당일, 유족들이 랍비인 오르빌뢰르에게 곧바로 연락을 취하는 것은, 이러한 유대 문화에서 기인한 관습적인 삶의 형태일 테다. 랍비는 유족들의 입으로 전해 들은 고인의 이야기를 랍비의 언어로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역할을 한다. 추도사를 타고 흐르는 랍비의 목소리와 말을 통해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은 고인의 생애를 회상하고, 돌이켜보는 과정을 거친다. 저자의 말처럼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 통로를 여는’ 랍비의 소임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오늘날 유대인의 장례식은 대부분 전통적인 규범을 엄격히 준수하지 않는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장례문화와 더불어 이제는 고인의 소망이나 조금 더 친밀한 요소들, 예컨대 음악과 사진을 곁들여 고인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개성적인 장례식을 여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건 몰라도 장례식의 추도사를 포함하여 고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중대한 역할을 생면부지인 한 랍비에게 맡기다니! 으레 장례지도사가 형식적으로 행사를 안내한다든가 고인의 삶을 회고하는 이야기꾼이랄 것이 없는 한국의 장례문화가 떠올라 새삼 색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책에서 흥미로웠던 또 다른 지점은 마찬가지로 우리네 문화와는 판이한 여러 유대 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예컨대 사람이 매장되는 순간까지 고인의 시신 가까이에 초를 켜두어야 한다든가 (초가 살아 있는 영혼의 존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의 채비를 매듭짓는 마지막 사항으로 수의의 가장자리를 꿰매야 한다든가, 시신을 그대로 땅에 묻는 매장(埋葬) 풍습이 주를 이룬다는 점 등이 새롭게 다가왔다. 화장(火葬) 문화가 발달한 한국의 경우와 달리 유대 문화에서는 여전히 화장이 극도로 터부시되며 보수파 유대교에선 엄격히 금기시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주검을 예우하는 뜻이 담겨 있어 정통파 성향의 랍비는 화장을 선택한 고인의 장례식 집전을 단칼에 거절하기도 한단다. 한국과 정반대의 모습을 띠는 장사(葬事) 풍습 외에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많은 유대인 가족이 식구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환자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이었다. 이는 해당인의 정체성을 바꿈으로써 악의를 품고 그를 찾아올 초자연적 불청객을 속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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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유대교의 이런저런 문화를 접하다가 오래전의 의문이 해소되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했다. 바로 유대인들이 무덤 위에 돌멩이를 올려 두는 이유. 오래전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서 들었던 의문의 실마리가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풀리게 된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의 엔딩 부분에는 쉰들러로 인해 살아남은 실제 유대인들과 그의 후손들이 영화의 배역들과 함께 차례로 등장하며 그의 묘지 위에 돌멩이를 올려 두는 장면이 나온다. 흰 국화를 주로 올리는 우리네 문화와는 달리 ‘왜 돌멩이를 올려 두는 걸까?’라고 궁금증을 품던 당시의 나에게 이제는 조금 당당히 답해줄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무덤을 꽃으로 장식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대신, 매우 상징적인 이 작은 돌들을 무덤 위에 올려놓는다.

 

오래전에 죽은 자들을 길가나 들판에 매장할 때,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들과 특히 ‘코헨(제사장)’이라고 불리는 계급의 일원에게 반드시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이 제사장 가문의 후손들은 「성서」 율법에 따라 주검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된다. 죽음과 접하면 부정을 탈 것이고 성전의 사제로서 그들의 소임을 다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결국, 무덤 위에 놓인 돌멩이들은 지나가는 이 코헨들에게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알리는 표지였던 것이다.


폐쇄적인 묘지의 발달과 더불어 조약돌의 전통은 이어졌지만, 거기에 더욱 상징적인 다른 의미들이 접목되었다. 꽃이 시드는 것과 달리 조약들은 머무르며 기억의 힘을 말한다. 조약돌은 살아남은 자들의 삶에서 죽은 자들이 차지하는 변치 않는 자리를 이야기한다.


- 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 중에서



저자는 책의 첫 장에서 사람들로부터 엇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말한다. 죽음에 그렇게 가까이 있어도 괜찮은지, 그렇게 매일 애도자들 옆에 있는 게 힘들지는 않은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오르빌뢰르는 애써 이 물음들을 회피하곤 한다며 남모를 솔직함을 덧붙이기도 했다. 말마따나 사람들이 좀체 드나들지 않는 곳을 부지런히 오가는 일이 그의 직업이긴 해도 저자의 글에서는 죽음을 생각하면 으레 떠오르는 무거움이나 우울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리어 글쓴이 내면의 단단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각 이야기에 적당한 묵직함이 실려 고인의 삶을 진정으로 기리는 마음이 전해지면서도 오르빌뢰르는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주목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저자의 말과 글은 죽음을 통해 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

 

어릴 때부터 드문드문 드나들곤 했던 한국의 장례식을 떠올려보면, 매우 엄숙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릴 적의 기억이 일부분 희석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곳에 ‘랍비’와 같은 이야기꾼이 없었음은 분명하다. 있었다고 한들, 고인과는 생판 모르는 남이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고 추도사까지 진행하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책에서 랍비가 들려주는 유대교 문화를 통해 우리의 장례문화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됐다. 특정 문화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례식에서 집전되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사뭇 달라졌다. 그러니까 죽음을 너무 무거운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지 않냐고, 죽음 이후의 영을 기리면서도 조금은 유쾌한 장례식을 만들어볼 만하지 않냐는 생각 등이 머릿속에서 저항적으로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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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는 실로 ‘유쾌한 장례식’이 등장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를 자동으로 떠올리게 하는 미리엄의 장례식 현장은 글을 읽으면서 도저히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의 중후반부에 소개되는 이 유쾌한 장례식은 돌이켜 나의 장례식을 그대로 떠올려보게 만들기도 했다. 나도 미리엄의 장례식처럼, 미래의 조문객들에게 죽음은 그다지 슬픈 것이 아니라고, 꼭 장례식이 엄숙하게 진행될 필요는 없지 않냐고 쩌렁쩌렁 외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녀처럼 유쾌한 장례식이 미래에 펼쳐졌으면, 랍비와 같은 이야기꾼을 통해 나의 생애가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환기되었으면 하는 멋모를 바람이 생겨났다. 그러나 책에서도 말하듯, 죽음(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고인의 의사보다 고인을 애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의무에 더 큰 가치를 둔다는 저자의 말대로 장례식까지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건 너무나 큰 욕심이겠지.


책을 읽으면서 나의 생을 스쳐 간 이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짧지만 강렬했던) 나의 죽음, 나의 장례식까지 떠올려보게 되었다. 번번이 ‘아,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농반진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도 하지만, 저자가 말하듯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죽음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그토록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도리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고 싶다는,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생의 의지가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로나로 날려버린 근 2년의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살고 싶은 욕구가 근래 들어 더욱 강하게 드는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 사태가 도대체 언제 끝이 날지, 비로소 회복된 일상은 또 얼마나 짜릿하고 소중할지 직접 오감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싶기에 매일 바이러스의 문턱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요즘이다. 책의 부제처럼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이 있고, 죽음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오늘도 죽음에 관한 책을 읽고, 생에 대한 의지를 한층 단단하게 다져본다.



우리가 튼튼하게 세운 모든 것이 결국 마모되거나 사라질 때, 약하고 일시적이며 빈틈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지나간 존재의 입김은 증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숨을 불어넣고, 우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간다.


- 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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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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