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너의 관점을 수집할 수 있다면 - 언더스터디

관점 수집가의 꿈
글 입력 2022.02.03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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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이면서도 여럿이다.


무수히 그어진 경계선들 사이에서 어느 한 곳에 찍힌 점, 그것을 관점이라 부른다. 고정된 위치 말이다. 점을 하나만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종, 성별, 나이, 직업 등 자신이 담겨 있는 곳에 전부 점이 찍혀 있다.

 

미디어나 작품을 통해 새로운 위치를 습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내가 서 있는 곳부터 출발하는 것이 관점이다. 나는 한 곳에 있으면서도 여러 곳에 있을 수 있다. 다른 곳에 위치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되어 봄으로써, 타인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문득 드는 의문 하나, 점들은 모두 동일한 크기와 선명도를 가졌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어떤 점은 무엇이든 포함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누구에게도 비하지 못할 만큼 강력하게 새까맣다. 이런 막강한 힘을 이용해 다른 것들을 통제할 수도 있다. 이것이 권한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관점과 일정량의 권한의 소유자다.


어떤 사건은 누구에게는 가혹하지만, 누구에게는 축복이다.


 

티저포스터_(주)레드앤블루.jpg

 

 

<언더스터디>는 관점과 권한에 집중하는 연극이다. 약 110분의 러닝타임 동안 해리, 제이크, 록산느 세 사람은 각자의 위치에 서서 사건을 바라보며 권한을 회초리처럼 휘두른다.


아무도 없는 공연장 무대 위, 흥행을 목표로 제작된 상업 영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배우가 있다. 그의 이름은 해리. 자신의 연기와 작품에 대한 신념은 누구보다 확고하지만, 그 확고함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은 마땅하지 않다. 그는 언더스터디(출연하는 배우가 갑자기 대체되어야 할 경우를 대비하여 똑같은 배역을 연습해놓는 사람을 뜻함)의 언더스터디니까. 타 먹을 일 없는 보험금과 마찬가지인 신세다.


해리가 호박씨 까듯 깍아내린 상업 영화의 주인공, 제이크는 출연 가능성이 미미하게라도 있는 그냥 언더스터디다. 프란츠 카프카의 미공개 작품(가상)에서 주인공 역할을 연습하러 모인 제이크와 해리는 서로를 삼켜버릴 듯한 맹수의 눈으로 쳐다본다.

 

제이크는 별 볼 일 없는 무명 배우인 해리가 영화 흥행에 성공한 자신과 같은 역할을 연습한다는 사실에 심통이 나고, 해리는 텅 빈 제이크의 연기를 반복해서 따라 하며 못마땅해한다. 무대 감독 록산느는 무사히 리허설을 끝내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들이 자꾸만 벌어진다.

 

 

 

배우와 덜 유명한 배우, 그리고 배우였던 무대 감독



배우 두 명과 무대 감독 한 명. 이들 중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반짝 흥행에 성공한 배우 제이크, 다른 건 몰라도 연기 철학만큼은 확고한 해리, 무대를 지휘하는 감독 록산느. 이 세계에서는 인지도가 제일이다.

 

그다음의 권한은 연출자에게 있다. 제이크는 대본에도 없는 동선과 대사를 해리에게 강요하고, 록산느도 그가 군말 없이 따를 것을 종용한다. 꼭 필요한 동선과 대사도 아니었지만, ‘그저 언더스터디’일 뿐인 해리에게는 입이 있어서는 안 된다. 리허설은 제대로 진행될 리 없고, 각자의 입장 표명만이 공연장을 시끄럽게 떠다니고 있다.

 

 

언더스터디_기사사진3.jpg

 

 

록산느는 해리의 자리를 위협하며 말없이 따르라 한다. 매섭게 배우들을 쏘아붙이는 그도 사실은 감독으로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한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을 꿈꿨던 배우이기도 했으며, 또 한 때는 해리의 연인이기도 했으니까.

 

연극 <언더스터디>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다양한 관점을 충돌시키며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내고 또 해소하게 한다.

 

 

 

무대 뒤의 숨은 권력자



이 연극에서 이름이 끊임없이 불리지만, 정작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가 있다. 음향, 무대 장치, 조명 등을 담당하는 오퍼레이터 바비다.

 

록산느는 바비의 이름을 목이 쉬어 대도록 외치며 리허설에 맞는 장치 작동을 요청하지만, 바비는 지시를 무시한다. 무대는 요지부동이거나 제멋대로 움직인다. 바비는 원하는 사람 없이 흘러가는 노래방 반주처럼 세 사람에게 특정 장면을 요구하고 있다.

 

세 사람, 아니 네 사람의 요구 혹은 요청은 연극 리허설을 지연시키고 때로는 오작동시킨다. 하지만 잠시 중단된 빈틈 사이로 대화를 가능케 만들기도 한다. 조금 삐걱거릴지라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며, 상대를 자신의 위치에 세운다.

 

각자의 입장을 듣는 110분의 여정은 피곤하기도 하지만, 보람차기도 하다. 연극 <언더스터디>를 통해 해리, 제이크, 록산느, 그리고 바비까지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관점을 수집할 수 있었다. 기꺼이 그들의 대역이 되었다.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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