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와인과 인생은 다르지 않다 - 인생 와인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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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식을 잘 만든다. 모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도 있고, 쿠킹클래스에서 강사로 일한 적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주방 일에 도가 텄으니 요리 경력은 햇수로 이제 10년에 접어든다. 자랑할 만한 재능은 알리는 게 좋다고 생각하므로, 당당히 말하고자 한다. 나는 남부럽지 않은 요리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예술에 꽂힌 열정만 아니었다면 이미 요식업계에서 일하고 있을 터였다.
내가 요리의 꿈을 잠시 접은 이유는 예술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사생활을 알리고 싶지 않기도 하거니와, 직업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으니 이 부분은 넘어가겠다. 이처럼 여러 사정이 얽혀 있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입으로 ‘요리를 꽤 합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내기란 쉽지 않다.
나중에라도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꺼낼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무의식에 숨겨진 비루한 고정관념을 엿볼 기회이기도 하다. 언젠가 지인에게 내가 요리할 수 있다고 얘기하니, 어디 문화센터에서 강좌라도 들었냐는 식의 비웃음을 받았던 적이 있다. 나도 마냥 부드러운 사람은 아니라서 삐죽거리는 대답을 하며 나름대로 나를 소개했다.
재밌는 점은, 나의 실력을 자격증으로 증명하고 싶지는 않다는 이상한 고집이 있다는 것이다.
요리는 비전문가도 이유 없는 자부심을 느끼기 쉬운 분야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를 실력으로 갈라치려 한다면 말없이 한식이나 양식 자격증을 보여주면 될 텐데, 그게 내키지 않는다. ‘술부심’이 있는 사람에게 붙잡혀서 의도치 않게 술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면, 내가 여러 주종을 공부했다는 것을 구구절절 알려주기보다 주조 관련 자격증을 꺼내면 되는데. 그게 싫다.
나 자체로 증명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랄까. 그래서인지 자신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요리를 했던 것 같다. 왜 사람들은 냉장고 속의 총각김치가 어머니의 손맛으로 담근 것이라 여길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할머니가 별다른 자격증 없이도 손주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아무도 그 실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도 자격증 없이 척척 김치 담그고 장 담글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나를 증명해야 하는가? 나는 요리를 특정 집단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굳어진 관념을 깨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자격증을 따지 않고, 부러 과한 자랑을 하지 않는다.
요리와 음식은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내면을 돌아보고 내실을 다지는 데 필수적인 생활 양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등의 방송을 시청하거나, 관련 서적을 읽고 지식을 쌓는 일은 나의 작은 행복이다. 이런 매체를 통해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음식을 사랑하고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특히 책을 읽을 때면 나의 자아를 최대한 내려놓으려 한다. 우리의 인생과 와인의 역사, 종류마다 다른 특징을 가진 와인을 비교하는 책인 <인생 와인>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덜어내고 작가의 관점에서 와인을 바라보고, 내 생각과 비교하며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
<인생 와인>의 저자 크리스 배는 사업가다. 그러니 사업가의 관점에서 와인을 마시고, 공유하고, 알린다. 사업의 목적은 금전적 이익을 내는 것이므로, 이 책의 목차는 ‘돈을 벌고 싶을 때’ 마시는 와인, ‘돈을 벌 때’ 마시는 와인, ‘돈이 궁할 때’ 마시는 와인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나는 사업가 정신과는 동떨어진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신기한 접근법이라 생각했다.
저자는 와인의 역사를 실패에서 성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비유한다. 여러 가지 사업을 시도했다가 실패를 겪고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던 개인사로 미루어 보아, 그는 당연하게도 성공을 갈망한다. 따라서 이 책의 스토리텔링은 크고 작은 성공 신화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성공을 대변하는 것이 놀라운 수익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단란한 가정의 평화일 수도 있다. 그러니 와인을 전문적으로 탐구하기에 적합한 책은 아니다.
<인생 와인>은 말 그대로 인생을 비추는 와인, 와인에 담긴 인간군상을 바라보는 책이다. 저자는 인생의 고비마다 와인을 마시며 희로애락의 순간을 지나쳐왔고, 당시의 감정을 와인의 맛과 향으로 기억한다. 그가 세상의 풍파를 견디며 마신 와인의 의미는 무척 각별하다. 그러니 맛난 와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펼친 책에서 은근히 세속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와인은 세속적일 수밖에 없다.
와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접할 수 있는 공산품 와인도 있지만, 평생 먹어볼까 말까 한 비싼 와인도 있다. 즉, 와인은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할 수 있는 독특한 재화의 특성을 갖는다. 각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의 명성에 따라, 혹은 소믈리에들의 평가에 따라 와인의 값이 달라지는 폭은 엄청나다. 수집하고 되팔 수 있는 일종의 예술품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는 술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지만, 와인 커뮤니티의 상업성은 다른 주종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다양한 와인이 각 개인이 얻은 성과의 척도를 가늠하는 역할로 기능한다는 사실. 매우 가혹하지만 당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와인을 통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얘기하는 책이 나왔다는 것에는 이상할 게 없다.
책에는 와인 자체의 맛과 향에 대한 설명이 기대한 것보다 적었지만, (<신의 물방울>과 같은 이야기를 다룰 줄 알았다) 새롭게 알게 된 정보가 많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누구나 알 만한 유명인의 일생에 관한 후일담을 곁들여 와인을 큐레이팅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인생 와인>은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적이다. 와인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든지, 역사, 문화, 지리 등 다방면의 지식과 함께 와인을 알아가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한다. 다만 책에서 다루는 교양의 폭이 넓고 얕아, 와인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와인에 이런 사정이 숨겨져 있었어?”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흥미로운 얘깃거리도 많이 들어 있으니 읽어 볼 가치는 충분하다.
나는 즐길 수 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단순히 빈 속을 채우고 포만감을 얻기 위해 먹는 음식이 아닌,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을 만끽하며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음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와인은 참 좋은 음식이다.
포도에서 시작된 술이지만,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발효 공법에 따라, 생산자에 따라 천차만별의 맛과 향을 낸다. 그리고 어느 음식과 곁들여 먹어도 적당한 궁합을 가진 와인을 찾아내어 페어링할 수 있다. 이토록 높은 포용성을 갖춘 술은 와인이 유일하다.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 요리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와인을 아끼는 이유다.
와인은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음식이다. 모든 와인마다 각자의 개성과 매력이 있다. 어차피 나의 만족을 위한 와인이라면, 그 명성을 열심히 증명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도 그렇다. 나는 그냥 음식이 좋아서 만들 뿐이지, 세계적인 셰프가 되려고 음식을 만드는 게 아니다. 내 요리도 그렇고, 내 인생도 그렇다.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충분한 작품이다.
와인 한 잔을 들고 삶에 대한 건배를 외치는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인생 와인>에서 말하듯, 와인과 인생은 다르지 않다.
[이남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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