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존재했으므로 충분한 삶 – 뮤지컬 ‘브론테’

빅토리아 시대의 세 여성 작가가 말하는 자유와 연대
글 입력 2024.04.0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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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온전한 자유가 허락되지 않던 빅토리아 시대. 여자가 글을 쓰는 것이 금기시되던 그때, 글을 통해 자유를 갈망했던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자매가 있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써 내려가는 글이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들은 사는 내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뮤지컬 <브론테>는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던 세 여성 작가의 인생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시대적 배경이 오늘날 우리가 직접적으로 겪어본 적 없는 먼 과거이기 때문에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인물들의 삶과 내면에 대한 이입을 돕는다. 세 자매가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억압을 그리는 동시에, 현실에 치열하게 대항하며 연대했던 그들의 모습을 통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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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세 자매의 삶에서 출발해, 그들이 느꼈을 고민과 감정에 대한 상상을 거쳐 입체적인 인물들을 탄생시켰다.

 

우선 샬럿에게서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스스로와 두 자매의 재능에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글을 내보이고자 한 자긍심이다. 그러나 긍지를 가짐과 동시에 첫째로서 큰 책임과 부담을 짊어지고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쓰고 싶은 글을 오랫동안 쓰기 위해 또 여성으로서 당시를 살아가기 위해 책이 가져다줄 금전적 수익을 간과하지는 못했다. 강인한 인물이었지만, 글을 현실과 타협시키지 않으려 하는 에밀리와 갈등한 후 외로워하는 샬럿의 내면도 엿볼 수 있었다.

 

에밀리는 세 사람 중 가장 불안정해 보였다.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과 긴장이 내내 두드러졌다. 에밀리는 글을 통해 인간으로서 겪는 인생의 혼돈과 허무를 직면하고자 한 인물로 생각된다. 삶, 사랑, 인간 본성을 아름답기만 한 것으로 꾸며내고 싶지 않아 자신의 글에 우울과 어둠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내면의 갈등과 병으로 인해 계속해서 흔들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죽음에 점점 가까워져 가면서도 의문의 목소리를 듣고, 의문의 편지를 받은 후 모든 걸 쏟아내며 글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굳건한 신념이 비친다.

 

마지막으로 앤은 해맑게 웃는 얼굴이 누구보다 밝고 자유로워 보이던 인물이다. 막내이지만 샬럿과 에밀리가 대립할 때마다 지혜롭고 부드러운 타이름으로 집안의 분위기를 유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 날 선 말이 나올 때면 ‘이것은 글에 대한 비판이며 우리는 서로를 지지한다’는 말을 되뇌던 것에서 살필 수 있듯, 세 자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연대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토록 현명하고 단단했지만 글의 마지막 한 줄을 완성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유약한 모습도 가지고 있던 인물임을 느꼈다.

 

극은 세 자매가 글을 쓰며 자유를 꿈꾸는 희망적인 측면만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각각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그리고 <아그네스 그레이>라는 명작으로 전 세계에 그들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스스로의 글에 가졌던 확신을 조금씩 빼앗아가는 외부의 말들과 수군거림이 그들을 갈수록 외롭게 만들었다. 고뇌와 고독, 대립과 갈등, 그리고 병과 죽음까지 세 사람이 겪었을 고통 역시 가감 없이 전달하고자 한 의도가 그들의 인생에 더욱 몰입하는 것을 도왔다.

 

사실감을 느끼게 한 인물 묘사를 이어 무대와 음향 연출 역시 몰입을 더한다. 에밀리와 앤이 세상을 떠난 이후 무대에 등장할 때, 그들의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울리는 것처럼 들리도록 한 연출이 기억에 남는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믿음과 사랑을 충분히 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오만을 반성하는 샬럿의 입장이 되어, 자매들을 향한 깊은 그리움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그림자 연출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세 자매가 자신의 글을 서로에게 읽어주는 장면에서, 앤이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한 여자에게 찾아온 천사의 모습이 그림자로 묘사된다. 그 순간 앤의 옆얼굴 그림자가 뒤의 구조물에 나타나던 장면처럼 시각적인 아름다움 역시 내용에 대한 집중도를 높였던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세 사람 각자의 성정과 내면이 그들의 글뿐만 아니라 그림자에 비친 것 같았고 이러한 무대 소품의 활용이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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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모질고 때론 슬프기만 한 삶이었으나, 우리는 우리의 이름으로 내내 치열했고, 존재했으므로 이미 충분했다.’

 

극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대사였다. 그들의 삶은 분명히 막막했고 녹록지 않았지만, 때론 모질고 슬프기만 했던 삶에 글이라는 존재가 찾아와 줬기에 치열하게 버틸 수 있었다.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글 속 세계를 건설하거나 혹은 작품 속 인물들이 스스로 달려갈 수 있도록 그저 숨을 불어넣어 주면서 머릿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만약 그들이 보다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물론 세 사람은 시대 상황으로 인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굳은 의지로 글을 완성시켰던 인물들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본인의 이름이 각인된 책을 당당히 펴내지 못했거나 글이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던 것처럼 고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이 덜한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지, 어쩌면 그들 스스로도 그려봤을 수많은 가능 세계들에 대해 상상해 본다.

 

그렇지만 시대적 한계와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도 존재했으므로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서 더 애착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열정을 담아 글을 써 내려갔고, 자신만의 책을 완성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삶이었다는 것. 그 의미를 놓치지 않고 마음에 깊이 박히도록 하는 작품이라 더욱 소중하다. 의지, 저항, 열정의 가치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에게나 전해질 수 있는 가치라고 느껴진다.

 

더해, 세 사람이 치열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연대다. 괴로워도 버티고 또 견디며 세상에 책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연대와 사랑이 관계의 기저에 존재했던 덕분일 것이다. 서로의 믿음이 아예 없었다면 그들의 성취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살던 곳과 다른 곳, 그들이 살던 시대와 다른 시대에도 그들의 이야기가 닿을 수 있었던 것에는 서로의 힘과 사랑이 분명 작용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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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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