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바느질로 글쓰기 [미술/전시]

바느질로 글귀를 새기는 것에 담긴 의미
글 입력 2021.12.31 07:5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그리기와 글쓰기는 대개 서로 다른 논리를 지닌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리기’는 특유의 조형성으로 인해 다면적인 자유를 갖지만 ‘글쓰기’는 소리, 구문 및 의미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음성학적인 순서의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제약 상태에 놓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쉽게 두 행위를 나누고 각각의 원천에 대해 고민할 뿐 서로 가까워질 수 없는 것처럼 대한다. 이번 글은 이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되었다.

 

자수를 통해 글귀를 새기는 것은 몸을 움직이며 실천하는 ‘그리기’이자 ‘글쓰기’인 탈경계적 행위이다. 또한 이는 종종 신체 내 입력된 자연화에 반하는 방식으로 발현되는 독특한 수행에 해당한다.

 

‘글쓰기’는 손을 매개로 글로서 발화되는 내적인 언어로, 상당히 기술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프라의 습관으로 인해 몸에 자동화되어 있다고 느낀다. 가령 우리는 텍스트를 마주할 때 의미를 파악하려는 강박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혹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고 만다. 그러한 규칙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부터 텍스트는 자유분방한 도상으로 홀가분히 남는다.

 

캔버스의 역할을 담당하는 섬유는 결국 인간의 마음 풍경과 관계된 도화지나 다름없다. 작가의 심리가 투영된 작품들을 세심하게 눈에 담고, 모든 메커니즘들을 내려놓은 채 매개되는 심상들을 마음껏 상상할 때 우리의 내면은 조금 더 풍성해지기 마련이다. 글귀가 쓰여진 자수 작품들을 통해 ‘그리기’와 ‘글쓰기’는 ‘정신성’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비로소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 자수는 시간을 들여 마음 속에 품은 말들을 조형적 형태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보는 이의 입장에서 일반적인 작문과 바느질로 글을 쓰는 것의 직접적인 차이점은 무엇이 있을까? 글귀가 새겨진 자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문구들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가다 아메르의 'The Definition of the Word Love in Arabic’(2007) 의 경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일반적인 서술법에 입각하여 문구가 쓰여 있지만 의미를 읽어내기 어렵다. 이때부터 문구는 의미의 담지체라는 기능을 점점 상실한다.

 

 

131.jpg
’The Definition of the Word Love in Arabic’(2007), Embroidery and gel medium on canvas, 91x91cm

 

 

반면 조이 버크만의 여러 작품들에서는 문구가 도상적으로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하트 모양일수도, 타원형일수도, 아니면 회오리 모양일수도 있다. 가독하기 위해서는 관성적인 독해 습관에서 벗어나 역동적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작품에서 멀어질수록 의미를 캐치하기 어려운 대신 각각의 단어들이 더 이상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단순한 심볼에 불과하므로 조형성이 이전보다 부각될 수밖에 없다.

 

 

[크기변환]zoe.JPG
’Can I have a Minute to Pee Please’(2020)

 

 

자수로 글귀를 새기는 것은 우리의 감각 세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흔히 글귀가 적힌 자수 작품에서 바탕이 되는 천은 기체나 액체 상태로만 유유히 존재하던 언어를 붙잡으며 음성과 시각이라는 상이한 감각 간의 자유로운 전환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결과물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물질의 영역에 속하며 시간을 매우 능숙하게 견딘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따라서 앞으로 어딘가에서 글귀가 쓰여진 자수 작품을 발견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히 들여다보자. 그것들이 읽기 힘들다 해서 섣불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의 신체에 새겨진 자연화나 자동화의 규칙들이 매끄럽게 적용되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질수록 비정형화 된 텍스트 너머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할 확률은 커질지 모른다.

 

부디 관성적 습관에서 벗어나 모든 감각을 깨우고 능동적으로 텍스트 자수 작품들을 대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KakaoTalk_20211030_090836842.jpg


 

[신민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56142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E-Mail: artinsight@naver.com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Copyright ⓒ 2013-2022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