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잃은 이들의 이야기 - 포르투갈의 높은 산

글 입력 2021.12.1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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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겨울, 포르투갈 리스본과 포르투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포르투갈은 내게 자연과 도시의 건물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나라로 기억된다. 포르투의 언덕을 따라 올라갔을 때 내려다보이던 동루이스 강과 이를 둘러싼 낡은 건물들의 조화가 주었던 따뜻한 느낌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제목의 책을 받아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여행했을 때 느꼈던 포르투갈의 이미지가 재생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자연과 신, 그리고 각기 다른 상실 극복 방법에 초점을 둔 책이다. 저자인 얀 마텔은 전작 [파이 이야기]를 통해 자연을 배경으로 종교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우화의 형식을 빌려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이야기한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 역시 [파이 이야기]의 큰 틀과 이야기를 풀어가나는 방법에 있어 닮아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1, 2, 3부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집을 잃다, 2부 집으로, 3부 집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각의 챕터에서 각기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들의 공통점이란 모두 가까운 누군가를 잃어버린 적 있고, 어떤 필연적인 이유로 포르투갈에 살고 있거나 포르투갈로 오게 된다는 것이다. 연관성 없어 보이는 세 인물의 이야기는 3부에서 하나의 실타래로 연결된다. 하나의 서사시와도 같은 이야기의 끝이 궁금하다면 꼭 페이지 끝 장까지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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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집을 잃다


 

1부의 주인공 토마스는 아내와 아들, 아버지를 잃은 남자이다. 토마스는 숙부 집의 하녀였던 도라와 사랑에 빠지고, 사이에서 아들 가스파르를 낳는다. 죽음은 그의 아내와 아들을 단번에 덮쳤다. 병으로 인한 호흡곤란과 발작으로 괴로워하던 도라와 가스파르는 세상을 떠났고, 며칠 뒤 그의 아버지도 세상을 등진다.


국립 고미술 관에서 학예사로 일하던 토마스는 우연히 율리우스 신부의 일기를 발견한다. 토마스는 일기를 읽으며 위로를 얻는 동시에, 신부의 일기에 언급된 특별한 십자고상을 찾고자 율리우스 신부의 행적을 따라 포르투갈로 향한다.


토마스의 이야기 초반부는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떠올리게 한다. 홀로 남은 남성이 우연히 어떤 책을 발견하고, 그 책 하나 때문에 포르투갈로 떠나는 것. 포르투갈에 도착한 이후의 행보는 다르지만, 책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는 점도 닮아있다. 글을 보고 훌쩍 떠날 만큼 포르투갈이 충분히 매력 있는 나라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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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1904년에는 생소한 문물이었을 자동차를 숙부에게서 빌려 타고, 십자고상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서투르게 자동차를 몰고, 자동차는 상해를 입기도 하고, 씻지 못해 벼룩에 시달리기도 하며 토마스는 목적지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나아간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는 산이 없다. 포르투갈 북동부 지방에서는 언덕들 외에 아무것도 없다. 토마스는 눈과 바위를 예상했던 곳에서, 낮고 완만하며 투명하고 무덤덤한 햇살이 비추는 금빛 도는 풀밭을 발견한다.

 

토마스는 의도치 않게 차로 한 아이를 치어 죽이고 만다. 이때, 토마스가 차로 치어 실수로 죽인 아이는 3부 후반부에 이르러 중요한 존재로 등장한다. 괴로움에 허덕이던 토마스는 지친 상태로 한 교회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찾아 헤매던 십자고상을 발견한다. 하지만 십자고상을 발견한 토마스는 계속해서 흐느낀다.

 

 
P158 “슬픔이 밀려와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 운전대가 마침내, 완전히 그를 패배시켰다. 토마스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속이 지긋지긋하게 메스꺼워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씻지 않고 면도를 하지 않아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그의 시련이 절반만 끝나서다. 이제 리스본까지 그 먼 길을 운전해야 할 테니까.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며칠 낮을 계속 낯선 땅에서, 며칠 밤을 계속 춥고 비좁은 자동차 안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직장을 잃어서다. 이제 무슨 일을 할까, 어떻게 먹고사나?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아들과 연인이 그리워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그가 아이를 죽여서다. 그가 흐느끼는 이유는, 이유는, 이유는”
 

 

슬픔은 때로 우리를 덮친다. 새로운 목적지를 정하고 이를 찾으면 모든 슬픔이 말끔히 사라질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슬픔은 그대로 우리 안에 남아있으며 우리는 이를 그저 견디며 산다. 슬픔에 잠긴 인간은 신을 찾는다.

 

 

P159 “우리는 멋대로인 동물이다. 그게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 더 나은 무엇이 아니다ㅡ더 숭고한 관계 따윈 없다. 다윈이 태어나기 오래전, 광적이지만 명석했던 한 신부는 아프리카의 외진 섬에서 침팬지 네 마리를 만났다가 대단한 진실과 마주쳤다. 우리는 진화된 유인원일 뿐 타락한 천사가 아니다. 토마스는 외로움에 짓눌린다. “아버지,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가 절규한다.”

 

 

 

2부 : 집으로


 

2부의 주인공 에우제비우는 아내를 잃은 병리학자이다. 2부에서는 얀 마텔 작품의 특성인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 전개가 더욱 두드러진다. 얀 마텔은 병리학자라는 에우비제우의 직업을 문학적으로 묘사한다.

 

 

P165 “모든 시신은 들려줄 사연이 담긴 책이다. 각각의 장기는 소단원, 소단원들은 공통적인 서술로 어우러진다. 외과용 메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사연을 읽고, 마지막에 독후감을 쓰는 게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의 임무다. 일지에는 주검에서 읽은 바가 정확히 반영되어야 한다. 그것은 빈틈없는 시 같은 것이 된다. 어느 독자나 그렇듯 그는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2부의 초반 부분에서는 에우제비우와 그의 아내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이때, 죽은 아내 마리아와 에우제비우가 대화하는 시점은 현재로 보이는데, 그의 아내는 이미 사망했기에 흡사 아내의 유령과 대화하는 듯하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역시 현실과 상상 사이 경계의 모호함이 엿보인다.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의 매니아였던 마리아와 에우비제우는 크리스티의 소설과 성경 볶음서의 유사성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나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어본 적 없고, 성격 볶음서 역시 나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둘의 대화를 잘 이해할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성격이나 종교에 깊은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부분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에우비제우의 아내인 ‘마리아’가 떠난 후 또 다른 ‘마리아’가 그를 찾아온다.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낯선 여자는 자신을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왔다고 소개하며, 자신 남편의 시신을 들고 온 가방 안에서 꺼내 이를 해부해 달라고 한다. 2부의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 1부와 연결되는데, 낯선 ‘마리아’는 바로 1부에서 토마스가 차로 치어 죽인 남자아이의 어머니이다.

 

마리아는 시신을 앞에 두고 죽은 경위가 아닌 그녀의 남편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하다고 한다. 이런 마리아의 궁금증을 해결하듯, 이야기는 환상과 결부되어 남편의 시신을 한 부위씩 해부할 때마다 그가 살았던 삶의 흔적이 드러난다. 해부 이후 사랑했던 남편을 더욱 이해하게 된 마리아는 남편의 시신과 자신을 함께 봉합해달라고 요청한다.

 

다음 날 그대로 사무실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난 에우제비우는 슬프게 흐느끼며 그의 마음에 자리한 상실과 공허의 무게를 느낀다. 대사들이 참 좋았던 챕터이다.

 

 
P186 “인간 예수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전부 네 명의 우화 작가에게서 나왔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이야기의 음유시인들이 예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점이에요. (중략) 그제야 주로 입으로 전해져 살아남은 이야기들을 통해 예수는 우리에게 온 거예요. 한 사람의 자취가 우연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역사에 남은 거죠. 참으로 이상한 것을 예수가 그런 방식이기를 바란 것 같다는 점이에요.”
 

 

P187 “그것은 다시 한번 예수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야기가 혼례식이라면, 우리 듣는 이들은 통로를 걸어 들어오는 신부를 지켜보는 신랑이죠. 상상의 완성이라는 행위 안에서 함께 어우러져 이야기가 탄생하는 거예요. 여느 결혼이 그렇듯, 또 결혼이 제각기 다르듯 이 행위는 우리와 관련되고, 그래서 각자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느끼죠.”

 

 

P219 “그리고 큰 사랑은 또 다른 병이지요. 그것의 시작은 좋습니다. 비할 데 없이 바람직한 질병이에요. 큰 사랑 없이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사랑은 포도즙을 부패시키는 누룩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하고, 계속 사랑하다가ㅡ잠복기가 매우 길 수도 있습니다ㅡ그러다가 죽음과 함께 심장마비가 옵니다. 사랑은 반드시 원치 않는 종말을 맞이해야 합니다.”

 

 

 

3부 : 집으로


 

3부의 주인공인 피터 토비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출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그의 가족은 두 살 때 캐나다에 이민을 왔다. 캐나다 토론토의 상원의원으로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클래라를 잃는다. 유령처럼 살던 피터는 주변인들로부터 휴식을 취하라는 말을 듣고, 오클라호마로 2주간 휴가를 떠난다.

 

그곳에서 영장류 연구소를 발견한 토비는 한 침팬지를 만나게 되고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침팬지를 연구소에서 데려온다. 침팬지에게 오도라는 이름을 붙여준 토비는 그를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 지 고민한다. 피터는 결국 그의 가족의 뿌리인 포르투갈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피터는 오도를 데리고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마을에 도착한 피터는 오도와 함께 전화와 전기가 들지 않는 집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피터는 침팬지와 소통하는 방법을 스스로 배운다. 아내가 떠난 후 황량했던 피터의 마음속에 오도라는 침팬지의 존재는 또 다른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3부의 후반부에서는 피터와 1부, 2부 이야기 간의 연관성이 밝혀져 결국 세 개의 각각 다른 서사가 한데 모이게 되며 완전한 이야기를 이룬다. 피터와 오도는 이베리아 코뿔소를 발견하고,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다. 침팬지와 사람의 소통과 소통으로부터 얻어지는 감정의 묘사들이 아름답다고 느꼈던 챕터이다.

 

 

P349 “하지만 모든 게 떠내려가 버렸다. 어제 그가 뭘 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ㅡ그 어떤 것도, 아주 오래전 그가 클래라에게 대담하게 데이트 신청을 했던 일보다 중요하지 않다. 내일로 말하자면, 소박한 소망들 외에 그에게는 내일에 대한 계획이 없다.”

 

 
P351 “오도의 동작은 유연하고 정확하며, 의도에 꼭 맞는 크기와 강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동작들은 전혀 이목을 꺼리지 않고 실행된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오도는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그 행동을 할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치에 맞는 걸까? 왜 생각ㅡ인간의 특징ㅡ은 우리를 어설프게 만드는 걸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침팬지의 움직임에 비견되는 인간의 움직임이 있다. 위대한 연기를 펼치는 위대한 배우의 움직임. 똑같이 최소한의 수단으로 똑같이 어마어마한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연기는 혹독한 훈련의 결과이며, 인간이 고군분투하여 습득한 기술이다. 한편 오도는 쉽고 자연스럽게 한다ㅡ그런 존재다. 오도를 따라 해야 해. 피터가 속으로 중얼댄다.”
 
 
P366 “테레사의 말이 옳다. 오도는 그의 삶을 차지해버렸다. 그녀는 오도를 닦아주고 보살펴준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피터는 침팬지의 기품에 감동받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랑이다. (중략) 큰 바위 꼭대기에서 해넘이를 보면서 오도가 공중의 뭔가를 손짓하면, 장담컨대 내 눈에는 안 보이는 형상의 모서리를 조각하거나 표면을 다듬는 거야.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진 않아. 시간을 짜고 공간을 조각하는 존재와 함께 있는걸. 내게는 그걸로 충분해.”
 

 

신비로우며 슬픈 동시에 희망적인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눈앞에 이미지를 스스로 그려내게 한다. 이 책을 읽고 포르투갈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책이다. 1부의 토마스가 율리우스 신부의 일기를 읽고 삶을 파헤치러 떠났듯, 독자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읽으며 주인공들의 행적을 따라가는 과정 속에서 작가가 풀어내는 삶과 이야기를 마주하고 개개인의 상실을 다시 마주 보게 된다.

 

삶은 어쩌면 사랑을 잃고 다시 찾는 끊임없는 과정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어휘로 글을 마무리 짓기에는 책의 내용에 비해 너무 초라할 것 같아 책의 마지막에 첨부된 공경희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며 끝마치고 싶다.


 
“존재의 충일성을 깨뜨리는 상실에 맞닥뜨린 인간들과 그 구원을 다룬 이 소설은 ‘신’으로 대변되는 절대 불변의 신념 또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시 믿음으로 바꾸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얀 마텔은 환상적인 기법과 마법 같은 서사로 펼쳐 보인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그 자체로 성스러우며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다름 아닌 ‘이야기’임을 일깨워주는 놀라운 소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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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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