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조각]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단어가 쉽게 죽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글 입력 2021.11.1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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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조각 다섯번째. 영화(英華)와 영화(映畵)


 

#사라지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는 날


우리가 흔히 아는 영화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영화(映畵) : 『영상』 일정한 의미를 갖고 움직이는 대상을 촬영하여 영사기로 영사막에 재현하는 종합 예술.
 

 

하지만 영화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무려 6가지의 다른 의미를 가진 동음이의어를 찾을 수 있는데 그중에서 눈길을 끌었던 단어는 바로 ‘영화(英華)’였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1. 밖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색채.

2. 뛰어난 시나 문장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영국과 중국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다. 이 단어를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예문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삼당의 저작을 모아서 영화(英華)를 모았고….’(출처 <번역 순조실록>, 네이버 국어사전)와 같은 오래전의 문장을 발췌한 예문밖에 없었다.

 

그렇다. 이 단어는 사어(死語)에 가깝다. 이렇게 죽어가는 단어가 있구나, 영화(英華)의 존재와 사어의 존재를 받아들이던 순간이었다. 인용한 예문을 기점으로 단어의 나이를 막연하게 추측해보자면 대략 200살 정도 되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죽음을 맞이하므로 단어의 죽음도 그저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하면 될 터인데, 죽음은 언제나 익숙해질 수 없으므로 단어의 죽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주변에서 죽어가는 단어, 이미 죽은 단어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많은 한자어는 MZ 세대에게 한없이 낯선 단어들이 되어가고 있다. 단편적인 예로 최근 날짜를 나타내는 한자어 ‘금일’, ‘익일’, ‘작일’, ‘명일’, ‘작주’, ‘금주’, ‘내주’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들은 이제는 평소 일상 대화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단어들이 되었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이 단어들을 알고 있는 것이 상식인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느 시대에는 당연하게 사용되었을 이 단어들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단어의 뜻을 물어보는 단골 단어가 되었다.

 

생각보다 단어들의 생성과 소멸은 당연하게 이루어져 오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요즘이야말로 단어들이 쉽게 생겨나고 사라지고, 그 변화를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세상이다.

 

최근에 보았던 Z세대의 신조어들은 낯설고 신기했다(사전적으로 Z세대에는 나 또한 포함되지만,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Z세대로 여기진 못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과거부터 언제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언어를 한 번 더 비틀어서 사용하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호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겠지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의 가치는 단 하나다. 한 시절이 아닌 오랜 시간 살아남아도 아름다운 것, 혹은 가치가 있는 것. 물론 이러한 가치 판단은 너무나 주관의 영역이다.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 영화(英華)는 꽤 아름다운 단어라 여겨진다. 그래서 홀로 이 단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렇게 죽어가는 단어와 죽은 단어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사어 혹은 사어가 되어가는 단어를 쉽게 지나치면 안 될 이유로 단어의 역사를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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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영국의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찬기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사전에 실을 단어를 고르기 위해 ‘스크립토리엄’라는 공간에 수많은 단어와 그 단어들의 예문이 모인다. 그곳에서 사전 편집자들은 사전에 올라갈 단어와 예문을 계속 읽고 고르는 작업을 반복한다.

 

주인공 에즈미는 사전에 실리지 못하고 버려지는 단어들을 모은다. 버려진 단어의 역사는 사회에서 목소리가 미약한,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역사와 같다. 에즈미가 만들어내는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누군가의 단어들을 기록함으로써 그 사회의 가장 큰 목소리를 뒤로하고 작고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낸다.

 

버려진 단어는 그렇게 누군가를 생생하게 그려줄 수 있는 단어가 된다. 예를 들어 사전에 기록되지 못하는 시장 상인들의 걸쭉한 입담 속 단어들은 단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시장의 분위기와 냄새와 공기를 재현해낸다.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되어주며, 권력이 외면하려고 한 것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준다.

 

사어 역시 버려지고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어를 낯설다는 이유로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 죽어가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한 번쯤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당연하게 쓰이지 않을 단어들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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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2세기 사어 수집가』는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이 모여 22세기 사라질 단어를 상상해보고 그에 대한 정의를 내려본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들의 이야기를 따라 읽으며 내가 생각하기에 미래엔 사라질 법한 단어들을 상상해보는 일도 꽤 재미있는 일이다.

 

수록된 단어 중 하나를 소개한다.

   

 

그녀

 

매우 흔한 화석 중 하나다. 여성만을 가리키는 대명사의 필요성 때문에 개발된 이 단어는 구어보다는 문어에서 주로 생성되며 140년 남짓 생존했다. 특히 글에서 고유명사를 반복해 쓰기를 꺼리는 소설가 및 번역가가 무분별하게 생산했다. 오늘날에는 이원적 성별 개념이 무의미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멸종했다. ...(하략)

 

 

앞서 단어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싶다고 했지만, 사용되지 말아야 했던 단어들은(이걸 판단하는 건 오롯이 주관적인 내 생각일 뿐이지만) 점점 사라지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위에 인용한 이야기의 한 문장처럼 이제 점차 ‘그녀’라는 단어는 사라질 것이다. 세상은 과거보다 조금씩 나아가면서 과거의 존재들에게 함부로 상처를 주었던 단어들을 폐기하고 대체할 단어들을 찾는 방식으로 긍정적인 사회적 합의를 이뤄가고 있다.

   

상대적으로 대부분이 알고 쓰는 영화(映畵)의 의미가 강렬해서일까. 영화(英華)는 21세기 현재 죽어가는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누군가와 대화 중에 “나는 영화를 모으기를 즐겨.”라고 말한다면 상대는 십중팔구 좋아하는 영화를 모으기를, 혹은 DVD 수집이 취미인 사람으로 나를 볼 것이다. 내가 그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책에서 문장을 수집하기를 즐긴다는 뜻에서 말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속 사전 편집자들, 특히 에즈미는 이 영화(英華)라는 단어의 예문으로 어떤 것을 골랐을까. 에즈미가 단어의 여러 의미를 곱씹어보고, 단어가 쓰인 문장들을 살펴보듯이 이 사라져가는 단어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를 표현해줄 수 있는 아름다운 단어를 지나치지 못하고 찾아서 우리의 일상에 녹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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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들어본 영화(英華)의 예문

 

***


# 부록. 미리 엿보는 2021 영화모음집

 

올 한 해 모아온 나의 영화모음집의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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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하나. 조르주 페렉, 『공간의 종류들』 - "아무것도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한다. 우리는 보는 법을 모른다. 거의 어리석을 정도로. 더 천천히 접근해야 한다. 흥미롭지 않은 것, 가장 분명한 것, 가장 평평한 것,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적기 위해 노력하기. 더 평범하게 보도록 다짐하기.(83쪽)"

 

책 둘. 프레드 울만, 『동급생』 -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21쪽)"

 

책 셋. 박솔뫼, 『미래 산책 연습』 - "언제나 그렇듯 순간순간 이해했다고 착각한 장면을 무척 좋아하면서 그것을 품은 채 다음 걸음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243쪽)"

 

책 넷. 박시하, 『무언가 주고받은 느낌입니다』 중 '디어 장폴 사르트르' - "11월이 곧 떠납니다 / 떠나는 건 붙잡을 수 없어요 / 사르트르, 떠나보낸 것들은 / 무사한가요"

 

*

 

낯선 것은 세상에서 혹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익숙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잊히는 것들이 죽어가도록 두지 않고 사랑하는 방식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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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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