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폭력에 사랑이라는 이름 붙이지 마세요: 연극 '로테/운수'

글 입력 2021.11.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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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단체 ‘하이카라’가 강렬한 연극 <로테/운수>를 선보인다. ‘하이카라’는 여성주의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는 여성 예술인 창작 집단이다. <로테/운수>는 <모던걸 백년사>를 잇는 ‘하이카라’의 두 번째 작품으로, 2021년 10월 23일부터 11월 14일까지 대학로 한성아트홀 1관에서 진행된다.

 

 

*

본 리뷰는 연극 <로테/운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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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제목에서부터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듯, 이 공연은 흔히 ‘고전’이라고 여겨지는 두 문학작품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한 작품이다. 그 두 작품은 바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리고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다.


원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로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베르테르가 ‘사랑’했던 여성의 이름이다. 다만 ‘운수’가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김첨지가 ‘사랑’했던 여성의 이름인 것은 아니다. 김첨지는 그의 아내를 ‘오라질 년’이라고 불렀을 뿐이었다. '운수'라는 이름은 원작과 창작극을 연결하기 위한 ‘하이카라’의 의도적 재구성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본 연극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운수 좋은 날>을 원작의 주인공이 아니라 원작의 주인공이 ‘사랑’했다고 알려진 두 여성의 입장에서 쓰인 작품이다. 이는 작품에 대한 여성주의적 해석인 동시에 가려진 목소리를 듣기 위한 마땅한 고민이다.


지저분한 소유욕이 ‘마음 아픈 사랑 이야기’로 낭만화되는 과정에 대한 윤리적 성찰이며, 사회적 권력 구조가 개인적 관계에 개입되는 과정을 고발하는 언론이다. 리뷰를 통해 ‘하이카라’가 어떻게 현실을 반영하는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한다.

 

 

 

1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에 가려진 스토킹



공연은 총 65분 동안 진행되는데,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첫 번째 파트는 ‘로테’의 이야기를 담고 두 번째 파트는 ‘운수’의 이야기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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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로테 역 배우 이혜

 

 

원작에 이야기를 조금 덧붙인 것일 뿐이라고 볼 수 있을 ‘운수’ 파트와는 달리, ‘로테’ 파트는 원작에 다소 많은 가공을 가했다. 주인공 ‘로테’는 낙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로테’로, 베르테르는 그의 수업을 듣는 제자로 설정된다. 18세기 후반이었던 시대적 배경은 21세기로 옮겨왔고, 공간적 배경 역시 현대 한국 사회로 재구성되었다.


이러한 가공은 원작의 폭력적 요소를 부각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더욱이 극에 등장하는 대사들이 동시대 일상적 담화와 뉴스 기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로테는 자신의 집 현관문 앞에 계속해서 놓이는 장미꽃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의 남자친구가 두고 간 것인 줄 알았으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집 앞에 출처가 불분명한 꽃이 연속해서 3일간 놓이자 불안해진 로테는 경찰서를 찾는다. 두려워하는 로테는 경찰서에서 “인기 많으신가 보네요.”라는 어이없는 답변을 듣게 되고, 자신의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이러한 상황을 말한다. 어머니는 로테의 두려움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 원인을 로테가 두려움을 느끼게끔 하는 대상에 두지 않는다. ‘여자 혼자 살면 위험하니, 가족과 함께 살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살겠다고 나간 로테의 탓으로 돌린다. 늦은 밤에 혼자 다니는 로테에게 책임을 묻고, 그러니까 현관에 아빠 신발이나 군화를 놓아두라 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범죄 피해자는 말 그대로 피해자이다. 그러나 피해자가 ‘올바른 행색을 갖추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 연극은 이러한 구성을 통해 실제로 빈번히 일어나는 2차 가해 상황을 잘 반영한다.


시간이 지난 후 로테는 다시 집에 돌아온다. 이번엔 문 앞에 꽃이 놓여있지 않았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 안에 들어갔는데, 집 안 식탁에 꽃다발이 놓여있는 것을 본다. 소름이 끼친 채로 경찰에 신고를 한다. 그리고 범인은 자신의 수업을 듣는 제자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경찰에서는 ‘주거침입죄는 해당되겠다’라고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영 미적지근한 반응이다.


로테의 남자친구가 소식을 듣고 경찰서에 등장하면서부터 조사가 신속히 진행된다. 그리고 남자친구는 로테가 극심한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로테 곁에 머무르며 로테를 지켜줄 테니 자신과 결혼하자고 프로포즈한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연극은 남성 발화자의 “내가 지켜줄게, 같이 살자, 결혼하자”를 ‘로맨틱한 상황’으로 만드는 사회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애초에 누군가가 누군가로부터 ‘지킴 받아야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누군가를 지키는 것,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것이 목적이 되는 행위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소유에 가깝다. 소유는 사랑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처럼 <로테/운수>는 동시대에 실제로 일어나는 폭력적 상황을 연상시키는 대사를 통해 베르테르의 스토킹 행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관객의 공감을 더욱 수월하게 유도한다.


또 한 가지 살펴볼 점은, 원작과 동일한 결과에 있다. 베르테르가 자신의 ‘사랑’이 실패에 도달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자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원작과 연극이 같다. 그러나 원작에서는 그 소식을 접한 로테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다. 베르테르의 사랑이 얼마나 마음 아픈지만을 부각한다.


베르테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로테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지는,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쉬이 그려볼 수 있다. 분명 잘못은 자신을 스토킹한 베르테르, 그리고 거기에 안일한 대처를 한 사회 제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까지 하게 된다.


한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책으로 출간되고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며 수많은 대중과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는다. 로테는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자신 때문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독한 년’이 되고,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다.


낭만화된 남성 발화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 에 가려진 스토킹 범죄, 그리고 그 범죄 피해자의 이야기. <로테/운수>는 이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다. 연극은 이에 따라 각종 정신 질환을 앓게 된 로테의 정신과 상담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정신과 의사는 로테에게 ‘심각한 수준의 피해망상’의 진단을 내린다.

 

 

 

2부: '운수' 좋은 날 – 에 가려진 가정폭력



사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가정폭력적 요소를 잡아내는 것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스토킹 요소를 잡아내는 것보다 훨씬 쉽다. 주인공 ‘김첨지’는 자신의 아내를 항상 ‘오라질 년’이라고 부르고, 아내가 오랜 기간 앓아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이란 놈에게 약을 주어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온다는 자신의 신조”를 강요하며 아내가 병원에 가거나 약을 짓는 것을 막았으며, 이에 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아내에게 “왜 눈을 바루 뜨지 못”하냐고 소리친다. 그것이 끝도 아니고, 아픈 아내에게 걸핏하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원작에서는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김첨지 역시 “눈시울이 뜨끈뜨끈”하였음을 강조하면서 폭력적 상황에 ‘애틋함’이라는 낭만을 부여하며 김첨지의 폭력을 용인한다.


<운수 좋은 날>의 배경은 현재 한국과 시대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하이카라’에서 크게 손댈 부분은 없었을 것이다. 극단에서는 뒷이야기를 추가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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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수 역 배우 조수빈

 

 

원작에서는 김첨지의 아내가 죽은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로테/운수>에서는 그때 '운수'는 잠깐 기절했던 것이라는 설정으로 변경된다. 김첨지가 ‘죽은 운수’ 옆에 술에 취해 잠들어 있을 때, '운수'는 기절 상태에서 깨어난다. 김첨지에게 당해온 폭력과 오랜 기간 앓던 질환으로 인해 심신이 미약해진 '운수'는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판단력이 흐려진 '운수'는 김첨지가 사온 설렁탕이 담긴 뚝배기로 그의 머리를 내려친다. 정신을 차린 이후에, 자신이 죽인 것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죽어있는 남편의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경찰에 신고한다. 그리고 신고하는 도중 남편을 죽인 것이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연극은 이러한 '운수'가 정말 심신미약의 상태에 처해 있었는가, 그의 행위가 정당방위였는가를 따지는 재판 상황을 보여준다.


판결은 '운수'가 자신이 남편을 죽인 후 경찰에 신고할 때 자신이 남편을 죽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신미약’에 상태에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그 당시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죽인 것이기 때문에 정당방위임을 인정받지 못하고 유죄판결을 받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검사 측에서 제시한 그 ‘다른 방법’이었던 ‘남편의 폭력을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운수'가 이전에 이미 취했던 조치였다는 것이다. 그때 경찰은 '운수'에게 귀찮은 기색을 표했으며, '운수'가 폭력을 당해 도망쳐온 곳인 ‘가정’에 돌아가 기다릴 것을 요구했었다.


이러한 구성에서도 현실을 찾아볼 수 있다. 가정폭력의 특수성으로 인해 피해를 주변에 알리는 것부터가 어렵다는 점, 문제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그 폭력의 근원지인 가정이라는 점, ‘다른 방법’을 취하지 않은 최초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점 등은 현실에서 가정폭력 피해자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유사한 부분이 적지 않다.


낭만화된 남성 발화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 에 숨겨진 가정폭력, 그리고 그 피해자의 이야기. 연극은 이에 따른 '운수'의 재판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판사는 '운수'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

 

 

 

내재적 작품성: 강렬한 연출



<로테/운수>가 담고 있는 메시지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연극의 연출이 특히나 인상에 깊이 남았다. 극이 의도한 사회적 메시지로 인해 연출적 측면이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할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작품과 감상자, 작품과 사회, 작품과 작가와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작품 자체의 작품성 역시 중요하다. <로테/운수>는 작품과 감상자/사회/작가와의 관계를 잘 반영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내재적으로도 아주 훌륭한 작품성을 보여준다.


필자는 연극을 보는 내내 필자가 연극을 감상하고 있는 것인지 행위예술을 감상하고 있는 것인지 (물론 둘을 가르는 확실한 구분 선은 없지만) 헷갈렸다. 신선한 연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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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연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두운색 물감과 배경 간의 대비이다. 공연 시작 전 무대는 새하얗다. ‘로테’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 ‘로테’뿐만 아니라 무대에 롤러를 들고 하얀 공간을 채우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새하얀 바탕을 짙은 색의 물감으로 채워 나가고, ‘로테’는 그 채워진 공간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


‘로테’가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감정이 고조될수록 물감을 칠하는 롤러질 속도는 빨라진다. 결국에 ‘로테’는 바닥 그 어느 곳에도 서 있지 못하고 의자 위에 올라가 움츠러들게 된다.


이러한 어두운 물감이 칠해진 상태는 애초부터 어두운 분위기로 시작되는 ‘운수’ 파트에서 효과적인 기능을 한다. ‘재판 진행 상황’이라는 분위기에 맞게 어두운 배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로테’ 역을 맡았던 배우는 ‘운수’의 속마음을 대변해주는 역할로 다시 등장하여, 벽에 물감으로 '운수'의 속마음을 소리치듯 그려나간다.


물감 활용 외에도 다양한 신선한 연출을 맛볼 수 있는 연극이었다. 특히 배우들의 감정이 고조될수록 배우들이 더욱 강력한 에너지 방출을 보여주기에 관람객들의 감정에도 깊이 각인된다는 점, 빔프로젝터를 사용해 주변 인물들의 대사를 진행했다는 점, 물건을 갑작스럽게 천장에서 낙하시키며 주인공이 느꼈을 공포, 놀라움, 당황스러움 등의 감정에 관객들이 공감하게 만든다는 점 등이 그러한 연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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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소유 그리고 폭력 사이의 헷갈리기 쉽지만 꼭 필요한 구분에 관해 고민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연극이었다. 포루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문장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무리하고 싶다.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는 최선의 방법이겠지만,

소유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최악으로 전락시킨 욕심일 것입니다.

 

주제 사라마구, "미지의 섬" 中



[최호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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